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왔어요?” 기다림에 지쳐 입이 한 자는 나온 나에게 현지 가이드 셰인은 “미안하다”란 말 대신 이런 말로 인사를 건넸다. 비행기 도착 시각에 맞춰 픽업하겠다던 그의 굳은 약속은 까만 눈동자의 이방인을 졸지에 40여 분간 앨리스 스프링스 공항의 국제적 난민으로 만들며 산산조각이 났다.
홀로 떠난 여행에서 언제나 감내해야 할 ‘예상 밖’과 ‘위험’이건만, 가이드 없는 허허벌판의 울루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디 무임승차할 캠핑카가 없는지 기웃거리는 것 외엔 없었다. 펠리컨이 빙의한 입이 가녀리게 반달 모양을 그린 것은 울루루 투어가 본격적인 가도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하늘과 땅 외에 무엇도 허용하지 않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울루루 투어의 8할은 ‘이동’이다.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울루루까지 335km, 울루루 북동쪽에서 킹스 캐니언을 아우르는 와타르카 국립공원까지 300km 등 원 없이 ‘드라이브’를 즐겼다. 일반적인 이동은 목적지를 향한 피치 못할 과정이겠지만, 이곳에서의 이동은 상당히 독립적이다.
2차선을 두고 양 옆으로 광활한 펼침 면이 된 길은 그저 길이 아니라 여행의 또 다른 목적이다. 이동 자체가 목적이 되다니! 흥분한 마음이 서둘러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서 어깨가 들썩인다. 신이 난다. 그런 점에서 마크 트웨인은 얼마나 현자였던가. 단조로운 항해를 거듭하다 보면 지성을 갖춘 성인이라도 어느새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행위를 선호한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면.
난 셰인이 건넨 풋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서도, 누군가 개그를 한 것도 아닌데 연신 낄낄댔다. 여행의 동행자인 완고한 70대 독일인도 배낭에서 낯가림 없이 먹을거리를 나눠주었고, 샌님처럼 보이던 영국인 청년은 두 눈을 초롱초롱거리며 셰인의 운전을 방해할 정도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우린 순식간에 호기심과 모험심이 충만한, 보이스카우트의 명예를 얻은 소년이 됐다. 아, 이는 ‘현지인도 평생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란 호주의 배꼽, 울루루가 있는 레드 센터에 상륙한 신호탄인가. 울랄라! 나아가라! 울루루의 뚝심
누구나 이곳에서 소년이 되고 마는 것은, 울루루의 육중하게 세운 어깨에 있다. 348m의 높이, 9.4km의 둘레, 9억 년 전 형성에 이어 실제로 이의 3분의 2가 땅 밑에 숨겨져 있다는 도무지 손을 내저어도 부인할 수 없는 꼬리표가 이 거대한 바위의 프로필이다. 울루루 앞에선 누구나 덩치 큰 거룩한 존재를 만난 듯 옴짝달싹 못하고 몸이 굳어진다. 날씨와 시간에 따라 붉은 버전의 무지개로 때깔을 달리하니, 지구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슴 벅찬 환희가 인간에게 침묵을 가르친다.
울루루의 현재는 말하자면 세월과 변덕 심한 자연현상의 합작품이다. 태곳적 땅의 표면이 내려앉고 썰물과 밀물에 의해 할퀴고 깎이면서 쌓인 퇴적층이, 하늘로 우뚝 솟는 드라마틱한 지각 변동이 있었다. 이후 비바람의 모진 참견 속에 풍화작용을 일으킨 결과 두툼하고 농익은 스테이크가 된 이 바위는 현재 전 세계인을 끌어들이는 일약 스타가 됐다. 이번 여행에서 울루루와 조우한 것은 세 번이었다. 일몰과 일출, 그리고 한낮. 대부분 여행자는 일몰과 일출에 시간을 안배하는 편이다. 일몰 때는 우리나라의 소주 격인 옐로 테일 와인과 스낵으로 분위기 잡는 연인을 흉내 내고, 일출 때는 인산인해를 헤쳐 전망의 베스트 스폿을 잡는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그런데 의외로 울루루의 진면모는 한낮에 있다. 단, 10km를 주행하는 하이커의 강심장이 필요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어라! 오직 두 다리로, 물 한 통만이 일용할 양식일 테니.
