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작은 마을 운동에서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앞 다투어 슬로시티 브랜드를 확보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갖는 자연 속에서의 여유와 치유에 대한 욕구와 가치를 반영한다.
1970년대 유럽에서부터 금전적 수입과 사회적 지위에 구속되지 않고 인생을 느긋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른바 ‘다운시프트(downshift) 족’. 원래 저속 기어로 바꾼다는 뜻으로 삶의 속도를 늦추자는 의미다.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슬로비족’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2000년대에 들어서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유럽 다운시프트족의 확산은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삶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야만 했고, 한편으론 그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잠시 쉬는 것은 곧 경쟁에 뒤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득 수준이 오르고 심신이 지친 현대인들이 유럽의 다운시프트족과 같이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슬로시티(slow city)’의 국내 상륙은 유럽에서 발원한 ‘느림의 미학’이 국내에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슬로시티란 1999년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i)에서 시작된 느린 마을 만들기 운동이다. 보통은 치타슬로(cittaslow)라는 이탈리아 이름으로 불린다. 지역의 고유한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지역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 살리기 운동으로 시작됐다.
슬로시티는 빠른 도시의 삶과 문화에 반대하는 것이 특징이다. 발상지인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는 옛날 방식으로 올리브오일을 짜고 포도주를 발효시킨다. 공해나 쓰레기 발생이 적고 각종 첨가물도 없이, 말 그대로 ‘느리게’ 특산품을 생산한다. 그레베 인 키안티가 유명해지면서 유럽에서 슬로시티 운동은 빠르게 확산됐다. 현재 25개국 150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유럽 국가가 대부분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에 확산되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는 비교적 늦게 슬로시티를 도입했다.
아무나 슬로시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정 조건이 까다롭다. 인구가 5만 명이 넘지 않아야 하고, 생태환경이 보전돼 있어야 한다. ‘슬로푸드’가 될 만한 유기농 특산품도 있어야 한다. 지자체가 신청하면 각국의 슬로시티본부가 1차 평가를 하고, 국제슬로시티연맹에서 최종 평가를 한다. 5년마다 재평가가 있다. 일본은 2002년 20개 도시를 동시에 신청했으나 상업적인 목적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2007년 아시아 최초로 전남 4개군(신안·완도·장흥·담양)이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2009년 경남 하동군·충남 예산군이, 2010년 경기도 남양주시·전북 전주시가, 2011년 경북 상주시·청송군이 정식 가입해 10개 지역이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한국슬로시티본부 관계자는 “현재도 20여 개의 지자체에서 슬로시티를 신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슬로시티는 체험관광상품 개발을 통해 대도시민을 대상으로 한 슬로시티에서의 휴가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슬로’문화를 체험하기 위한 것인 만큼 일반 여행과는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 슬로시티에서는 ‘유람객’을 받기보다는‘다른 삶의 방식을 손님에게 보여준다’는 입장이다. “‘휙’보고 가기보다는 ‘푹’쉬면서 느림의 미학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 슬로시티 관계자의 조언이다. Mini Interview
손대현 한국슬로시티본부 이사장 “관광객 유치는 두 번째, 주민 삶의 질 개선부터”
손대현 이사장은 한국슬로시티본부 이사장임과 동시에 국제슬로시티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한양대 관광학부 명예교수다. 지난 2010년에는 국제슬로시티총회를 한국에서 개최시키는 등 한국에서의 슬로시티 운동을 주도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한국에 슬로시티가 확산되는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만의 흐름보다는 세계적으로 느림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단지 속도의 빠르고 느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방향의 문제다. ‘성장’일변도에 지친 사람들이 ‘성숙’한 삶을 위해서 다른 방향을 찾고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슬로시티를 운영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슬로시티 운동이 자칫 관제 운동으로 흐를까 봐 걱정이다. 슬로시티는 주민이 주체가 돼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운동이다. 우리나라 지방이 관 중심의‘지원’에 익숙해져 있어 인식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만족하는 부분과 아쉬워하는 점은 무엇인가.
“지역 음식과 공예품을 가장 좋아한다. 슬로시티에서는 음식도 공예품도 천천히 만든다. 아쉬운 점은 슬로시티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차도 많고 복잡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슬로’라는 콘셉트상 관광객이 너무 많은 것은 딜레마가 되지는 않을까.
“그런 면이 없지 않다. 관광객 유치는 슬로시티 목적의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그들이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그 후에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방문자들에게 보여주는 차원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기본 정신이다.”
슬로시티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짧은 시간보다는 긴 호흡의 방문을 권한다.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보고 가는 것은 슬로시티 주민들에게도 손님들에게도 무의미하다. 차를 세워놓고 며칠 머물면서 느린 삶 자체를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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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슬로시티 인증지역 소개
예산군 지역: 대흥·옹봉면
슬로푸드: 황토밭사과, 민물어죽
전통산업: 사과 재배 및 관련 상품(식품·수공예품)
주요특징: 예당저수지, 향교·동헌, 주민자치 활동(대흥보존회 등), 의좋은 형제
인구: 2100여 명 가입 2009년 9월
전주시 지역: 한옥마을
슬로푸드: 비빔밥과 한식, 이강주(전통주)
전통산업: 태극선, 전통주 등
주요특징: 조선왕조의 발상지, 한옥마을 자체가 거대한 전통 박물관, 한지 공예
인구: 2200여 명 가입 2010년 11월
신안군 지역: 중도면
슬로푸드: 갯벌천일염, 함초식품
전통산업: 염전, 함초 생산, 전통발효식품
주요특징: 태양+염전, 갯벌+해양생태, 해양 문화
인구: 2100여 명 가입 2007년 12월
장흥군
지역: 유치·장평면
슬로푸드: 표고버섯
전통산업: 지렁이농법, 표고버섯, 생약초
주요특징: 생약초, 한방특구, 건강장수 마을
인구: 1200여 명 가입 2007년 12월
완도군 지역: 청산면
슬로푸드: 전복, 해초해산물
전통산업: 전통적 어업 및 가공산업
주요특징: 돌담길, 전통 농어촌 경관 보존
인구: 2500여 명 가입 2007년 12월
담양군 지역: 창평면
슬로푸드: 전통 된장, 한과
전통산업: 염장류, 바이오산업, 전통한과 식품
주요특징: 한옥, 돌담, 전통향토기업, 향교
인구 : 4300여 명 가입 2007년 12월
하동군 지역 :악양면
슬로푸드 :천년 야생차, 대봉곶감
전통산업 :야생차 가공 및 곶감 생산
주요특징 :야생차 밭, 넓은 평야, 섬진강 문학 배경
인구 :3800여 명 가입 2009년 2월
남양주시 지역: 조안면
슬로푸드: 먹골배, 유기농산물
전통산업 :친환경 유기농
주요특징: 짚풀공예, 그린벨트 보호구역, 장수마을 지정, 다산 정약용 기념관
인구: 3900여 명 가입 2010년 11월
상주시 지역 :이안면
슬로푸드 :상주곶감, 산나물
전통산업 :명주를 활용한 전통 패션과 전통 방직,
전통 :옹기, 잠업
주요특징 :농산물 집산지, 한국의 대표 자전거 도시
인구 :2400여 명 가입 2011년 6월
청송군 지역 :파천면
슬로푸드 :청정지역 농산물, 얼음골 사과 (대통령 표창 2011)
전통산업 :전통한지, 청송백자와 옹기, 천연염색기법
주요특징 :에코 슬로라이프 마을, 송소고택
인구 :2000여 명 가입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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