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파티복(이브닝코트)은 저녁이라는 파티 시간대에 맞춰 밝은 색을 배제하다 못해 블랙 일색이다. 이 이브닝코트야말로 새빌로 스타일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런던 메이페어 지역에서는 저녁이면 아직도 이브닝코트를 차려 입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걷는 ‘런던 신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1988년 이후 오랜만에 현대 양복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헨리풀(Henry Poole & Co)에서 로열패밀리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새빌로 비스포크 양복에 재도전해봤다. 헨리풀은 ‘왕실 조달 허가증(royal warrant)’을 가장 많이 받은 곳으로 1860년에서 1876년까지 헨리 풀의 생존 당시 한 해 평균 1만2000개의 비스포크 오더를 받을 정도로 로열패밀리와 지도층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비스포크 테일러다.
1년여의 제작 기간 동안 몇 차례의 가봉을 거쳤는데(1년에 걸쳐 10kg 이상이 빠졌으니 가히 다른 사람이라고 할 만도 하다), 막상 찾을 땐 맞춤 슈트임에도 옷이 컸다. 하지만 새빌로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향수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만드는 양복에는 특유의 ‘신사의 향기’가 있다. 옷에서 풍겨 나오는 장중함,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신사의 멋은 다른 나라 어떤 기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다. ‘런던의 월스트리트’라고 할 수 있는 시티 지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슈트를 차려 입은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런던의 비즈니스맨들은 거리, 건물과 완벽하게 동화돼 움직이는 느낌이다.
세월을 초월한 2-6(two six) 버튼의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는 언제 봐도 딱 영국 스타일이다.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슈트를 입고 런던의 골목골목을 거니니 마치 영국인이 된 것처럼 이질감이 없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다. 귀국 후 런던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며 기분 좋게 차려 입고 나선 서울 한복판에서의 내 모습은 놀랍게도 경직되고 답답한 옛날 아저씨 그 자체였다는 것. 그래, 서울이구나. 아, 너는 천생 영국 슈트로구나. 글쓴이 이영원은…
대한민국 핸드메이드 남성복의 아이콘 ‘장미라사’의 대표. 옷이 좋아 옷을 맞추고, 입고, 즐기고, 선물하는 재미에 365일 빠져 있는 사르토리알이다. 내 집 드나들 듯 한 덕에 유럽은 눈감고도 다닐 수 있다는 그는 옷이 곧 문화라는 철학으로 한국 수제 남성복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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