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엄마로 살았던 닥종이 작가 김영희.
그는 나이 일흔이 다 된 지금에야 다시 ‘여자’로 돌아왔다.
더불어 ‘완전한 예술가’의 삶도 얻었다.
[Artist] 닥종이 조형작가 김영희, 여자와 예술가 사이
통통한 볼, 도톰한 입술, 김영희 작가의 손에서 태어난 닥종이 인형들은 특유의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하다. 1981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한 뒤 유럽 여러 나라에서 70여 차례의 전시회를 열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그를 만났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별 이후 꽃피운 예술, 독일 이민 후 두 번째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며 이뤄낸 성취들, 3남 2녀를 모두 키워내고 새로운 분야로의 접목을 꾀하며 예술 세계를 넓혀가기까지, 그의 삶에 숨겨진 이야기는 작품의 깊이를 더하는 무궁무진한 자원이기도 하다.

고희(古稀)를 앞둔 그는 최근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자전 에세이 ‘엄마를 졸업하다(샘터)’를 발간했다. 오는 12월 24일까지 부산 수가화랑에서 회화 전시회도 연다.


프랑스 유화보다 토종 한지가 좋았다
나는 네 살 끄트머리쯤에 자유를 맛보았다. 색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누린 때였다. 만일 아카사키 항구에서 그 화려한 색의 향연을 보지 못했다면 과연 내가 예술가로서 싹을 틔울 수 있었을까? 하루가 온통 내 것이었던 시간을, 매일매일 다른 얼굴로 다가오던 그 바다를 어떻게 잊겠는가!

- ‘엄마를 졸업하다’의 ‘아카사키의 추억’ 중에서

뜯고 접고 붙이는 닥종이 인형 작업은 일종의 수양이다. 느리지만 마음을 담아내는 이 작업을 통해 김 작가는 무뎌지지 않은 예술혼과 감성을 전한다.(작품 사진 한스 루돌프 슐츠)
뜯고 접고 붙이는 닥종이 인형 작업은 일종의 수양이다. 느리지만 마음을 담아내는 이 작업을 통해 김 작가는 무뎌지지 않은 예술혼과 감성을 전한다.(작품 사진 한스 루돌프 슐츠)
신간 발매와 함께 부산에서 전시를 열 예정이라고요.

“부산은 제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 도시예요. 특유의 서정이 있어요. 사랑에 빠지기 좋은 도시죠. 6·25전쟁 피난 시절, 부산의 아카사키(감만동 적기마을)라는 항구 마을에서 지냈어요. 네 살 무렵인데 마을에서 뛰놀다 바라보던 바다색이 정말 황홀했죠. 이전까지 바다는 파란 크레용으로만 그려야 되는 줄 알았는데 노을이 탈 땐 한없이 붉고, 비가 올 땐 잿빛으로 변하는 게 바다더라고요. 수많은 색을 가졌다는 걸 그때 알게 됐죠.”

유년 시절부터 예술가로서의 감성이 싹튼 셈이군요.

“큰언니가 미술을 전공했는데 언니를 통해 서구의 미술 문화를 먼저 접했죠. 그런데 서구 미술은 왠지 내 옷이 아닌 것 같았어요. 다섯 살 무렵부터 한지를 만지며 자랐는데 그것을 조각으로 하고 싶었어요.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조소에는 종이 재료가 없었어요.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미룬 채 몰래몰래 종이 작업을 했죠. 그 덕분에 실기 점수는 거의 빵점이었어요.”
[Artist] 닥종이 조형작가 김영희, 여자와 예술가 사이
닥종이 인형 작품으로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81년, 30대 중반의 일인데요.

“제가 예술가가 된 건 대학교 은사인 김정숙 선생님의 공이 커요. 첫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교사로 일하고 있었죠. 남편이 떠나고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어요. ‘어머, 웬일이니’ 하시는데 ‘내일 찾아봬도 될까요’ 했어요. 다음 날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 품에 안겨 울어버렸죠. 그리고는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원에 진학한 거예요. 그 후 선생님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죠. 슬픔에 빠진 제가 세상에 나오도록 용기를 주신 분이에요.”

어떤 도움을 주셨나요.

