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IRP 시대의 막이 올랐다. 2012년 7월 26일부터 개정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하 개정 근퇴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IRP(Individual Retirement Pension)는 개인형 퇴직연금을 일컫는 말로, 개정 근퇴법 이전에 특례 규정으로 있던 개인퇴직계좌(IRA·Individual Retirement Account)가 당당히 퇴직연금의 한 축으로 발돋움한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IRA는 IRP의 전신이자 탯줄인 셈이다.
[RETIREMENT PENSION] IRP라는 미래의 배에 제대로 올라타자
개정 근퇴법에는 퇴직연금제도의 발전을 위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유독 IRP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IRP에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퇴직연금사업자들은 IRP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상 중이다. 정책당국은 IRP의 급성장을 기대하는 눈치다. 많은 전문가들 역시 퇴직연금의 미래는 IRP에 달렸다고 말한다. 도대체 IRP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호들갑에 가까운 기대를 받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급여의 지급은 가입자가 지정한 개인형 퇴직연금제도의 계정으로 이전하는 방법으로 한다’는 개정 근퇴법의 한 구절 때문이다. 법안의 내용을 쉽게 풀어쓰면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가 이직할 때 받는 퇴직급여는 반드시 IRP로 옮겨야 함을 뜻한다. 흔히 퇴직급여의 자동 이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전에는 일단 일시금으로 찾았다가 근로자가 IRA 계좌에 적립하는 식이었다.



IRP와 IRA의 근본적인 차이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추켜세우지만, 견물생심에 약할 뿐 아니라 생각보다 합리적이지 못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미덥지 못한 동물이기도 하다. 특히 먼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에서는 이성적 판단과는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지닌 이런 약점 때문에 일단 빠져나간 일시금은 상당부분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IRA로 들어오는 자금은 그만큼 줄어든다. IRP는 바로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행동경제학의 연구성과물을 반영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IRP는 IRA에는 없던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퇴직금제도하에서 받은 퇴직급여를 IRP로 이전할 수도 있고, 확정급여(DB) 형 가입자 등도 재직 중에 계좌를 개설해 추가 납입할 수 있으며, 2017년부터는 자영업자도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 기업에서 근무하는 평균 근속기간이 5~6년 정도에 불과한 우리나라 노동 시장의 현실만 감안하더라도 일반 퇴직연금에서 IRP로 전환되는 자금이 막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앞의 옵션까지 장착했으니 IRP 세상이 도래했다고 아우성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퇴직연금의 본류라 할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DC)형의 존재 가치가 퇴색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할 정도다. 그럼 과연 IRP는 세간의 기대처럼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해갈까.

2005년 12월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된 이후부터 2012년 7월 말까지 퇴직연금으로 유입된 자금은 약 67조6000억 원이었고, 그 기간 동안 퇴직연금 급여로 빠져나간 자금은 약 18조8000억 원으로 유입금액의 28%에 달한다.

또한 지난 7월 말까지 IRP(7월 말부터 IRA가 IRP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IRP로 표기함)로 이전된 자금은 총 6조3000억 원으로 퇴직연금 급여지급액의 38%에 불과한 실정이다. 약 12조5000억 원이 퇴직연금에 머물지 않고 생활자금 등으로 소진됐다는 뜻이다. 이는 IRP에 기대를 걸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IRP는 은퇴자금의 정거장이 아니라 주차장이어야 한다. 세워만 두지 말고 두 번째 청춘을 위해 갈고 닦고 정비하는 주차장이어야 한다.
IRP는 은퇴자금의 정거장이 아니라 주차장이어야 한다. 세워만 두지 말고 두 번째 청춘을 위해 갈고 닦고 정비하는 주차장이어야 한다.
IRP에 희망을 거는 이유

2008년 이후 IRP 적립금은 급성장을 구가하면서 2%대에 머물던 비중이 2010년에는 약 8.5% 수준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성장세가 주춤하며 전체 적립금에서 차지하는 IRP의 비중 역시 답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0년까지 급속히 증가하던 IRP로의 순유입액은 그 이후 오히려 줄어드는 모습이다. 최근 힘들어하는 가계의 모습이 투영된 것 같아 우려를 금할 수 없는 부분이다. IRP로 이전된 퇴직급여의 유출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는 현재의 법체계를 생각하면, 장밋빛 IRP의 미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형국이다.

IRP에 적립된 자금의 운용 상황, 즉 IRP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갑갑함이 밀려온다. 2012년 7월 말 현재 IRP에 적립된 자금 중 92%가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자산 배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IRP가 은퇴할 때까지 퇴직급여를 적립하고 운용해 더 많은 은퇴자금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퇴직연금 일시금의 사용처가 정해질 때까지 자금을 일시적으로 보관하는 수단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퇴직연금의 절반은 제도 설계이고, 나머지 절반은 자산 운용이란 점을 감안하면 나머지 절반이 방치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와 같은 저금리 상황이 쉽게 역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낮은 금리의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IRP 적립금을 보관해 놓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못하다. 더욱이 IRP를 사용처가 정해질 때까지 임시로 거쳐 가는 정거장으로 생각한다면 고령화시대의 노후를 내팽개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팍팍한 현실을 핑계로 IRP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노후가 길어지는 만큼 우리의 불행도 길게 하는 지금길이다.

수익률이 낮으면 자산의 소진 연한도 짧아지는 법. IRP에서도 자산 배분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과 같은 저금리 상품에 IRP 적립금을 보관했다간 미래의 불행을 저축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IRP는 은퇴자금의 정거장이 아니라 주차장이어야 한다. 세워만 두지 말고 두 번째 청춘을 위해 갈고 닦고 정비하는 주차장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IRP에 많은 기대를 거는 것은 IRP의 미래에 우리의 노후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IRP를 곶감을 보관하는 바구니 정도로 생각하는 한 우리의 노후는 불행의 기차에 올라탈 가능성이 높아진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물론이고 퇴직연금사업자와 정책당국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이유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겐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충분한 근거가 있다. 새로운 IRP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IRP는 우리의 노후를 담보하고 있는 미래의 배다.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오랜 여행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돈키호테의 외침을 잊지 말자.

“여러분, 두 팔을 한껏 벌려 여러분의 아들 돈키호테를 따뜻하게 맞아 주십시오. 낯선 사람의 손에 패배하는 쓴맛을 보았지만 그 자신의 승리자가 돼 돌아왔습니다. 또 그가 곳곳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자신의 승리자야말로 누구나 원하는 가장 위대한 승리이지 않습니까.”

가벼운 돛단배로는 격랑을 헤쳐가기 힘들다. 배에 적립금을 가득 쌓아야만 격랑을 뚫고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 IRP라는 미래의 배에 제대로 올라타야 할 때다.


일러스트 김영민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