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화 가치는 미 달러화뿐 아니라 엔화 등 대부분의 이종 통화에 대해 절상되고 있어 일본 엔화의 ‘안전 통화 저주’처럼 ‘원화의 저주’에 걸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에 따른 환율 폭등으로 대규모 환차손을 본 국내 기업들은 다시는 되새겨 보고 싶지 않은 용어 중 하나가 키코(KIKO·Knock-In Knock-Out)다. 금융 위기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난 2013년 들어서도 깊은 상처(trauma)가 지워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관련 소송이 지루하게 지속되고 있다.

키코만큼 구조가 복잡하지 않고 사태도 공식화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가 큰 것이 ‘엔화 대출 후폭풍’이다. 피해 규모만 본다면 키코 사태보다 월등히 크고 2006년 이후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어 피해 기간도 키코보다 2년 이상 장기적이다. 일부 국내 기업 외환담당자들은 엔화 대출 후폭풍을 오히려 ‘제2’가 아니라 ‘제1의 키코 사태’로 부른다.

2006년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면 원·엔 환율이 100엔당 730원까지 하락했고 일본 경제도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실적을 내야 할 시중은행과 자금난에 봉착했던 국내 기업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엔화 대출이 급증했다. 이런 상황은 금융 위기 이전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원·엔 환율이 2012년 10월 말까지만 하더라도 1400원 이상 유지됐고 금융 위기 직후에는 1600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키코 사태까지 겹치면서 엔화 대출을 사용한 수많은 국내 기업과 개인 병원들은 부도가 났고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 외환 역사상 1997년 외환위기, 키코 사태에 이어 3대 환위험 관리의 실패 사례로 꼽힌다.

‘엔화 대출 후폭풍’이 몰아닥친 가장 큰 요인은 금융 위기 직후 마진 콜(margin call)에 직면한 미국 금융사들의 디레버리지(deleverage·자산 회수) 과정에서 급등했던 원·달러 환율이 가장 큰 요인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로 금융사들이 마진 콜을 당하면 외부에서 긴급 자금이 지원되지 않는 한 기존에 투자했던 자산을 처분해서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시장 상황은 위기 발생국보다 위기를 피해갈 것으로 보이고 경제 여건이 좋은 국가가 디레버리지 대상국으로 적합하다. 위기가 발생한 국가들은 보유 자산을 팔려는 사람이 많고 사려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대규모 초과 공급이 발생한다. 이 시장에서 보유 자산을 처분하면 그 과정에서 가격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당초 계획보다 더 팔아야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중국 등과 같은 경제 여건이 좋은 국가들은 팔려는 사람은 적고 사려는 사람은 많아 초과 수요가 발생하거나 최소한 위기가 발생한 국가보다 수급 사정이 좋다. 따라서 마진 콜을 당한 금융사들이 이 국가를 디레버리지 대상으로 선택하게 되고 이들 국가들은 외국 자금이 대거 이탈돼 주가가 떨어지고 환율이 올라가는 현상을 맞는다.

실제로 금융 위기 직후 주가 하락폭으로 본다면 위기 진원지인 미국의 다우 지수는 45%에 그친 반면 한국의 코스피 지수는 65%, 중국 상하이 지수는 무려 75%가 폭락했다. 금융 위기 발생 이후 달러당 850원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봤던 원·달러 환율은 거꾸로 1600원까지 올라 키코 사태와 엔화 대출 후폭풍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는 정책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면서 물가를 일정 수준 이상 올리고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해야 하는 트릴레마 (trillemma)에 봉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정책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면서 물가를 일정 수준 이상 올리고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해야 하는 트릴레마 (trillemma)에 봉착하고 있다.
안전 통화 저주에 걸린 일본 정부

엔화 대출 후폭풍이 몰아닥치게 된 또 다른 요인은 원·달러 환율이 진정될 무렵에 유럽위기가 발생하자 엔화 가치가 ‘안전 통화 저주(curse under safe haven)’에 걸리면서 급등했기 때문이다. 베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가 처음 주장했던 안전 통화 저주란 미국, 유럽의 잇따른 위기로 안전 피난처(safe haven)로 엔화 수요가 증대되는 현상을 말한다.

유럽 위기가 발생한 이후 국제 금융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될 때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뚜렷했다. 엔화의 명목실효환율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반영하는 주가 변동성 지수(VIX)와 포지티브 상관관계를 보인다. 특히 모기지 사태, 유럽 위기 등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엔화 강세가 일본 경제 여건과 관계없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설상가상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가 활성화됨에 따라 불확실성이 확대될 때 안전 자산 선호와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맞물리면서 엔화 강세가 증폭된다는 점이다. 그 메커니즘을 보면 ‘불확실성 증대→안전 통화 선호→엔화 수요 증가→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네거티브 트레이드)→엔화 수요 증가→엔화 초강세’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된다.

경제 여건과 관계없이 엔고(円高)가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일본 경제는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동시에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국면이 우려되는 상황 속에 무역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서 삼중고를 당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정책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면서 물가를 일정 수준 이상 올리고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해야 하는 트릴레마(trillemma)에 봉착하고 있다.