“제 첫 전시회도 선생님의 주선으로 이뤄진 거예요. 무명이던 저를 조선호텔 화랑에 소개시켜서 전시회를 열게 해주셨는데 그게 대성공이었죠. 당시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한국인 출신 수석에디터가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제 전시를 보고 인터뷰를 하겠다고 찾아왔었어요. 처음 만났을 땐 사기꾼이 아닐까 하고 도도하게 굴었는데(웃음), 우여곡절 끝에 세계적인 잡지에 제 작업실이 소개되는 행운도 얻었어요.”

세계 시장에선 닥종이 인형을 어떻게 평가하던가요.

“한국에선 제 작품을 ‘인형’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해외에선 작품으로 인정해줬어요. 당시 뉴욕에서 온 그 수석에디터가 말하길 ‘한국의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그는 워싱턴DC에서 정부 초청 전시회를 연결해줬죠. 그런데 당시엔 두 번째 남편과 사랑에 빠져있던 시기였고 결국 그를 따라 독일로 갔어요. 사랑이 더 중요한 나이였으니 전시회도 포기한 거죠.”
[Artist] 닥종이 조형작가 김영희, 여자와 예술가 사이
고된 현실 속 예술만이 위로였다
고국에서 한 짐 싣고 온 창호지를 풀어 울먹이면서 아이들(종이 인형)을 만들었다. 그 종이를 대하면 어두운 현실을 잊어버릴 수 있었고, 아이들이 보송보송 태어나면서 내 인생에도 햇빛이 비껴들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문맹자도, 가난뱅이도 아니었다. 작품들이 나의 언어를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 ‘엄마를 졸업하다’의 ‘모국어의 강’ 중에서


독일에서는 어떻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셨는지요.

“독일에 도착해보니 남편은 대학교 2학년이고 돈을 벌 수 없어 내가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어요. 당시 월세가 1200마르크인데 막막하더라고요. 위로도 받을 겸 다시 한지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죠. 마침 한국에서의 전시회를 통해 알게 된 한 큐레이터가 독일의 작은 갤러리를 소개시켜줘 초대전을 열었어요. 갤러리에서 작품당 100마르크씩 팔자고 하는 걸 고집을 부려서 1500마르크씩 받겠다고 했죠.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어요. 그런데 전시 첫날 작품 6점을 팔았어요. 그렇게 생활을 해나갔죠.”

10여 년 전부터는 조형 작품 외에도 사진이나 회화처럼 다른 분야의 작업도 함께 선보이고 계십니다.

“10여 년 전 두 번째 남편과 헤어지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하이퍼리얼리즘에서 추상예술 쪽으로 접근했죠. 평단의 평가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3년 정도 지나니까 다시 회화로 옮겨가게 되더라고요. 서구 문화에서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게 일반적이에요. 한번 줄긋는 작품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평생 줄만 그리는 거죠. 하지만 나는 예술은 트렌드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무엇인가’를 아는 게 예술이고 변할 수 있는 거죠.”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닥종이 인형 작업은 ‘클래식’으로 항상 하고 있어요. 작은 작품 하나를 만드는 데 열흘 정도가 걸려요. 일일이 손으로 뜯어 붙이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죠. 그렇기 때문에 인형 작업은 제게 일종의 수양이에요. 느리지만 수양하듯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나의 뜻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어요. 그래서 회화 작업도 붓을 대지 않은 채 뜯어 붙이기로 완성하는 작업으로 돌아갔어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신 셈이네요.

“그렇죠. 호랑이가 늙으면 다시 동굴로 돌아간다는 말이 예술에도 적용되지 않나 싶어요.(웃음) 죽을 때까지 이 작업을 다시 개발하려고 해요. 이번에 열리는 전시도 제 회화 작품으로만 구성이 될 예정이고요. 내년 7월엔 칠순을 맞아 독일에서 회고전을 해요. 초기 하이퍼리얼리즘 작업을 할 땐 옷을 많이 만들었고, 추상예술 작업을 할 땐 옷을 대강 만들었었죠. 그런데 이번엔 옷이 없는 상태의 인간을 완벽한 한지 조각으로 만들고 있어요. 한지가 무엇인가를 주제로 원초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림도 창호지 냄새가 배도록 하고요.”

