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뮤직비디오로 하고, 빅뱅이 007 콘셉트로 다양한 미션을 수행해보면 어떨까요?”
“뮤직비디오도 좋고, 007도 괜찮은데요? 빅뱅이 자연스럽게 성숙한 이미지로 어필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참! 저희가 노래 하나 들려드릴게요. 이 노래를 007 콘셉트로 가면 딱 어울릴 것 같아요.”
짧고 통통 튀면서 성숙한 멜로디 라인이 007 느낌을 연상시킨다.
“저희가 007 이야기를 할 줄 알고 미리 만들어 놓으셨어요?”
“저희가 만든 건 아니고요. 지디 군이 예상했나 봐요.(웃음)”
옷차림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대화를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캐주얼한 옷차림의 YG Brand 전략팀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무리의 정장 군단은 바로 현대카드 Brand 기획팀 사람들. 카드 회사 직원들이 엔터테인먼트계의 아성인 YG 사옥에는 웬일일까?
그 계기는 불과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카드의 정태영 사장은 우연한 기회에 빅뱅 얼라이브 투어를 보게 됐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치밀한 빅뱅의 퍼포먼스에 매료돼 양현석 대표 프로듀서에게 만남을 청했다. 양사의 대표는 몇 마디 나눴을 뿐이지만 서로에 대해 강한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함께 뭔가를 만든다면 새로운 것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기로 다짐했다.그래서 지금 현대카드 직원들이 YG 사무실을 찾게 된 것이다. “뮤직비디오는 어떻게 만들어볼까요?”
“아무래도 007 콘셉트니까 빅뱅 멤버들이 블랙 슈트를 입고 무언가 미션을 수행하는 게 좋겠어요.”
“근데 여기에 저희 현대카드가 조금 노출될 만한 부분이 있으면 좋겠는데, 또 노골적으로 PPL 하기는 좀 그렇죠?”
“이런 건 어떨까요? 카드가 007 미션을 클리어하는 무기 혹은 열쇠가 되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카드가 표창처럼 쓰인다거나, 만능열쇠로 쓰이기도 하고, 카드를 던지면 연막탄으로도 사용되는 거죠.”
한쪽에서 무언가 툭 던지면 다른 쪽이 뼈대를 만들고, 다시 받아 살을 붙여 아이디어에 숨을 불어넣는다. 어쩌면 이야기가 공상에 가깝게 뻗어나가도 거르거나 막는 사람이 없이 발전시킬 수 있을 때까지 내버려둔다. 현대카드 직원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의 음악과 의상, 뮤직비디오에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것이 무척 즐거워만 보인다. 현대카드 Brand 기획팀, YG패밀리로 오해받다
현대카드와 YG패밀리는 007 콘셉트로 결정한 아이템을 정태영 사장과 양현석 사장이 보는 앞에서 발표하는 자리를 갖게 된다. 현장의 분위기는 의외로 무거웠다. 이윽고 양현석 사장의 한 마디가 침묵을 꿰뚫는다.
“이 노래 말구요, 이 노래가 훨씬 좋습니다.”
양현석 대표 프로듀서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오디오 데크에 꽂는다. 노래가 사무실을 가득 메운다.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친다. 그 노래가 바로 ‘몬스터’다. 사실 YG 실무자들도 ‘몬스터’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해 여름 출시할 스페셜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생각하고 선뜻 ‘몬스터’를 논의 아이템으로 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양현석 대표 프로듀서가 선뜻 던진 것이다.
현대카드 직원들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내 아쉬웠다. ‘몬스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007 콘셉트와는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007 아이디어도 상당히 구체적인 수준까지 진척시켜 놓은 아이템이라 포기하기 힘들었다. 전면 수정, Brand 기획팀의 손과 발이 바빠지는 시점이 바로 여기부터다.
이미 노래가 만들어졌지만 구체적인 콘셉트를 잡고 뮤직비디오를 완성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YG 사람들과 논의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너무 재미있다는 점이었다. 현대카드 직원들이 멤버들의 콘셉트나 의상, 스토리라인 등에 대해 기발하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낼 때면 YG 직원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구체적인 논의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많은 부분 부딪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현대카드 직원들도 내심 조심스러웠다. ‘욕심’과 ‘명분’이라는 두 점 사이에 선을 긋고 그 위 어딘가에 점을 찍어야 했던 순간, 정태영 사장은 현대카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욕심을 내기보다는 현대카드의 역량을 자연스레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하자고 했고, 그 의견에 실무진들은 모두 동감하며, 세련되게 현대카드를 드러낼 수 있는 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뭔가 새롭고 다른 것이 나와야 한다는 긴장감 속에서 다른 기업들이 걸어간 발자국 위를 그대로 밟는다는 것은 꺼림칙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의견 차이를 좁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태다 보니 회의를 하는 YG 사옥이 현대카드 본사보다 익숙해졌다.
