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크 주얼리 컬렉터 송경미 갤러리 람 대표
송경미 갤러리 람 대표는 영국 소더비 경매회사 부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장식 미술품과 순수미술 과정을 수료한 앤티크 주얼리 컬렉터다. 현재 서울 청담동에서 앤티크 주얼리 살롱 갤러리 람(RAAM)을 운영하는 그가 앤티크 주얼리 세계로 안내한다.![[The Collector] 앤티크 주얼리의 보석 같은 이야기](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1082.1.jpg)
“소더비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유학을 결심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꿈을 갖지 못했던 대학 4학년, 서점에서 미술서적을 보다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됐어요. 그것이 지금 운영하는 갤러리 람의 시작이 됐죠.”
![1830년경 제작된 낱알기법이 섬세한 꽃 모티브에 구사된 옐로 골드 목걸이.](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1083.1.jpg)
런던 유학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한 가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주얼리가 대량으로 생산돼 한 브랜드의 이름으로 유통되는 것에 익숙했다. 적어도 영국에서 앤티크 주얼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영국에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의 손을 거친 앤티크 주얼리를 공부하고, 직접 보고 느끼면서 그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The Collector] 앤티크 주얼리의 보석 같은 이야기](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1084.1.jpg)
![1 1840년경 제작된 희귀한 헤소나이트 가닛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1085.1.jpg)
전설적인 주얼리 디자이너들
주얼리는 원래 예술품의 하나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금과 시간을 들여서 엄선된 장인의 손을 거쳐 태어나는 특별한 작품, 즉 ‘오트 쿠튀르’였다.
수많은 주얼리 앤티크 중 손에 꼽히는 것이 ‘조각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황금 소금통 ‘살리에라’다. ‘살리에라’는 16세기 피렌체의 금세공인이던 벤베누토 첼리니가 프랑수아 1세를 위해 제작한 장식품으로, 그의 작품 중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주얼리에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적용한 이로는 카스텔라니와 줄리아노를 들 수 있다. 카스텔라니는 고대, 특히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시대 유물의 디자인과 기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의 제작 기법은 두 아들 알레산드로와 아우구스토에게 이어졌는데, 두 사람은 19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주얼리 제작자가 됐다. 특히 이들이 재현한 에트루리아 유물의 금세공 방식인 낱알기법은 19세기 금세공의 절정을 보여준다. 낱알기법은 0.2mm 정도의 아주 미세한 금속 알을 금속 바탕에 촘촘히 붙여 패턴과 질감을 내는 기법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까다로운 기술이다.
![2 1825년 제작된 다이아몬드 펜던트 브로치.](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1086.1.jpg)
로스차일드가에서 100년 이상 소장한 주얼리를 제작한 러시아의 주얼러 카를 구스타포비치 파베르제도 주얼리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장인이다. 파베르제는 자신이 제작한 주얼리를 ‘예술품(objet d’art)’이라고 부르고, 동시대 주얼러들의 작품은 상품이라고 폄하했다. 그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3 1870년경 제작된 다이아몬드 스타 브로치](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1087.1.jpg)
‘유리 공예의 마술사’로 불리는 르네 랄리크도 시작은 주얼리 제작자였다. 한때 프랑스 주얼리 문화의 구세주로 평가받기도 했던 그는 아르누보, 아르데코라는 미술사조에 그 이름을 깊이 새긴 대표적인 프랑스 공예가다.
![4 1890년대 제작된 다이아몬드 회중시계.](https://img.hankyung.com/photo/202101/AD.25101088.1.jpg)
유럽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운 앤티크 주얼리들은 지금도 왕가와 재력가들 사이에 컬렉션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송 대표가 청담동에 처음 갤러리 람을 열었던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앤티크 주얼리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갤러리 람이 문을 연 지 10년이 지난 지금 조금씩 컬렉터들이 늘고 있다.
앤티크 주얼리의 가치를 송 대표는 ‘오래됨의 미학’에서 찾는다. 일반 주얼리와 달리 유행을 타지 않으며 예술 사조를 반영한 독특한 디자인, 여러 소장자를 거치면서도 잘 견뎌낸 내구성, 당시 장인들의 놀랍고 참신한 기술, 희소성과 부가가치에 따른 기대감 등으로 인해 앤티크 주얼리는 21세기에도 각광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제게 앤티크 주얼리의 수집 방법이나 재산 가치를 묻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제 대답은 한결같이 ‘글쎄요’예요. 앤티크 주얼리를 포함한 예술품들은 단순한 대량 생산품과는 구별되기 때문에, 소재와 인력 등 원가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게 어려워요. 이것들은 철저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죠. 아무리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 진가를 알아보는 수요자가 없다면 나만의 ‘흡족한 물건’에 지나지 않아요.”
한때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인도 찬디가르시의 공공건물에서 사용하던 낡은 수천 개의 의자가 창고에 처박힌 채 폐기될 신세에 놓여있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이 도시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사촌인 피에르 잔레가 1950년대에 설계한 곳이다. ‘고물’로 여겨졌던 가구들은 알고 보니 그들이 디자인한 골동품이었다. 이들의 진가를 알아본 해외 수집가들은 이 골동품을 반출했고, 그 가운데 티크 나무 책상이 14만4000파운드,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맨홀 뚜껑이 2만1000파운드에 낙찰되기도 했다. 고물과 골동품의 차이는 이런 것이 아닐까. 찬디가르시는 그제야 골동품의 해외 반출을 금지했지만, 해외 수집가들의 선견지명으로 이것들 대부분이 이미 팔려 나간 뒤였다.
“이런 환상을 가지고 앤티크 주얼리 컬레션에 나설 분이 있다면 무조건 말리고 싶어요. 주얼리 컬렉션으로 당장 큰 이익을 보겠다는 욕심은 버리셔야 해요. 현금이나 부동산, 주식, 채권 등으로 자산을 분할해서 관리하듯이 주얼리 역시 포트폴리오에 포함시켜 장기적인 안목으로 즐기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봐요.”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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