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에서도 투자를 늘린 것은 국내 기업들이 2008년 금융 위기 속에서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이후 주가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금호석유, 호남석유, 에쓰오일 등 석유화학 업체들이 지난해 자동차와 함께 주도주로 부상한 것도 2008~2010년 설비투자를 크게 확대한 것이 뒷받침됐다. 선제적인 투자 확대가 이익 급증으로 되돌아 온 덕택이다. 전문가들은 이같이 향후 주가 상승을 가져오는 ‘설비투자 효과’는 대형주만이 아니라 중소형주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위기 속 투자로 도약
대덕전자는 2010년 8월 800억 원 들여 반도체용 기판(PKG) 전용 라인을 짓기로 결정했다.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모바일 D램 시장이 크게 확대되면서 고부가가치 제품인 PKG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 라인 건설로 생산능력을 50~60% 늘릴 수 있었고 이 덕분에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불어 닥친 스마트폰 열풍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대덕전자는 현재 삼성전자 등에 모바일 D램 기판, 모바일 메인보드 기판(HDI), 통신장비용 인쇄회로기판(MLB) 등을 공급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신규 반도체 기판 품목인 모바일 CPU 기판(FC-CSP) 공급에 나서게 된다. FC-CSP는 기존 CSP 대비 단가가 30% 이상 높아 앞으로 주요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주가 역시 큰 상승곡선을 그렸다. 2010년 말 8060원이었던 주가는 이듬해 5월 1만1850원으로 47% 급등했다. 지난해 유럽 재정 위기가 터지면서 6000원대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올해 다시 1만 원대 주가를 회복한 상태다.
주류업체 무학도 선제적인 설비투자를 통해 주가가 크게 상승한 사례로 꼽힌다. 부산·울산·경남 지역을 기반으로 주력 상품인 소주를 팔던 무학은 2008년과 2009년 울산공장의 생산능력을 키우는 등 설비투자에 나섰다. 부산·경남 지역은 원래 대선주조라는 업체가 높은 시장점유율로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선주조가 경영권 매각 이슈에 흔들렸고, 설비투자를 늘린 무학이 파고들면서 점유율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2010년 1593억 원이던 매출액은 작년 1957억 원으로 22.8% 늘었다. 영업이익은 406억에서 551억 원으로 35.7% 증가했다. 국내 소주 시장 점유율도 2007년 7.7%에서 작년 12.9%로 확대되며 전국 5위였던 업계 순위도 3위로 올라섰다. 무학의 주가가 크게 오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2010년 말 7103원이었던 주가는 작년 7월 1만3416원으로 뛰어올랐다. 이 기간 주가상승률은 88.9%에 이른다.
이밖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2010년부터 물류시설 투자를 확대한 락앤락은 2010년 말부터 작년 7월까지 30% 올랐다. 화장품업체 에이블씨엔씨는 2년 전 평택공장을 신설했다. 2010년 말 2만3441원이던 주가는 현재 6만7800원으로 189% 상승했다. 일진디스플레이, 알에프세미 등도 설비투자 후 높은 주가상승률을 보였다. 재무건전성 뒷받침돼야
설비투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경기가 둔화되는 국면에서의 대규모 투자가 나중에 경기회복기와 맞물려 양호한 이익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설비투자는 기업이 미래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지불하는 기회비용이다. 대부분 큰 비용을 필요로 하며 기업의 경영환경 및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설비투자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이익의 회수가 정상적으로 시작된다면 해당 업체의 경영 성과는 눈에 띄게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경기 회복세가 가시화된다면 선제적인 설비투자가 마무리되는 국면에 접어든 업체들의 성과가 두드러지게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서 투자를 늘리는 것은 자칫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악화시켜 오히려 주가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경기가 불확실한 시점에 진행된 설비투자는 그 기대수익과 위험과의 격차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비투자 효과를 기대할 만한 중소형주를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선 재무건전성이 우량해야 한다. 업황 개선 속도가 느리게 나타나더라도 설비투자로 인한 현금흐름이 기업의 영업 활동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주력 사업부문에서 제품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투자를 늘리기에 앞서 주력 사업부문에서 높은 시장점유율과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견뎌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올해 투자 늘리는 기업 주목
올해 상반기에는 기업들이 신규 시설투자 규모를 지난해에 비해 70% 이상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재정 위기와 중국의 성장 둔화 등 대외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설비투자를 유보하거나 아예 철회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거래소(KRX)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유가증권 시장과 코스닥 시장 상장법인의 신규 시설투자 금액은 6조1299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20조7897억 원)보다 70.5%가 줄어든 수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설비투자를 늘리는 기업들은 존재한다. 신진에스엠은 지난 2월 동탄공장 신축에 59억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기계산업의 기초가 되는 금속가공물인 플레이트를 제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신규 아이템인 서포트 유닛의 생산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다. 현재는 생산능력 부족으로 소량 생산에 그치고 있다.
에스텍파마는 시설 증설에 148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해외 시장의 거래선 증가와 공급 물량 확대에 따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에스텍파마는 일본에 천식 치료제와 위궤양 치료제 등 제네릭 의약품 원료를 수출하고 있다. 이번 투자로 생산능력이 2배로 커지게 돼 늘어나는 수출 물량에 대응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반도체 재료업체 디엔에프는 45억 원을 들여 연구소 건물과 클린룸을 신축하기로 했다. 반도체 미세공정에 쓰이는 화학소재를 생산하고 있는데, 삼성전자와 함께 이중패턴기술(DPT)이라는 핵심 물질을 국산화해 하반기부터 강한 실적 개선이 예상된다. 올해 약 95억 원이 될 DPT 매출액은 내년에는 183억 원으로 2배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메디톡스는 400억 원을 들여 공장을 신설한다. 회사 측은 미국과 유럽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해당 국가의 의약품 기준에 부합하는 공장을 짓는다고 밝혔다. 메디톡스 주가는 이미 많이 올랐지만 전문가들은 해외 시장을 발판으로 실적 개선 여지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동성하이켐도 시설투자에 50억 원을 쓰기로 했다. 동성하이켐은 강소 화학업체로 30년 넘게 석유화학, 정밀화학, 폴리우레탄 분야의 화학제품을 판매해오고 있다. 자동차 내장재용 소재를 공급하면서 매출이 급증하는 상황이다. 이번 투자는 고순도 석유화학 제품의 수입대체를 통해 안정적인 공급 확보와 함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임근호 한국경제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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