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1899년에 태어나 1961년 62세 때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고혈압, 편집증에 시달리다가 자택에서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50년 그의 나이 쉰한 살 때, 10년간의 공백을 깨고 ‘강을 건너 숲속으로’라는 작품을 출간했으나 혹평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 어머니와 두 번째 부인 폴린이 죽었다.
이런 어두운 상황에서 1952년, 미국 주간지 라이프에 발표한 ‘노인과 바다’가 소위 대박을 터뜨려 이틀 만에 무려 500만 부가 팔렸고, 이 작품으로 다음 해에 퓰리처상(1953년)을 받고 그 다음 해인 1954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인간 존엄에 대한 경의
그렇다면 ‘노인과 바다’의 무엇이 수많은 독자를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빠지게 했는가.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대학시절에는 솔직히 말해서 쏟아지는 찬사의 서평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번 달에 소위 ‘지공(지하철 공짜) 거사’로 불리는 노인의 반열에 드는 내 나이에 다시 읽는 헤밍웨이의 이 작품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로서 감동 그 자체였다. 이것은 바로 지금부터 살아갈 나의 이야기가 아닌가. 작품 속에 있는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나의 현실과 겹치면서 생생히 살아난다.
소설 속에서 산티아고 노인의 나이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불운과 역경의 고난 속에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부드러움과 연약함도 보여주고, 외롭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영웅적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노인의 모습을 짧은 문체로 담담하게 서술했기 때문에 수많은 독자들에게 모두 자신의 이야기로 느끼게 해 감동을 준 것으로 보인다. 내가 느꼈듯이. 나이 예순다섯이 돼서야 비로소 나는 그 작품의 진짜 맛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엄에 대한 경의였다.
포기하지 않는 노인의 의지
노인은 한참 힘이 좋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84일 동안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약간 초조하긴 했지만 결코 서두르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85일째 되는 날. 노인은 소년이 마련해 준 다랑어를 미끼로 해서 삶의 현장인 거친 바다로 두려움 없이 나아갔다. 노인은 배 위를 맴도는 군함새 한 마리를 보고 익숙한 경험으로 깊은 바닷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를 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잡고 싶은 큰 물고기가 그놈들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지. 내 큰 물고기는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렇다. 노인이 되면 젊은 시절과는 달리 업무의 실적은 저조하고 능률은 오르지 않아 자칫하면 꿈을 포기하기 쉽지만 노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노인은 ‘어디엔가 틀림없이 있을’ 인생의 목표인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하늘의 새를 보며 위치를 예측하고 묵묵히 다시 도전한다. 나도 저 노인처럼 끝없이 실패하면서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는 목표를 향해 죽을 때까지 묵묵히 거친 바다로 항해해 갈 수 있을까.
“새는 큰 도움이 된단 말이야.” 노인은 말했다. 바로 그때 고리를 지어 밟고 있던 고물 쪽의 낚싯줄이 발밑에서 팽팽해졌다.…(중략)…노인은 그게 뭘 뜻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백 길 아래 물속에서 청새치 한 마리가 낚싯바늘에 걸린 정어리를 막 물려고 하는 것이다.
목표인 물고기와 노인의 교감
노인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 미끼를 물고 있는 청새치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볍게 당기는 힘이 느껴지자 노인은 기뻤다. 그건 분명 물고기의 무게였다. 노인은 그 무게 자체로서 생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시절, 결과를 의식하지 않고 일에 파묻혀 일하는 자체에 흥분과 희열을 느꼈던 때와 흡사하다. 노인은 그것을 목표인 물고기와 자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놈이 선택한 것은 그 어떤 덫과 함정과 속임수도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깜깜하고 깊은 물속에 머무르자는 것이었지.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하는 그곳까지 가서 놈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하는 그곳까지 가서 말이야. 이제 우린 서로 연결된 거야. 어제 정오부터.”
노인은 깜깜하고 깊은 현실의 바닷속에서 생의 목표이면서 경쟁과 투쟁의 상대인 물고기를 찾아 낚시에 미끼를 드리우고 끈기 있게 기다린다. 이에 대해 물고기는 어떤 덫과 함정에도 빠지지 않는 깊은 곳에서 머무르고자 했으나 노인의 끈기에 굴복하고 미끼를 물고 만 것이다. 이러한 물고기에 대해 적의와 함께 연민의 정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목표와 인생의 교감이고 일체화되는 모습이었다.
‘물고기 녀석한테도 뭘 먹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노인은 생각했다. ‘녀석은 내 형제나 다름없어. 하지만 난 녀석을 죽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유지해야만 해.’ 노인은 천천히, 그리고 정성껏 쐐기 모양의 고기 조각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내가 돼
노인은 이제 잡은 물고기와 투쟁 대상이나 경쟁관계를 떠나 생의 ‘동반자’ 관계가 돼 마침내는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이 내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이제는 물고기와 내가 목표와 수단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노인은 생각했다. ‘지금 놈이 나를 데려가는 건가, 아니면 내가 놈을 데려가는 건가?’ 그리고 마침내 노인은 물고기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게 됐다. 노인들은 자신이 세운 목표에 미련스럽게 매달리면서 그 일 자체를 사랑하고 성과에 관계없이 그 일을 자신의 신체의 일부로 느낀다. …(중략)…물고기의 일부가 뜯겨나가자 노인은 물고기를 더는 쳐다보기 싫었다. 물고기가 물어 뜯겼을 때 노인은 마치 자기 자신이 물어뜯긴 것처럼 느꼈다.
노인은 패배하지 않았다
노인이 잡은 5.5m의 700kg가량 되는 청새치는 상어의 공격을 받아 커다란 머리와 허옇게 드러난 등뼈 사이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이 노인이 그토록 힘들게 잡은 성과였다. 그러나 노인은 불굴의 의지를 비치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망한 성과에 대한 패배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적인 노인은 소년에게 다시 나약한 모습으로 말한다.
“난 놈들한테 졌단다, 마놀린.” 노인은 말했다. “놈들한테 정말 지고 말았어.” “그놈한테는 지지 않았잖아요. 잡아온 물고기한테는 말이에요.” “그래. 그건 정말 그렇지. 내가 진 건 그 뒤야.”
그랬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기까지는 그 청새치에게 지지 않았다. 그 물고기를 잡은 뒤에 그 물고기를 끌고 오는 과정에서 상어 떼에게 뜯어 먹혔을 뿐이다. 젊은이는 혹시라도 결과 중심의 성과주의의 시선으로 노인의 업적을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소년 마놀린처럼.
노인은 아직도 꿈꾸고 있다. 노인의 꿈은 젊음과 순수, 평화의 상징인 아프리카의 밀림을 헤매고 있었다. 이 소설의 제일 마지막 문장은 정말 감동적이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나도 이 노인처럼 남은 생 동안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 한 마리를 잡으면서도 사자를 꿈꿀 수 있을까.
일러스트 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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