울루루 둘레길의 첫 테이프는 바위를 만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알알이 모래가 얼싸안은 끈끈함이 빚어낸 바위다. 의외로 아기 피부처럼 보드랍고 오일이라도 몰래 발라놓은 듯 매끄럽다. 본래 반출이 금지된 이 영험한 돌을 훔쳐 모국에 돌아갔다가 불운이 계속돼 반납했다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로, 돌의 촉감은 가히 매혹적이다. 초입엔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과 호주 정부와의 감정 격돌이 눈에 띈다. 논란이 되는 건 울루루의 다소 완만한 경사에 말뚝을 막은 등반로다. 호주 정부는 관광 수입을 위해 개방을, 원주민은 조상의 얼을 지키기 위해 금지를 주장하는 알력이다. 원주민은 그저 울루루 등반 중 추락사한 시신의 사진만을 현대인의 욕망을 억제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면 무슨 소용인가. 이토록 금지에 목숨 거는 못난 인류가 많은데. 다행히 이날은 이런 욕망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거센 바람 때문에 등반이 금지돼 있었다.
재잘대던 동행인의 말수가 줄어든 건, 이 기묘한 바위에서 원주민의 생채기를 실제로 목격한 이후다. 반지르르한 모래바위의 앞과 옆, 아래 곳곳엔 원주민의 생애가 낱낱이 암각화로 모습을 드러낸다. 야생화도, 야생 열매도, 물웅덩이의 흔적도 있다. 장장 4시간에 걸친 하이킹은 ‘돌아갈까’, ‘포기할까’, ‘주저앉을까’ 하며 의지란 녀석과 씨름할 만한 길이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땅과의 마찰력이 사라지면서, 뜨거운 생에 대한 집착은 끓어오른다. “나아가라, 이 햇살과 바람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이리 난 건재하나니.” 울루루는 본래 ‘그늘이 지난 땅’이라 했다. 마음에 곰살궂은 햇살이 들어선 것 같았다. 킹스 캐니언, 이 미물의 삶을 낮추리다
어젯밤 울루루의 정기를 받은 보이스카우트의 호기로 감행한 비박은 꽤 성공적이었다. 현지 여행사를 통해 2박 3일의 캠핑 투어 프로그램을 직접 예약한 이유는 멍청한 도시인이 야생에 길들여지기 위해서였다. 좀 더 레드 센터와 가까워지려는 의지였다는 건 애교로 넘기자. 오전 6시가 되자 와타르카 국립공원의 캠핑장은 여기저기 촉촉하게 이슬비에 적셔진 야전 침낭을 부스럭거리면서 기상을 알렸다.
가이드이자 셰프이자 보모로 탈바꿈하는 셰인은 오늘의 목적지인 킹스 캐니언을 설명하면서 특유의 갈매기 눈썹을 씰룩거렸다. 물이 1.5리터 이상 없으면 킹스 캐니언의 등반을 금지하겠다는 엄포를 날리면서. 하긴 12월경이면 이곳 기온이 최대 영상 34도다. 혹 백두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냐는 추궁 속에, 영화 ‘127시간’에서 갈증에 허덕이다가 팔을 잘라 구정물로 목을 축인 주인공의 본성이 오버랩되는 공포가 엄습했다.
