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품질은 무엇으로 평가될 것인가. 테루아에서 1855년 등급, 품종, 빈티지, 생산량 등. 이처럼 많은 기준을 종합해 하나로 표현한 것이 숫자다. 그 숫자는 와인의 가격과 직결된다. 현재 와인의 품질을 나타내는 숫자 중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의 파커 포인트다.

높은 평점을 받은 와인은 그만큼 좋은 품질을 가졌다는 뜻이다. 좋은 와인을 추천하는 방법으로 ‘칭찬1, 칭찬2, 칭찬3’ 같은 것들과 미슐랭 가이드의 레스토랑 등급 체계와 같은 시스템, ‘별1, 별2, 별3, 별4, 별5’ 같은 영화 평가 시스템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유럽의 와인 비평가들은 20점 만점의 평가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런데 미국인들이(미국식 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도) 점수 방식 중 가장 편하게 느끼는 것은 100점 만점의 평가 방식이다. 이를 와인 평가에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로버트 파커다.



지금의 파커를 만든 1982년산 보르도 와인 시음

사실 눈으로 볼 수 있는 컬러와는 달리 와인의 향과 맛을 문자로 표현해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파커는 이를 명쾌하게 해결해낸 것이다. 물론 파커가 와인에 점수만 매긴 것은 아니다. 시음한 와인마다 꼼꼼하게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하고 이를 총체적으로 평가해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와인 애드버케이트(Wine Advocate)를 통해 발표한다. 그가 매긴 점수를 알려면 이 잡지를 사서 봐야만 한다. 물론 온라인 회원이 돼도 점수를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잡지보다는 늦게 확인할 수 있다.

파커는 위대한 밥(Le Grand Bob), 와인의 교황(Le Pape de Vin), 밥 각하(His Bobness), 위대한 전문가(Le Gourou), 미스터 피(Mr. P)와 같은 별칭으로 불리는데 그냥 와인황제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위치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와인 재테크] 와인비평계의 신화, 로버트 파커
파커가 와인에 대해 전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20세기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인 1982년 빈티지 때문이다. 1982년산 보르도 와인을 앙 프리뫼르(En-Primeur: 병입 전 와인 선도 시장)에서 시음한 파커는 이 와인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즉각 그의 잡지 와인 애드버케이트에서 그 내용을 다루었다. 그의 말을 믿고 1982년산 보르도 와인을 비축한 도매상, 소매상은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미리 이 와인을 사놓은 소비자들도 이후 이 와인의 가격이 계속 오르는 것을 보고 안도할 수 있었다. 당시 파커보다 권위를 인정받았던 로버트 피니건은 파커와 다른 의견을 냈다가 그 영향력을 영구히 상실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파커가 누군지 몰랐던 사람들도 그가 매긴 점수에 따라 와인을 구입했고, 그 명쾌한 시스템에 금세 친숙해졌다. 파커는 오랫동안 유지되던 유럽의 신분사회에 대한 미국식 반격을 한 셈이고,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아니 치명적이었다.

당시까지 1855년 매겨진 와인 등급체계는 세습 귀족의 신분처럼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내부에서도 1등급 샤토 주인들은 2등급 샤토 주인들과 절대 식사를 함께 하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2등급 샤토 주인들 역시 3등급 샤토 주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와인의 가격도 역시 등급에 따라 책정됐고 그 와인의 품질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이 거대한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사람이 파커다. 물론 그가 도입한 방식은 복잡하게 2차원의 평면에 산재돼 있는 요소들을 단순하게 1차원에 대응시키는 리그레션(regression)과 같아서 수많은 에러 요인을 내재하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편리한 품질 표시의 척도가 됐다.

물론 프랑스 와인업자들이 그냥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파커는 농익은 듯한 과일의 풍미와 마치 잼을 먹는 듯한 느낌의 묵직한 와인을 좋아했다. 당연히 그런 와인에 높은 점수를 주곤 했는데, 보르도에서는 단연 카베르네 소비뇽을 많이 사용하는 샤토에 높은 점수를 선사했다.

