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맞게 행동하는 것은 이제 과거의 유물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고령화 시대의 뉴시니어를 분석하고 노년기 설계에 있어 롤 모델이 돼줄 어모털족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어모털족, 그들은 누구인가
“암이나 교통사고, 그 밖에 다른 이유로 40세에 세상을 떠날 운명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지금 몇 살이라고 해야 할까요. 38세? 그 사람은 이 운명을 알든 모르든 삶의 황혼기에 와 있습니다. 그럼 100세에 죽을 운명인 사람이라면 언제쯤이 인생의 황혼기일까요. 78세일까요?”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의 창립자 휴 헤프너는 81세에 이런 철학적인 말을 남겼다. 2010년 84세가 된 헤프너는 그가 설립한 회사의 상당한 지분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고, 주식을 더 사들이기 위해 입찰에 활발히 참여하며, 성인 잡지 펜트하우스의 다른 소유주들과 경쟁하고 있다. 또한 24세의 약혼자 크리스털 해리스에 대한 소식을 트위터에 올리고 있다.
헤프너의 젊은 약혼자는 한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헤프너 사이에서 60년이라는 세월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나이 차이를 가지고 쑥덕거리지만 난 그런 차이를 전혀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도 뭔가 차이가 있다면 나는 어른이고 헤프너는 아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겠죠.”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역시 1930년생으로 올해 83세지만 투자와 기부,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버핏이 지난해 미국 증권거래소 인수란 메가톤급 도전을 추진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인수·합병(M&A)에 끊임없이 배고프다”며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다음 ‘버핏의 회사’가 될 인수 대상을 물색하고 다닌다.
그는 2012년 4월경 전립선 암 1기 진단을 받았지만 “담당 의사들 가운데 누구도 업무를 줄이라는 권유를 하지 않고 있다”며 아랑곳하지 않고 버크셔해서웨이의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아직까지도 후계자를 특별히 정하지 않은 상태다. 버핏은 최근 암 방사선 치료를 끝내고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도 발간된 책 ‘어모털리티(Amortality)’의 저자이자 미국 시사 잡지 타임(Time)의 유럽 편집장 캐서린 메이어는 나이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유행병’처럼 퍼지고 있음에 주목했다. 그는 이런 ‘어모털족’의 등장은 사회의 풍요가 낳은 부산물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 여유, 과학의 발전 등이 결혼, 출산, 교육, 직업 등 인생의 주요한 선택을 나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시기’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리고 메이어는 어모털족이 등장한 배경에는 ‘자기애’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어모털족을 “10대 후반부터 죽을 때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거의 대체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이 소비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나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한국의 어모털리티
헤프너나 버핏 같은 인물은 갑부이고, 어모털족 이야기는 서구 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일반화하기 어려울까. 국내에서도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신세대 고령층’을 일컫는 뉴시니어가 부각되고 있고 어모털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국내에서 50대 이상의 베이비붐 세대는 여유 있는 자산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일과 취미활동, 그리고 왕성한 소비까지 종전 시니어와는 구별된다. 뉴 시니어는 인생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함께한 세대다. 1960~70년대 유·청년 시절을 보내 삶과 창의성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문화적 감수성을 키웠다.
특히 이때 해외 대중문화가 급속히 유입돼 팝송과 할리우드 영화에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열광하던 세대였다. 이들은 청·장년기에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세계를 누볐고 산업 전선에서 활약해왔다. 그래서 특유의 성취감과 자긍심을 갖고 있고 학습 의지도 높다.
최근 은퇴 전선에 내몰리면서 그동안 치열한 삶 때문에 잊고 살았던 젊은 시절의 감성을 되찾고 싶은 향수를 느끼는 한편, 정보기술(IT), 모바일, 인터넷 등 테크놀로지를 몸에 습득해 사이버 세계에서도 젊은 층 못지않은 활약을 하는 디지털 시니어로도 재탄생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일과 삶 모두에서 인생 2모작, 3모작에 도전하는 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이들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모털족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메이어의 어모털리티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최근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힐링 열풍’을 소개한 부분이다. 그는 “도착 예정 시간이 없는 여행과 같은 새로운 치유법들은 죽음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보다는 희망에 찬 여행을 계속 하고 싶어 하는 어모털족들에게 언제나 매력적인 제안이다”라고 말한다.
이모털족은 여행을 비롯해 평소에 하고 싶었던 악기 연주, 문화 공연 관람, 아웃도어 활동 등으로 스트레스를 치유하며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충전한다. 어모털족의 왕성한 일과 취미생활의 필수조건이 바로 적절한 힐링인 것이다.
최근 국내 공연, 연극, 영화, 방송 분야에서 뉴시니어가 주요 관객층으로 부상한 것, 뉴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강좌가 급증하는 현상, 그리고 온라인 시니어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것은 바로 어모털리티 삶의 한 단면이다.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며 문화 공연을 즐기는 뉴시니어 세대는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데도 능동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50~59세 인구가 계속 증가해 2030년에는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돼 뉴시니어의 소비 시장 영향력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나이의 구분이 사라지는 어모털리티가 확대될수록 업계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시세이도는 안티에이징 화장품에 ‘아름다운 50대가 늘어나면 일본이 변한다’라는 나이를 강조한 광고 문구를 사용했다. 그러자 판매량이 크게 떨어지는 결과가 나왔다.
뉴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경우, 고령자 대상의 제품을 내세워 ‘시니어’를 강조하기보다는 나이 구분을 없애고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는 쪽으로 마케팅을 진행해야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마쓰무라 기요시의 ‘시니어 마케팅’에 따르면 골프 여행의 경우 ‘시니어 투어’보다는 ‘챔피언 투어’, 화장품의 경우 ‘50세 이상을 위한 메이크업’보다는 ‘열 살 젊어지는 메이크업’의 광고 문구가 훨씬 더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뉴시니어의 자부심, 전문 지식, 경험을 잘 존중하는 기업이 어모털리티 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 일례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團塊世代·1947~49년생)’가 지난 2007년부터 대거 퇴직하자 기업의 콜센터에 이들의 문의와 불만 전화가 폭주하는 ‘2007년 문제’가 발생했다. 콜센터에 불만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들을 ‘단카이 몬스터’라고 지칭하는 신조어도 만들어졌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뉴시니어들의 나이를 잊으려는 어모털리티 성향, 그리고 이들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 지속적으로 직업을 갖고 일을 하려는 의지, 경제적·시간적 여유, 그리고 어모털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힐링까지 종합적인 분석과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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