현대카드 Brand 기획팀 사람들은 이 뮤직비디오를 완성하기 위해 현대카드 본사가 있는 여의도와 YG 본사가 있는 홍익대를 잇는 서강대교를 한 20번쯤 건넜을 것이다. 이미 YG 사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현대카드 Brand 기획팀 사람들을 반(半)정규직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오가는 택시 안에서 이런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우리가 YG랑 하니 망정이지, SM이나 JYP랑 했으면 택시비가 어휴, 4배 정도는 더 나왔을 거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무사히 마치고 편집을 앞두고 있었다.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그만큼 치열했기에 퀄리티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었다. 그러나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완성도를 향한 무한 집착, 초조함을 설렘으로…
Brand 기획팀 직원들은 뮤직비디오 오픈 일주일 전만 해도 여유가 있었다. 편집을 비롯해 뮤직비디오 제작과 관련해서는 그동안의 작품들을 미뤄봤을 때 YG가 워낙 잘하기 때문이다. 6일, 5일, 4일, 3일.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기다리던 뮤직비디오 소식이 깜깜하다. 현대카드 직원들은 슬슬 초조해졌지만 YG에 편집 등의 모든 과정을 일임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김에 YG 측에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저희가 뮤직비디오를 가편집된 내용이라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론칭되기 전에 저희가 최종 버전을 먼저 확인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혹시 조금 수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요.”
“아, 지금으로선 저희도 드릴 만한 가편집본이 없습니다. 사장님이 이건 직접 챙기고 계시는데요, 엄청 꼼꼼하게 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양현석 사장이 직접 챙긴다니 안심은 되지만 3일 전까지 어떠한 결과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시간은 영문도 모른 채 흘러만 갔다. 결국 발표 당일까지 뮤직비디오 영상이 현대카드 측에 도착하지 않았다.
실무자를 비롯해 정태영 사장조차 너무 궁금했지만, 뮤직비디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끝까지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고, 결국 정태영 사장을 비롯한 모든 경영진, 실무진은 빅뱅 팬클럽인 VIP와 같은 시간, 네이버를 통해 영상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실무진이 꼽는 가장 아찔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갑작스런 기자회견, 지독한 현대카드 스타일을 보여주다
뮤직비디오는 반향이 컸다.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지만 충분히 현대카드 브랜드를 어필했던 뮤직비디오를 통해 많은 이들이 컬래버레이션(협업)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며 찬사를 보냈다. 현대카드 트위터뿐만 아니라 정태영 사장의 트위터 팔로어 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10대, 20대가 대다수였지만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정태영 사장과 Brand 기획팀 직원들이 당시의 성과에만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YG 경영진과 정태영 사장이 다시 한 번 미팅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저희가 이번에 인디 뮤직에 관심을 두고 현대카드 MUSIC이라는 음원 사이트를 오픈했는데, 어떻게 알릴 만한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예상 외로 YG에서 흥미를 보이며 제안했다.
“커버 이벤트 어떠세요?”
“커버 이벤트요?”
“네, 빅뱅이 이번에 부른 ‘몬스터’를 누군가가 다시 부를 수 있는 오디션을 열어보는 거, 어떨까요?”
“아, 좋은 생각입니다. 기왕이면 혹시 현대카드 MUSIC의 취지에 맞게 인디 뮤지션들이 커버할 수 있도록 하면 더 홍보효과가 크지 않을까요?”
그렇게 ‘리몬스터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정태영 사장과 YG 경영진이 낸 아이디어에 Brand 기획팀은 인디 뮤지션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방식, 현대카드답게 리몬스터를 홍보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빅뱅이 컬래버레이션과 관련해 직접 말하게 하자는 정태영 사장의 제안을 받은 양현석 대표 프로듀서도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였다. 갑작스레 기자회견 일정이 정해졌다. 리몬스터 프로젝트의 홍보, 나아가 현대카드 MUSIC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 Brand 기획팀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다. 뮤직비디오 편집은 YG가 담당했지만 현대카드 사옥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은 전적으로 Brand 기획팀이 책임을 맡았다.
기자회견이 열리는 날까지 일주일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빅뱅의 스케줄을 조율하는 것부터 시급했다. 해외 출장 중이던 담당 임원까지 서울로 바로 소환했다. 결국 빅뱅만 참여하는 것으로 확정됐다.
‘촉박하지만 대충할 수는 없다.’ 이것이 현대카드 스타일이라고 했다. 기자회견 전날 모든 시스템을 세팅해 놓고도 안심하거나 한자리에 머무는 직원이 없었다. 갑자기 Brand 기획팀장이 팀원 다섯 명을 호출했다.
“XX씨는 지드래곤, XX씨는 탑, XX씨가 대성, XX씨가 태양, XX씨가 승리예요, 알았죠?”
직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또 하나의 빅뱅이 된다. 지금부터 그들이 할 일은 기자회견 당일 빅뱅이 도착하는 곳부터 기자회견 장소까지 이동 경로를 시뮬레이션 하는 일이다. 건물 하나를 이동하는 루트를 열 가지나 정했다고 한다. 기자회견 전날부터 당일까지 Brand 기획팀 실무진은 초시계를 들고, 또 하나의 빅뱅은 열 번을 다른 길로 이동한다.
잔머리 쓰는 직원 하나 없이 열 번의 시뮬레이션을 하고 걸린 시간을 비교한다. 가장 눈에 안 띄고 가장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해진 루트지만 다양한 돌발 상황을 고려해 세 번 정도 더 시뮬레이션을 한다. 그래야 행사 당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행사는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잘 끝났다.
현대카드 브랜드는 참 빛이 난다고들 얘기한다. 그러나 그 빛은 스스로 ‘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현대카드 Brand 기획팀 직원들이라면 그 빛을 위해 언제든, 몇 번이든 서강대교를 건널 각오가 돼 있는 듯하다. 단련된 그들이 못할 일이 또 무엇일까.
김보람 기자 bramvo@kbizweek.com 사진 현대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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