이제 미국 금융사들의 증거금 보전 현상은 마무리됐다. 더욱이 출범 초부터 수출진흥책을 추진해온 오바마 정부는 집권 2기를 맞아서도 양적완화 등을 통해 달러 약세 유도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지역별로는 한국 등 아시아 수출국을 대상으로 달러 약세 정책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론적으로 특정국 통화가 안전 통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는 시장 리스크, 유동성 리스크, 신용 리스크로 평가해 본다면 엔화의 안전 자산으로서의 위상은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엔고 저주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던 개인 금융 자산이 줄어들고 무역수지가 대폭 적자로 돌아섬에 따라 안전피난처로 엔화 수요가 급감하고 있다.

정책적으로 일본은행이 엔고 저지를 위해 최후의 방어벽을 치고 있다. 2012년 엔고 저지를 위한 자산 매입 규모가 36조 엔, 그중에서 9월 이후 21조 엔에 달하는 가운데 앞으로도 더 늘려 나간다는 방침이다. 같은 해 10월 초에 국제통화기금(IMF)이 공식적으로 우려했던 일본의 위기설은 2013년 들어서도 확산되는 추세다.

중요한 것은 원화 환율과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내 기업들은 너무 오랫동안 엔화 강세 환경에 젖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엔화가 본격적으로 약세로 돌아서면 ‘엔화 대출 후폭풍’은 줄어들겠지만 또 다른 환위험 관리에 실패해 제3의 키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더 우려되는 것은 엔화 강세가 풀릴 시점에 원화 가치는 미 달러화뿐만 아니라 엔화 등 대부분 이종 통화에 대해 모두 절상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일본처럼 ‘원화 저주’에 걸려 우리 경제가 ‘일본화(Japanization)’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어 2013년 들어서도 원화 환율 움직임이 더 주목된다.

2012년 4분기 이후 원화 저주란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원화 강세가 우리 경제 여건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분한 외환보유고, 신용등급 상향 등 내부적으로 원화 강세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12년 성장률이 2%대 초반에 그쳤고, 2013년에도 3%대 초반이 될 만큼 낮게 예상된다. 침체되는 경기를 반영한다면 원화 가치는 약세가 돼야 한다.

하지만 대외적인 요인 때문에 원화 가치는 강세가 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미국 중앙은행(Fed)의 3차 양적완화(QE3)다. 이 정책 추진 이후 달러 가치는 뚜렷하게 약세를 보이고 있다. 주요 통화에 대해 달러 가치 동향을 알 수 있는 달러 패러티 지수는 한때 85에 이를 만큼 강세를 보이다가 최근에는 80 내외로 약세로 전환됐다.

우리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위안화 가치가 절상되는 것도 원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최소자승법 등으로 위안화와 원화 간의 동조화 계수를 구해보면 0.57로, 위안화 가치가 1% 절상되면 원화 가치도 0.57%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일한 방법으로 추정된 엔화와 원화 간의 동조화 계수 0.02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2012년 하반기 이후 환율 결정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는 헤지펀드의 ‘ABCD’전략도 원인이다. A란 아시아 투자(investment in Asia), B는 핵심 업종 투자(Bluechip investment), C는 경기순환적인 투자(Cyclical investment), D는 투자 다변화(Diversification of investment)를 뜻한다. 이 전략의 최적지로 우리나라가 지목되면서 이들 자금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안정적 외환 관리 대책

경제 여건과 관계없는 원화 절상으로 우리 경제 성장세가 빠르게 둔화되고 있다. 2012년 2% 초반대의 낮은 성장률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예측기관들은 올해도 3%대 초반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잠재성장률이 3.7%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국내총생산(GDP) 갭으로 2년 연속 디플레 갭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각종 비관론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 증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속 성장 여부와 관련해 ‘성장의 덫(growth trap)’에 걸릴 것이라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어 2013년 1분기 이후 성장률이 더 주목되는 상황이다. 성장의 덫이란 경제발전 초기에는 유치 단계의 이점을 누리면서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에 성장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는 현상을 말한다.

원화 절상이 우리 증시와 경제에 저주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뒤늦었다 하더라도 외국 자금의 유입 속도를 조절(smoothing operation)해야 한다. 추가 금리 인하를 통해 대내외 금리차를 축소하거나 평상시에는 부과하지 않다가 과다하게 유입될 때 부과하는 이원적 외환거래세(two way Tobin tax system) 도입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갑작스런 외자 이탈에도 대비해 놓아야 한다. 가장 보편적인 대책은 외환보유고를 충분히 확보해 놓는 일이다. 간접적으로 확보한 제2선 자금까지 포함하면 우리 외환보유고가 4000억 달러가 넘어 이 대책은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 하지만 사전에 외국 자금의 이탈 징후를 포착하는 것이 우리 경제 안정성과 정책 효율 면에서 더 중요한 대책이다.

외자 이탈의 사전 대책으로는 다양한 방안이 나오고 있으나 과거 위기발생국의 공통적인 경로를 토대로 볼 때 신호등 체제를 활용한 조기 경보 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외환당국에 제안한다. 특히 조기 경보 체제는 예비적인 성격이 강하고 위기가 발생하면 엄청난 비용과 고통, 위기를 극복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낙인 효과가 따르는 점을 감안하면 이 체제를 도입하더라도 가능한 신속하게 운용할 필요가 있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