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밀레니엄 이후 국제통화질서는 달러화와 유로화, 아시아 단일 통화를 축으로 하는 3극 통화체제가 가시화되고 있다.

벌써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은 지 햇수로 1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모습을 본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미주경제권,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경제권, 그리고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권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21세기의 세계경제질서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 최근 분위기다.

국제통화질서도 달러화와 유로화, 아시아 단일통화를 축으로 하는 3극 통화체제가 가시화돼 왔다. 최근 들어서는 전 세계를 하나의 화폐로 통용시키자는 세계 단일통화 도입 논의가 일고 있어 주목된다. 라틴어로 ‘지구’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테라(terra)와 달러화의 사용 범위를 넓히는 달러라이제이션, 유로화 도입을 모델로 한 글로벌 유로화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단일통화를 도입해야 하는 여건은 어느 정도 성숙돼 가고 있고 이미 많은 방안이 논의됐다.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해 왔던 미국 달러화가 글로벌 금융 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기축통화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 있는 여건이 성숙돼 있는가 하는 점이다.

최근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국가신용등급 강등 조치를 계기로 달러 가치가 흔들리면서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에 묵시적으로 유지돼온 ‘제2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브레튼우즈체제란 1944년 국제통화기금(IMF) 창립 이후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 제도를 말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제2의 브레튼우즈체제란 1971년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 이후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를 골간으로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묵시적인 합의하에 유지해온 환율제도를 의미한다. 미국이 이 체제를 유지해온 것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공산주의의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자 했던 숨은 의도가 깔려있다.
미국과 유럽 모두가 다른 정책수단보다는 국채 매입 등을 통한 유동성 공급정책에 더 매달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 모두가 다른 정책수단보다는 국채 매입 등을 통한 유동성 공급정책에 더 매달리고 있다.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제2 브레튼우즈체제는 이런 미국의 의도를 충분히 달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에서 제2 브레튼우즈체제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유럽의 부흥과 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이 지원했던 마셜 플랜의 또 다른 형태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후 제2 브레튼우즈체제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초 무렵이다. 아시아 통화에 대한 의도적인 달러화 약세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위험수준에 달했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여러 방안을 동원했으나 결국은 선진국 간의 미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로 이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제2 브레튼우즈체제에 또 한 차례 균열이 보이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95년 4월 달러화 가치를 부양하기 위한 역(逆)플라자 합의와 아시아 외환위기다. 역플라자 합의에 따라 미 달러화 가치가 부양되는 과정에서 외환위기로 아시아 통화가치가 환투기로 폭락하면서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간의 구도가 재현됐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초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특히 모기지 사태에 따른 글로벌 금융 위기가 극복된다 하더라도 위기 극복 과정에서 쌓인 쌍둥이 적자로 달러화 가치가 폭락할 경우 더 이상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지 않느냐라는 시각도 제기돼 주목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등 선진국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경기부양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유럽, 중국 등 중심 3국의 경기 부양 조치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종전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하나는 미국과 유럽 모두가 다른 정책수단보다는 국채 매입 등을 통한 유동성 공급정책에 더 매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경기 부양의 다양한 목적 가운데 단순히 성장률을 끌어올리기보다 고용 창출, 특히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데 무게를 둔다는 점이다.
특정국가가 경기와 고용을 늘리기 위해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할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경쟁국들에 전가된다.
특정국가가 경기와 고용을 늘리기 위해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할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경쟁국들에 전가된다.
일자리 창출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고용지표가 갈수록 독립 혹은 설명변수화되는 새로운 움직임을 각국의 부양책에서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오히려 이런 변화를 읽지 못하고 단순히 성장률만 끌어올리면 소득양극화를 심화시켜 이미 발생한 반월가(occupy wall street) 시위 등 사회불안을 증폭시킬 우려가 높다.

특히 반월가 시위의 이론적 토대가 된 ‘베버리지 커브(Beveridge cur- ve)’를 보면 청년실업 등이 갈수록 구조적 성격을 띠고 있어 앞으로는 인위적인 일자리 창출 노력 없이는 개선될 가능성이 적음을 시사한다. 금융 위기 이후 베버리지 커브가 상향 이동된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노동 시장의 구조 변화로 청년층 실업률이 약 25∼30% 상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경기부양책이 고용 창출, 특히 청소년 일자리를 늘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잇달아 예정된 선거를 겨냥하는 포석도 강하다. 올해 하반기 이후 1년 동안은 전 세계적으로 예정된 각종 선거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장 많은 시기다. 갈수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익숙한 청년층이 선거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높아지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계층에 맞춘 경기대책은 의외로 빨리 정착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 결과를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하나 갈수록 집권당의 경제성과, 특히 국민 입장에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체감경기에 의해 결정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미국만 하더라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에 실업률을 더한 경제고통지수(misery index)에 의해 대통령 선거 결과가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Market Insight] 세계 기축통화 논쟁과 글로벌 환율전쟁
경제고통지수란 국민이 느끼는 경제적 고통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학자인 아서 오쿤(Arther Okun)이 고안한 지표로 실업률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더해 산출한다.

