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케이션
제주 남서쪽의 중산간. 한 편의 시(詩) 같은 이름에 걸음이 멎는다. 표선면의 작은 마을 가시리(加時里)다. 시간을 더하고 늘리는 마을이라니. 신비한 작명이 영험한 명약처럼 마음을 어른다. 머무는(stay) 여행(vacation)이 주는 평안이다.근원을 따져들면 가시오름이 나온다. 가시리 남쪽에 있는 오름이다. 가세오름이라고도 한다. 가세는 제주말로 가위다. 오름의 생김이 가위를 닮아 그리 불린다. 가시리에 머문 이들은 안다. 하루를 머물고 이틀을 머물고 사흘이 지나면 독특한 기운이 몸에 스민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른다. 그러므로 의미를 상실한다. 가쁜 세상에서 한 걸음 떨어져 유유하고 자적한다. 재촉하는 이도 서두르는 이도 없다. 떠나는 여행이 아닌 머무는 여행의 진정한 시작이다.
이른 아침, 햇살의 두드림으로 잠에서 깬다. 문을 열자 습한 듯 말간 청량감이 끼친다. 낯선 공기의 촉감이다. 그 풍경 속으로 이른 걸음을 낸다. 산책은 여행이 만드는 습관이다. 처음 만난 동네와 친해지는 과정이다. 머무는 여행의 첫걸음이다. 가시리에서는 마을 초입의 체육공원까지 걷는다. 공원은 제법 넓다. 작은 트랙과 운동 기구들을 갖췄다. 아침 운동을 나온 마을 사람들과 눈을 맞춰 인사한다. 늦은 오후의 산책인들 어떠랴.
스테이케이션은 현지의 삶이지만 또 여행의 나날이다. 그 미묘한 경계에 게으름이 적당히 녹아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느지막이 나선 산책은 커피 한 잔을 찾는다. 가시리사무소 가는 길의 동네가게(064-787-8765)다.
간판에는 ‘농촌과 도시의 공생을 추구하는 동네 가게’라 적혔다. 가시리는 도시 이주민의 예술적 감수성이 자연스레 마을과 어우러졌다. 동네가게는 그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커피도 팔고 다채로운 문화 상품도 판다. 마을 주민도 찾아들고 도시의 이주민도 찾아든다. 마을살이의 정보를 얻고 사람을 사귀기에 안성맞춤이다. 갑마장길과 가름질길이 실린 가시리 문화지도도 얻을 수 있다. 느릿느릿한 일상의 여유가 스미는 순간
몇 해 전 가시리에는 걷기 좋은 길이 생겨났다. 제주도의 도보 여행이 제주 올레길뿐일까. 마을마다 그 역사를 품은 명품 길들이 연이어 열렸다. 가시리의 갑마장길과 가름질길은 그 가운데 손꼽는다. 갑마장길은 약 20km에 달하는 먼 걸음이다. 도시락 하나를 챙겨들고 나선다. 길의 절경을 고루 찾아 걸으면 족히 7시간은 걸린다.
마을 방문자센터를 출발해 설오름과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으로 이동한다. 갑마장은 조선시대 갑마(甲馬)를 키워낸 마장이다. 1794년부터 1899년까지 약 100여 년간 나라에 진상하는 최고의 말을 길러냈다. 지금의 가시리공동목장 일대에 해당한다. 중산간 목초지의 경계는 돌담으로 표시했다. 바로 잣성길이다. 그 가운데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 사이의 중잣성길은 제주에서 가장 또렷하다. 사철 푸른 삼나무가 함께 길을 따른다.
풍력발전기도 인상적이다. 오롯한 오름의 매력도 뒤지지 않는다. 따라비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다. 고(故) 김영갑 작가도 즐겨 촬영했다. 큰사슴이오름은 한라산 전경을 품은 화려한 오름이다. 중턱에 서면 가시리 10여 개의 오름 군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반환점은 큰사슴이오름 아래 다목장광장이다. 행기머체와 소꼽지당, 안좌동 입구를 거쳐 다시 방문자센터로 돌아온다. 행기머체 근처에는 지난 10월에 개관한 조랑말박물관도 볼거리다. 조랑말에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가까이에는 승마 체험이 가능한 목장들도 여럿이다.
가름질(길)은 14.4km로 4시간 남짓이다. 갑마장길에 비해 수월하다. 가시리 마을이 가진 소소한 풍경과 역사의 행로다. 승지물돗당 같은 신당도 나오고 충의사와 한씨방묘 같은 유적도 지난다. 가시천이나 소공원 동백길도 들고난다. 간간이 감귤 밭도 지난다. 자연사랑갤러리(064-787-3110)도 있다. 폐교를 개조해 갤러리로 꾸몄다.
제주신문사 사진부장을 지낸 서재철 작가의 제주 사진을 전시한다. 야외에는 제주 화산탄이 눈길을 끈다. 가시리의 보물이자 제주의 숨은 진주 같은 갤러리다. 갑마장길과 가름질길은 그저 걷기 좋은 길에 그치지 않는다. 가시리의 역사다. 발끝으로 마을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밤의 가시리는 그 노력에 대한 화답이다. 오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머잖아 짙은 어둠이 내린다. 마을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적막 속으로 숨어든다. 변변찮은 술집 하나 없는 동네다. 집 앞마당에서 밤공기를 안주삼아 제주생막걸리 한 잔을 곁들인다. 고개를 들자 영롱한 별빛이 눈을 맞춘다. 금세 싸한 밤기운이 코끝을 파고든다.
별의 냄새다. 중산간의 깊은 어둠 속, 밤의 하늘이 주는 영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시리는 봄날 유채꽃이 필 때 제주에서 가장 들썩이는 마을이다. 하지만 한철의 복작거림이 지나고 계절의 끝자락에 서니 형언할 수 없는 평온이 깃든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낸 느린 여행의 삶이다. 가끔씩 그려보던 낯선 땅에서의 생활이다. tip 맛있게 머물기
가시리는 자그마한 동네지만 제주에서 손꼽는 맛집이 자리한다. 나목도식당(064-787-1202)은 생갈비가 유명하다. 돼지를 잡는 날에만 들어온다. 열 번을 가도 허탕을 치는 사람이 있고 처음 가는 날 생갈비를 맛보는 경우도 있다. 복불복이다. 물론 삼겹살이나 목살도 수준급이다. 옆에는 가시식당(064-787-1035)이 있다. 두루치기는 제주에서 서귀포 용이식당을 으뜸으로 치지만 가시식당을 고집하는 이도 적잖다.
글·사진 박상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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