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le Row, London W1.’ 영국 런던 번화가의 중심이자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와 본드 스트리트(Bond Street)의 사이에 있는 100m 남짓의 조그마한 골목길인 새빌로(Savile Row)는 현대 양복의 고향으로 신사복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소다. 작은 골목길의 이름은 세계 남성복 시장에서 고유명사로 자리 잡으며 17세기부터 지금까지 클래식 신사복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은 거리에서 수많은 영웅들, 로열패밀리, 정치인, 기업가, 은막의 스타 등 전 세계적 패션 아이콘들은 물론 우아한 댄디(dandy) 스타일이 탄생했다.
새빌로의 양복은 런던에서 빛을 발한다
최근 하이엔드 신사복 시장에서도 다시금 새빌로를 주목하고 있지만, 사실 ‘새빌로 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드러운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스타일, 실용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디테일이 많은 프렌치 스타일과는 다른 새빌로만의 아우라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새빌로 스타일은 이탈리안의 그것과는 달리 균형미와 비율을 중시하며 디테일의 변화로 다양한 스타일을 표현한다. 가령 사냥복(헌팅 재킷)의 경우 어깨에 가죽을 덧대거나 주머니를 많이 달기도 하며, 비즈니스 슈트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디테일을 최소화함으로써 균형감 있는 실루엣만 강조한다.

‘영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파티복(이브닝코트)은 저녁이라는 파티 시간대에 맞춰 밝은 색을 배제하다 못해 블랙 일색이다. 이 이브닝코트야말로 새빌로 스타일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런던 메이페어 지역에서는 저녁이면 아직도 이브닝코트를 차려 입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걷는 ‘런던 신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영국 런던 새빌로의 양복점 헨리풀을 들어서는 필자. 헨리풀은 왕실 조달 허가증을 가장 많이 받은 곳으로 1800년대 중반 헨리 풀의 생존 당시 로열패밀리와 지도층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비스포크 테일러다.
영국 런던 새빌로의 양복점 헨리풀을 들어서는 필자. 헨리풀은 왕실 조달 허가증을 가장 많이 받은 곳으로 1800년대 중반 헨리 풀의 생존 당시 로열패밀리와 지도층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비스포크 테일러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1988년 이후 오랜만에 현대 양복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헨리풀(Henry Poole & Co)에서 로열패밀리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새빌로 비스포크 양복에 재도전해봤다. 헨리풀은 ‘왕실 조달 허가증(royal warrant)’을 가장 많이 받은 곳으로 1860년에서 1876년까지 헨리 풀의 생존 당시 한 해 평균 1만2000개의 비스포크 오더를 받을 정도로 로열패밀리와 지도층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비스포크 테일러다.

1년여의 제작 기간 동안 몇 차례의 가봉을 거쳤는데(1년에 걸쳐 10kg 이상이 빠졌으니 가히 다른 사람이라고 할 만도 하다), 막상 찾을 땐 맞춤 슈트임에도 옷이 컸다. 하지만 새빌로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향수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만드는 양복에는 특유의 ‘신사의 향기’가 있다. 옷에서 풍겨 나오는 장중함,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신사의 멋은 다른 나라 어떤 기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다.
필자가 직접 맞춘 비스포크 슈트.
필자가 직접 맞춘 비스포크 슈트.
‘런던의 월스트리트’라고 할 수 있는 시티 지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슈트를 차려 입은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런던의 비즈니스맨들은 거리, 건물과 완벽하게 동화돼 움직이는 느낌이다.

세월을 초월한 2-6(two six) 버튼의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는 언제 봐도 딱 영국 스타일이다.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슈트를 입고 런던의 골목골목을 거니니 마치 영국인이 된 것처럼 이질감이 없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다. 귀국 후 런던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며 기분 좋게 차려 입고 나선 서울 한복판에서의 내 모습은 놀랍게도 경직되고 답답한 옛날 아저씨 그 자체였다는 것. 그래, 서울이구나. 아, 너는 천생 영국 슈트로구나.
‘런던의 월스트리트’로 알려진 시티 지역에서 슈트를 차려 입은 비즈니스맨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진 왼쪽은 런던 로열 익스체인지 내부.
‘런던의 월스트리트’로 알려진 시티 지역에서 슈트를 차려 입은 비즈니스맨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진 왼쪽은 런던 로열 익스체인지 내부.
새빌로의 양복은 런던에서 빛을 발한다
글쓴이 이영원은…

대한민국 핸드메이드 남성복의 아이콘 ‘장미라사’의 대표. 옷이 좋아 옷을 맞추고, 입고, 즐기고, 선물하는 재미에 365일 빠져 있는 사르토리알이다. 내 집 드나들 듯 한 덕에 유럽은 눈감고도 다닐 수 있다는 그는 옷이 곧 문화라는 철학으로 한국 수제 남성복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