경제 현안을 풀어 가는 데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과제다. 하지만 지난 4년간 위기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 지출로 남아 있는 정책 여지가 거의 없다.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재정정책은 모든 선진국들이 과다한 재정 적자와 국가채무로 위기를 겪고 있다. 통화정책은 비교적 쉽게 가져갈 수 있지만 기준금리 인하는 사실상 어렵다. 갈수록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다른 정책수단보다 유동성 공급정책에 더 의존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종전처럼 효과가 적고 이미 인플레이션이 우려될 정도로 국제유동성이 많은 상황에서 선진국들이 계속해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은 경기 측면에서 두 가지 경로로 의미가 있다. 하나는 ‘부(富)의 효과’ 경로다. 하지만 계속된 위기로 국민의 ‘디레버리징(부채 감소·저축 증대)’이 끝나지 않은 국면에서는 이 효과가 적게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자국통화 약세에 따른 수출 진흥 통로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과 신흥국 간의 금리차가 벌어진 상황에서는 양적완화 추진 과정에서 풀린 돈은 캐리자금 형태로 신흥국으로 유입된다. 이때 신흥국 주가와 통화가치는 동반 상승한다. 물론 미국은 수출경쟁력이 개선된다. 오바마 정부가 출범 이후 달러 약세정책을 고집했던 것도 이 이유에서다.

문제는 특정국가가 경기와 고용을 늘리기 위해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자국통화를 평가절하할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경쟁국들에 전가된다. 대표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이다. 특히 달러화와 같은 중심통화가 평가 절하 될수록 그 피해는 경제발전 단계상 한 단계 아래 국가에 집중된다. 중국, 브라질 등 브릭스와 한국이 여기에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유입되는 외국 자본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직접 규제와 간접 규제 방안이 있다. 직접 규제는 특정 거래 금지 혹은 허가를 통한 양적 규제를 의미한다. 간접 규제는 자본 거래의 유인을 축소시키는 가격 규제 조치로 ‘외환거래세(일명 토빈세)’가 대표적이다. 변형된 형태로 중국은 핫머니 규제와 함께 들어오는 외자에 상응하는 해외 자산을 사들여 통화가치의 균형을 맞추는 ‘영구적 불태화 개입(PSI)’을 추진했다.
환율전쟁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는 최근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엔화와 위안화 가치가 동시에 약세로 돌아서는 상황이다.
환율전쟁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는 최근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엔화와 위안화 가치가 동시에 약세로 돌아서는 상황이다.
하지만 신흥국들은 이런 방안들을 추진했으나 기대했던 것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효과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단기간에 그쳤다. 신흥국의 외국 자본 유입 규제보다 앞서가는 선진국의 복잡한 고도의 파생금융기법이 발달되는 데다 각종 캐리자금이 주도되면서 직간접 규제 이후에도 약간의 수익률 차이가 나면 종전보다 자금 유출입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미국의 달러 약세 정책에 따라 약화되는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신흥국들은 맞대응할 수밖에 없다. 이미 두 차례 양적완화 추진 과정에서 브라질이 주도해 ‘글로벌 환율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다. 3차 양적완화(QE3) 정책 발표 이후 브릭스가 글로벌 환율전쟁을 재차 선포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선진국의 양적완화로 환율전쟁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는 최근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엔화와 위안화 가치가 동시에 약세로 돌아서는 상황이다. 최소자승법 등으로 엔화와 원화 간의 동조화 계수를 구하면 0.02로 엔화 가치가 1% 떨어지면 원화 가치는 0.02%만 떨어진다는 의미다. 위안화와 원화 간의 동조화 계수를 구하면 0.57로 위안화 가치가 1% 떨어지면 원화 가치는 0.57%, 상대적으로 덜 떨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결과는 기축통화 논쟁과 글로벌 환율전쟁이 재연될 경우 우리가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보다 더 불리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