입구에서 대충 훑어본 킹스 캐니언은 보기엔 꽤 만만해 보였다. 5.5km, 왕복 3시간 30분이 걸린다는 표지판도 안심하는 데 한몫을 했다. 인간의 눈이란 게 믿을 게 못 된다고 깨달은 건, 돌계단을 오른 지 10분도 되지 않은 때였다. 숨이 심장을 막아버리는 기분. 바람은 미치기를 작정했다. 그저 앞선 하이커의 발뒤꿈치만 보고 끝나겠다는 탄식도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속는 셈 치고 뒤돌아 세상에 시선을 내어준 순간, 눈을 끔뻑 뜨고 다시 떴다. 병풍 같은 바위의 울렁임 속에 조각난 빛이 나무를, 꽃을, 세상을 가로질렀다. 좀 더 오르니 그 땀의 노고를 치하하듯 정신이 번쩍 드는 절벽 병풍을, 그 속에 푸르른 생명력을 광활하게 내어줬다. 고개 숙인 소녀의 올린 머리 같은 이 돔의 향연은 무엇인가. 직사각형의 식빵 모양으로 잘린 돌이 비바람에 의해 수직면이 깎이면서 동글동글 크루아상의 거친 질감을 이룬 풍경, 드디어 잃어버린 도시의 한가운데 상륙한 터였다. 거친 돔은 웅크린 채 몸을 일으킨 원초적인 풍경이다. 잃어버린 도시를 지나자 뇌는 상상력으로 폭발했다. 분명 바위인데 호수의 잔주름 흔적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곧 손으로 떼면 떼어질 듯 바짝 마른 바위 껍질은 뭔가? 암벽에 벌집을 낸 타포니의 잔재와 협곡 사이로 또 다른 협곡의 레이스가 펼쳐진 풍경은? 도대체 자연은 얼마나 기를 죽이려고, 무엇을 더 내려놓으라고 아우성치는 것일까. 곧이어 이런 상상을 둔기로 내리치듯 오르락내리락 리듬의 완급을 이루며 협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투를 벌이는 코스가 나온다. 자연은 비이성적으로 평온하다. 점점 시원한 살기가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제법 무성한 팜트리가 허리 숙여 환영 인사를 건네던 그때, 오감이 번쩍거리는 광경. 폭포의 광음 속에 샘물은 가는 바람의 주름을 내며, 이름 모를 새가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다. 누군가 일러주지 않아도 이곳이 에덴동산(Garden of Eden)이란 동의 속에 나그네들은 다투어 목을 축였다. 그나마 인공적으로 조성된 다리 위로 마지막 스퍼트를 내니 정상이다. 그간 자연에 쥐락펴락 농락당한 기분은, 살을 태우는 직사광선처럼 이곳에서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에덴동산이 단맛이라면 정상은 쓴맛이다. 울퉁불퉁 길거나 짧거나 굵거나 제각기 목을 빼며 조각을 이룬 바위의 협곡을 지나 쩍쩍 거친 칼로 썰어둔 협곡의 위협은 직립을 자신 없게 한다.
서 있는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릎이 꿇렸다가 이내 포복 자세로 엎드리게 된다. 그것이 정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에게 허락된 자세다. 마른 침을 꿀꺽 넘겨 삼킬 때, 협곡 사이를 겨루듯 지나치는 바람은 ‘낮아져라, 낮아져야 한다’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며 떠났다.
그날 밤. 캥거루 고기를 여럿이 뜯어 먹고 두둑한 배를 두들긴 이후. 밤하늘이란 바다 위에 출렁이는 별 아래, 야전 침낭은 이미 날 기다린 눈치였다. 그날의 배경 음악은 캠프파이어에서 미처 다 타지 않은 마른 장작의 몸부림이다. 그마저 다 타버리고 사라지자 뜻하지 않은 고요, 우린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좋지? 아, 정말 좋다.” Uluru & Kings Canyon info
How to Get There
인천에서 시드니를 경유해 울루루로 가는 것이 통상적이다. 울루루로의 관문은 앨리스 스프링스나 에어즈 록 공항을 통하는데, 앨리스 스프링스로 인앤아웃하거나 앨리스 스프링스로 들어가 에어즈 록으로 나오는 코스를 택한다(투어 프로그램에 맞춰 선택). 보통 현지의 버진 블루와 콴타스 항공을 예약해 시드니에서 울루루까지 약 3시간 30분 정도의 비행을 즐긴다. 혹 맬버른을 들를 맘이 있다면, 시드니~맬버른~울루루~시드니의 코스를 짜는 것이 시간과 돈을 두 배로 버는 일! 버진 블루 항공 http://www.virginblue.com.au, 콴타스 항공 http://www.qantas.com.au
Where to Stay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과 킹스 캐니언 등엔 고급 접대용 리조트도 있다. 하지만 이 레드 센터에 온 이상 눈을 질끈 감고 야생에 몸을 맡길 것. 다국적 여행자와 불쾌하지 않게 즐기려면 소수 정예를 원칙으로 하는 현지 여행사를 개인적으로 예약하는 게 좋다. 이 여행에서 가이드는 거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데, 어드벤처 투어스가 고경력의 재간둥이를 많이 포섭한 걸로 알려졌다. http://www.adventuretours.com.au
Another Site
울루루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짝꿍은 카타추타다. 두상이 쩍쩍 놓인 듯 36개의 야성적인 바위 사이로 쏜살같이 다가오는 바람을 쩝쩝 맛볼 수 있다. 체력에 자신 있다면 이 바위를 거쳐 바람의 계곡까지 트레킹하는, 환상의 우주 하이커가 돼볼 것.
글·사진 강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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