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경제가 부진한 상황에서 돈의 힘으로 오르는 증시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그다지 오래 가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해 말 1800대 초반에서 마감한 코스피 지수가 약 한 달 만인 올 2월 초 2000선을 훌쩍 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유럽 재정 위기의 불확실성이 높았고 증권사들이 내놓은 연간 전망도 ‘상고하저(上高下低)’보다는 ‘상저하고(上低下高)’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가를 밀어올린 것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실시한 장기대출프로그램(LTRO) 효과였다. ECB가 민간 은행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해 신용경색 위험이 낮아지자 글로벌 자금은 전 세계 주식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국내 증시도 외국인의 적극적인 매수세에 힘입어 급반등한 것이다.

지난 7월 말 이후 주식시장은 당시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실물경제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주가를 밀어올린 건 일차적으로 유동성의 힘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주요국 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으로 풀린 돈이 증시에 몰려들면서 주가가 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물경제 회복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승세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경고도 나온다.



ECB發 ‘유동성 랠리’전개

“ECB는 위임받은 권한 안에서 유로를 지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돼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지난 7월 26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한 말이다. 드라기 총재는 “나를 믿어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간접 화법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은 중앙은행 총재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설적인 표현을 써 가며 유럽 재정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드라기 총재의 발언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냈다. ECB가 재정위험국 국채 매입 재개와 3차 LTRO 등 추가적인 통화 완화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형성되면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약해졌다. 미국과 독일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만 몰리던 글로벌 투자 자금은 주식시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종우 솔로몬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독일과 북유럽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에 이르렀을 정도로 그간 글로벌 금융시장의 안전자산 쏠림이 심했다”며 “드라기 총재의 발언을 계기로 쏠림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외국인이 대규모 순매수를 나타내면서 주가를 상승세로 돌려놓았다. 외국인은 드라기 총재의 발언 직후인 지난 7월 27일 유가증권 시장에서 4808억 원어치를 순매수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주 동안에만 5조 원가량을 순매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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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증시 저평가 매력 부각

국내 증시는 대규모 통화 완화 정책의 영향으로 위험자산 선호도가 높아질 때 큰 수혜를 입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곽병열 유진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2차 양적완화(QE2)를 실시했을 때와 ECB가 1차 LTRO를 했을 때 한국 증시는 주요국 증시보다 큰 폭으로 올랐다”며 “한국 증시는 위험자산 선호도가 높아지는 초기 단계에 외국인 자금이 몰리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4월 이후 국내 증시가 조정을 받으면서 해외 증시보다 저평가됐고 원·달러 환율이 하락(원화 강세)한 것도 외국인의 대규모 매수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 류용석 현대증권 시장분석팀장은 “미국과 유럽의 저금리 자금으로 한국 주식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가 활발해질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업종별로는 반등장이 시작되기 전까지 큰 폭으로 하락했던 ‘낙폭과대주’가 유동성 장세의 수혜주가 될 전망이다. 외국인이 지난 7월 말 순매수로 전환한 이후 전기전자 업종과 운송장비 업종을 집중적으로 사들인 것도 이들 업종이 지난 5월 이후 2~3개월간 타 업종보다 부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전통적으로 유동성 장세의 수혜주로 꼽히는 금융주와 증권주도 외국인 매수세와 함께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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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주입 약효 언제까지?

그렇다면 실물경제가 부진한 상황에서 돈의 힘으로 오르는 증시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그다지 오래 가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이 대규모 통화 완화 정책을 거듭 내놓으면서 통화 정책이 증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Fed가 2009년 3월 1차 양적완화(QE1)를 시행했을 때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전 세계 지수는 이듬해 3월까지 약 1년간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QE2를 시행했을 때는 상승세를 유지한 기간이 8개월로 단축됐다. ECB가 지난해 말 1차 LTRO를 내놓은 이후 MSCI 전 세계 지수 상승세는 3개월밖에 가지 못했다. 지난 2월 말 나온 LTRO는 증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다.

오태동 토러스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통화 정책만으로 유효 수요를 늘려서 경제를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앞으로 새로운 통화 완화 정책이 나오더라도 그 효과에 대해서는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가가 오를수록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 매력이 사라지면서 상승 탄력이 둔화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강현철 우리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유동성 장세 초기에는 경기민감주가 전반적으로 오르지만 상승세가 진행될수록 주도주는 압축될 가능성이 높다”며 “자동차, IT 등 안정된 실적을 내고 있는 업종 위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물경제 회복 여부가 관건

유동성의 힘으로 시작된 주가 상승이 중장기 추세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결국 실물경제 회복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강현철 팀장은 “미국과 중국 경기 흐름이 중요하다”며 “두 나라의 경기 회복 여부가 시장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태동 팀장은 국제유가를 중요한 변수로 꼽았다. 국제유가가 상승을 지속해 물가 부담을 높이고 소비를 위축시키는 단계까지 가면 경기가 둔화돼 주가 상승세도 마무리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 팀장은 “미국 내 휘발유 소매가격이 갤런당 4달러에 근접하면 미국 증시는 조정을 받았다”며 “유동성 장세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경기민감주 비중을 늘렸다가 국제유가 추이를 보면서 매도 시점을 판단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과 한국은행이 지난 7월 기준금리를 내리는 등 주요 국가가 동시에 통화 완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점은 긍정적이라는 분석이다. 동시다발적인 금리 인하가 시차를 두고 실물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낼 것이라는 점에서다.

오성진 현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연말부터는 유동성 장세를 지나 기업 이익 증가에 힘입은 ‘실적 장세’가 전개될 것”으로 전망했다.




유승호 한국경제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