다양한 조형 재료 중에서도 ‘한지’에 집중해 작업을 해 오신 이유가 궁금한데요.

“종이 문화는 우리나라에 깊이 박혀있는 문화예요. 어릴 때 보던 장판, 창문 모든 것들이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죠. 햇빛을 통과시키면서 신기하게 비도 막아주는 과학적인 재료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 껍질 성분이 한국보다 좋은 곳이 없다고 해요. 섬나라인 일본의 종이는 습기가 많고, 중국 당나라 사람들도 한국 한지를 구입해서 쓰는 게 소원이었다고 하더라고요.”
[Artist] 닥종이 조형작가 김영희, 여자와 예술가 사이
두 번째 본능, 예술혼을 되찾다
인생의 진정한 자유를 느낀 것은 예순을 넘긴 어느 날 잠자리에서였다. 이국 생활을 하는 내내 새우잠을 잤는데, 그날 처음으로 반듯이 누우며 나는 감탄했다. ‘아, 좋다!’ 그 순간 섬광같이 ‘자유’라는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환상의 자유는 아니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이제 죽어도 된다!’

- ‘엄마를 졸업하다’의 ‘화려한 휴가’ 중에서



그동안의 삶을 정리한 신간 ‘엄마를 졸업하다’를 발표했습니다. 작품의 주된 모티브였던 다섯 자녀를 독립시킨 이야기가 담겨있는데요.

“사춘기 시절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떠나려고 할 때 허무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모성은 본능적인 것이니까요. 하지만 새가 둥지를 떠나야만 성장하잖아요. 저도 아이들과 친구가 돼야지 생각하고 엄마의 아집을 버렸더니 아이들도 성장해 엄마를 인격체로 보기 시작하더라고요. 엄마를 졸업하고 나니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어떤 점이 가장 자유로우셨어요.

“엄마로서의 모성이 첫 번째 본능이라면 그동안 소홀했던 두 번째 본능은 예술이었거든요. 아이를 키울 땐 음악을 제대로 들어볼 시간도, 작품을 실컷 해볼 여유도 없었죠. 아이들이 독립한 뒤엔 나 혼자만의 시간이 24시간 주어졌어요. 하루 종일 운동화를 신고 작업에 몰두하고 2시간 정도는 산책을 해요. 완전한 예술가로 살고 있어요. 요즘이야말로 인생의 전성기죠.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요.(웃음)”

‘평생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시네요.

“화가에게 정년퇴직이 어디 있겠어요.(웃음) 나는 아직도 예술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예술과 친구가 되고, 예술을 탐구해서 좋은 예술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독일 자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하루 8시간 이상 작업에만 몰두한다. ‘예술이 두 번째 본능’이라고 말하는 그는 매일매일이 인생의 전성기인 듯 행복하다고 말한다.(사진 한스 루돌프 슐츠)
독일 자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하루 8시간 이상 작업에만 몰두한다. ‘예술이 두 번째 본능’이라고 말하는 그는 매일매일이 인생의 전성기인 듯 행복하다고 말한다.(사진 한스 루돌프 슐츠)
책을 통해 새로운 연애도 고백하셨는데요.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애는 아니에요. (웃음) 나이 들수록 찾게 되는 건 말이 통하는 파트너예요. 정신적인 교감, 생활의 교감, 과거의 교감을 이룰 수 있는 동료를 구하는 거죠.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멋진 연애는 우정과 동반되는 사랑이에요. 애정만 가지고는 오래 가기 힘들어요.”

자서전 작업이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을 것 같아요.

“원래 인생철학이 ‘오늘만 생각하자’는 식이에요.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 생각해봤자 비생산적이라는 거죠. 그런데 나이 듦의 저력이라는 걸 무시 못 하나 봐요. 나이가 드니 제 삶을 돌이켜볼 자신이 생기네요. 인생을 돌아보니 어딜 가나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어요.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예전엔 제가 못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만하면 됐어. 참 아름다운 인생이다’하고 생각해요. 참 고마워요.”


글 김보람 기자 bramvo@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