MEN'S CLOTHING CULTURE
돌기둥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한없이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려는 듯 거대한 그 돌기둥들이 나를 기다린다. 계절과 상관없이 하늘에서 작은 창을 통해 투명한 푸른빛 바닷속이 보이기 시작하면, 올림푸스 공항에 곧 착륙할 것임을 알 수 있다.떠날 때는 언제나 ‘이제는 그만 와야지’ 하면서도 몇 개월 만에 이 바다를 보면 ‘또 돌아왔구나’ 하고 혼잣속으로 되뇐다. 10년 가까이 이렇게 반복하다 보니 이젠 별 생각이 없을 만도 한데 필자는 아직도 아테네를 그린다.
아테네는 사실 ‘옷장이’로서는 볼 것이 별로 없지만, 그 특별한 역사와 유물들이 가득한 장소에 있다 보면 옷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목표점이 잡힐 듯한 마음에, 그 안타까움에 이번도 그 다음도 끌려 찾고 만다. 가죽과 신발을 사랑하는 도시
아테네는 역사 속 그들의 이야기와 현시대 이들의 모습이 이루는 부조화가 그대로 나타나는 도시다. 지금의 아테네는 전 세계인들이 어릴 적부터 접하는 웅장하고 신비로운 그리스 신화 속 그 거대하고 위대한 신들의 도시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리어 무질서한 모습이다.
문화와 문명을 급조한 아시아 혹은 중동의 어느 국가나 사람들처럼 특징이 없어 필자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다만 도심의 신다그마 광장과 에르무 거리, 우리나라 청담동 격의 고급 주택가이자 패셔니스타들의 아지트가 밀집한 콜로나키를 둘러보면 아테네 패션 문화를 조금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클래식 시대를 연 후예로서 아테네 사람들의 면모가 보인다. 특히 에르무 거리는 젊은 사람들의 옷뿐만 아니라 나이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피류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만족시킨다. 평편하고 넓은 이 길에는 다양한 가게뿐 아니라 꽃가게도 즐비해 밝은 색상의 건물들을 예쁘게 수놓는다. 마치 큰 백화점을 이 길에 넓게 뿌려놓은 듯하다. 아테네 사람들은 가죽과 신발을 유독 좋아한다. 필자가 가본 많은 도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일 만큼 신발 매장이 많다. 각 매장들의 규모가 크고 거대 매장의 수도 엄청나서 마치 ‘신발 스트리트’ 같다. 신발을 좋아하는 패셔니스타들이 많기는 한 모양이다. 샌들과 부츠는 계절에 관계 없이 주요 아이템이다. 고대와는 달리 별로 춥지 않은 날씨에도 가죽, 모피를 사랑한다(필자는 추운 겨울이면 따듯한 그리스가 그리워지는데, 이들은 이 날씨가 추운 모양이다).
쇼핑객 또한 많은데, 특히 세일 기간이 되면 더더욱 많은 인파가 몰린다. 파란색 가죽이 돋보이는데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산토리니의 기억을 새록새록 일깨우는 청명한 파란빛이 예쁘다. 여행객이 붐비는 오모니아 광장과 재래시장을 지나면 ‘위대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아고라와 로마광장을 넘어 찬란히 서있는 아크로폴리스, 오데온, 디오니소스 극장, 제우스 신전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아름다운 유적들은 아직도 세계인들이 고대 신들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설레며 아테네를 찾게 하는 이유가 아닌가! 가운데 서있는 아크로폴리스로 직행한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솔론이 걸었던 길을 상상한다.
그 입구의 아레오파고스 바위는 고대에는 회의장이자, 재판장이자, 토론장이었다고 한다. 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에 아테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적의 전망을 가졌지만 과연 그 옛날 귀족들이 어떻게 이 험한 바위를 올랐을지 상상하자니 재미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아테네를 내려다보며 여러 나라 화술의 달인들이 토론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도시 전경을 감상하고 있자니 새로운 사상과 철학들이 생겨난 이유가 놀랍지 않다. 사도 바울의 아테네 강론, 그때의 모습을 삼차원(3D)으로 재현해 보면 어떨까? 고대 클래식의 진가가 빛나는
아레오파고스에서 올려다보는 아크로폴리스! 페리클레스의 지도력과 피디아스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산 위의 인공 도시. 이제는 많은 부분이 소실됐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보는 이를 사뭇 경건하게까지 만든다.
이오니아와 도리아 양식의 기둥으로 이뤄진 산정의 도시, 육중한 돌기둥들이 이토록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르테논 신전의 도리아 양식, 니케 신전의 이오니아식(심지어 이 거대한 기둥들의 곡선미가 아름다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모두가 우아함 그 자체로 필자가 가진 미의 기준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듯하다. 파르테논 신전의 장중한 아름다움이 바로 런던 댄디족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닌가 싶다. 늘어선 많은 기둥들은 마치 멋있는 신사들이 입는 슈트 같다. 파리예술학교 마당 한가운데에 고대 그리스 기둥이 세워져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완전한 균형미는 단아하고 부드러우며 숭고하다.
우리는 그들의 시대를 클래식이라 한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사르토리아가 그 이름을 키톤(Kiton: 그리스 제사장의 옷)이라 칭한 것도 그들의 클래식을 닮고 싶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키톤은 이미 세계적인 명품 사르토리아 브랜드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테아트로의 효시인 오데온 극장과 디오니소스 극장은 모두 고대 아테네인들의 음악당이었다고 하는데(디오니소스 극장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신전이었다고 한다), 다른 많은 신전과 건물들처럼 완벽한 모습은 아니나 그 잔재만으로도 그들의 위대한 삶의 모습이 곁에 있는 듯하다.
예술과 과학이 뒤섞인 이 거대 유물들은 균형과 조화를 절대미로, 삶을 사상과 학문, 예술로 나타낸다. 이제 됐다고 생각하지만 클래식 패션의 실루엣을 다듬고 새로운 패션의 가닥을 잡고자 몇 개월 뒤에도 아크로폴리스 돌계단을 또다시 밟게 되겠지. 순례객들과 여러 나라의 건축과 패션 예술가들이 현재의 아테네를 보고 느끼고 해석하듯이, 고대 아테네인들은 그들보다 더 이전의 유적인 펠레포네소스 반도의 도시, 미케네의 미니멀리즘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미케네인의 세련된 단순함과 아테네의 우아한 절대미가 마치 동시대에 생성된 것처럼 공존하는 것은 아무리 보고 생각해도 풀리지 않을 예술적 의문이다.
현대 패션에 클래식과 모던이 공존해 발전하듯이 시대를 뛰어넘은 공감일까.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 진리에 가장 근접한 것 같다. 현대 아테네의 콜로나키 거리의 셀렉트 숍들과 멋을 내는 저 많은 쇼퍼들은 고대 클래식을 알고 있을까? 지금 아테네는 다른 두 개의 세계가 같이 가고 있다. 옷보다는 돌로 만들어진, 돌이 만들어낸 선의 문화를 보여주며.
글·사진 이영원 장미라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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