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웅적인 청년은 제우스와 다나에 사이에 태어난 페르세우스로 메두사의 목을 잘라오라는 세리포스의 왕 폴리데크테스의 명령을 완수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에티오피아를 지나던 중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괴수의 습격을 받은 그곳의 왕 케페우스가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목격하고 괴물을 무찔러 안드로메다를 구해낸다.
이 장면은 바로 페르세우스가 괴물을 제압한 후 안드로메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보여주는 장면을 담은 ‘사악한 머리’라는 작품이다. 그러나 메두사의 얼굴은 비록 죽은 모습일지라도 보는 이들을 돌로 만들기 때문에 오로지 반사된 모습으로만 볼 수 있다. 그래서 페르세우스는 사랑하는 안드로메다에게 물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페르세우스나 안드로메다나 메두사에게는 관심이 없고 서로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원전에는 없는 화가의 애교스러운 창작이다.
이 그림이 보는 이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초자연적인 마법의 세계를 묘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화가 에드워드 번존스(Edward Burne-Jones·1833~1898)의 색다른 묘사 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화면을 지배하는 색조는 현실세계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을 지배하는 색조는 오렌지색으로 상당히 짙은 톤으로 묘사됐다. 특히 나무와 석재 우물의 초록은 납에 내려앉은 녹색에 가깝다. 그것들은 마치 달빛을 머금은 듯 빛을 발한다.
그와는 반대로 두 남녀와 메두사의 얼굴은 백랍처럼 밝다. 짙은 색은 좀 더 짙게, 밝은 색은 좀 더 밝게 묘사돼 있다. 색채와 빛의 원리 모두 현실세계를 재현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묘사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화면 전반에 감도는 비현실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는 그런 새로운 조형적 시도의 결과다. 그렇게 해서 이루진 모습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 너머의 세상 풍경이다.
신비한 분위기는 기이한 형태감에서도 비롯된다. 두 인물이 걸친 의상은 마치 금속제의 조각 작품 같은 느낌이다. 안드로메다의 옷 주름은 직선적이고 골 파인 주름은 다분히 기계적이다. 게다가 배경이 되는 사과나무는 둥치(줄기), 이파리, 열매 할 것 없이 마치 금속제의 정교한 모조품처럼 차갑게 묘사됐다. 기묘한 색감, 이 세상과는 다른 해괴한 빛은 이곳이 마법으로 가득한 공상의 세계임을 말없이 주장하고 있다.
그림을 그린 번존스는 영국의 유미주의(aestheticism: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경향)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옥스퍼드대 출신의 이 먹물 화가는 대학시절 취미로 그림을 시작했는데 라파엘전파의 핵심 멤버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의 권유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로열 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라파엘전파는 당시 영국 화단의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추종하는 경향과 감상주의적이고 맥 빠진 아카데미 화풍에 반발, 라파엘로 이전(중세 말~르네상스 초기)의 자연에서 겸허하게 배우는 화풍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러나 이들은 깊은 내적 의미를 지닌 내용을 명쾌한 이미지로 전달하자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애매모호한 주장과 주제를 통속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한계성을 드러낸다. 이런 부정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라파엘전파에 열광한 젊은이들은 적지 않았다. 번존스는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선배들과 달리 내적 의미의 전달보다는 이미지 자체가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와 시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데 더 관심을 뒀다.
그는 현실세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고전적 텍스트 속에서 작품의 소재를 길어 올렸고 기독교와 그리스의 이교적 신화를 결합, 독창적인 인물상을 창조했다. 특히 평생 지기로 시인 겸 공예가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에게서 받은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사악한 머리’를 비롯한 페르세우스 시리즈는 모리스의 서사시집 ‘지상천국(Earthly Paradise)’에 수록된 ‘아크리시우스왕의 불운’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는 이 신화적 에피소드를 12개의 이미지로 압축했는데 그가 주목한 것은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찾아나서는 과정과 안드로메다의 구출이었다. 지엽적인 줄거리는 제외하고 감상자들을 로맨틱한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장면들로 꾸몄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소재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 ‘페르세우스와 바다의 요정들’, ‘페르세우스와 그라이아이(하나의 눈과 이빨을 공유했던 세 늙은 마녀)’는 판타지 마니아를 열광시킬 정도로 매력적이다.
번존스가 주목한 것은 그리스 로마의 신화만이 아니었다. ‘성 조르주’ 같은 기독교적인 테마는 물론 물의 요정 루살카 이야기(그림 ‘깊은 바다 저 아래’) 같은 북구와 게르만 전설이 그의 손을 거쳐 낭만적 꿈의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고전미술의 상투적인 시각에 젖어있던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에 생동감이 부족하다고 딴죽을 걸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비난이 거세질수록 한편에선 그의 환상적인 그림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나날이 늘어갔다. 그것은 아마도 도시화와 산업혁명으로 극심한 계층 간의 갈등, 소외현상을 겪고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에게 정신적 도피처를 제공해줬기 때문이리라. ‘예전에 일어난 적 없고 앞으로도 일어날 리 없는’ 번존스의 낭만적인 꿈의 세계는 우리가 두고두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언덕임에 틀림없다.
정석범 _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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