그런데 샤토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e)은 그런 면에서 약간 불리한 점이 있었다. 슈발 블랑은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로 와인을 만들기 때문에 때로는 파커로부터 좋지 않은 점수를 맞게 된 때도 있었다. 1981년 샤토 슈발 블랑을 시음한 파커는 실망스럽고 평범하며, 평균 이하라고 묘사했다.

이에 샤토 슈발 블랑의 관리자인 자크 에브라르는 격분했고, 그에게 다시 시음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다시 샤토를 찾아가 문을 두드린 파커는 그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물려서 피를 흘리게 됐고, 반창고를 달라는 파커의 요구에 에브라르는 와인 애드버케이트를 내던졌다. 사실 피가 났다는 것은 파커의 주장이고 에브라르는 피까지 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은 다시 친밀해졌고 그 개가 죽자 에브라르는 그 소식을 파커에게 전해주었다.



로버트 파커는 농익은 듯한 과일의 풍미와 마치 잼을 먹는 듯한 느낌의 묵직한 와인을 좋아했다. 당연히 그런 와인에 높은 점수를 주곤 했는데, 보르도에서는 단연 카베르네 소비뇽을 많이 사용하는 샤토에 높은 점수를 선사했다.



보르도와 북부 론 와인에 높은 점수 줘

파커는 보르도와 북부 론 와인에 특히 높은 점수를 주었고, 상대적으로 부르고뉴 와인에는 점수가 낮았다. 어떤 와인업자들은 파커에게 항의하는 대신 파커가 좋아할 만한 와인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됐다. 이를 파커라이즈(Parkerize)라고 한다.

최근 파커는 부르고뉴 와인의 시음에서 손을 뗐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페블레(Faiveley) 와인이다. 페블레 와인이 프랑스에서 시음한 것과 외국에서 시음한 것이 다르다는 분석 기사를 와인 애드버케이트에 실은 것이다. 파커는 운송체계 중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기사를 본 스코틀랜드의 와인 수입업자는 페블레 측에서 시음한 것과 다른 와인을 배송했다고 생각했다. 지루한 법정 소송이 이어졌고 결국은 파커가 항복하고 말았다.

문제는 와인 보관창고에 있었다. 파커가 시음한 페블레 와인은 그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미국의 어느 창고에 보관돼 있었는데 2층짜리 창고의 2층에 그것도 고급 와인이 도난당할 것을 우려해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위치에 보관했다. 바로 위에는 함석지붕에 덥혀 있었는데 창고 1층의 온도가 섭씨 32도였으니 페블레가 보관된 2층의 높은 선반은 와인을 변질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온도가 높았다. 이 소송은 파커와 부르고뉴 전체의 소송인 것처럼 확대됐고, 파커가 이후 부르고뉴 와인을 시음하지 않게 만들었다. 다양한 테루아의 맛과 향을 중요시 여기는 부르고뉴 와인업자들에게 농축 미만을 강조하는 파커의 입맛과 그의 평가 점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커의 점수는 돈으로 환산한다면 최상급 와인을 생산하는 보르도의 샤토의 경우 85점에서 95점으로 점수가 올라가면 600만~700만 유로를 더 벌 수 있고, 100점이 된다면 그 4배 정도를 더 벌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커는 와인에 투자해서 돈을 벌게 할 목적으로 와인에 점수를 매기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투자가 가능한 모든 와인들은 그의 점수에 따라 투자 여부가 결정된다. 경제적인 효과 측면에서 시장을 형성하는 것은 파커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파커처럼 100점 만점의 체계로 와인을 평가하는 와인 스펙테이터도 영향력에서는 파커에 한참 못 미친다.

와인 투자에 있어 가장 신중해야 할 앙 프리뫼르에서도 이제는 파커의 평가 점수가 나온 이후에야 가격을 결정한다. 이런 체계에 최근에 반기를 든 곳은 샤토 라투르다. 내년부터 샤토 라투르는 앙 프리뫼르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미각과 후각이 쇠퇴하기 마련인데 한 사람의 미각과 후각에 이토록 엄청나게 의존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지난 25년 이상의 시간 동안 파커 없는 와인 평가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커 이후의 와인업계는 도대체 누가 가격을 결정해줄까. 혹시 중국인의 구미에 맞는 새로운 와인 평가 체계가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와인이 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김재현 하나금융그룹 WM센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