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서, ‘주역’

동양이나 서양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알아낸 확실하고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을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모든 것은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해서 원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지만 물은 이미 같은 강물이 아니고, 우리도 우리지만 이전의 우리가 아니다.”

‘주역(周易)’의 ‘역(易)’이란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변함, 쉬움, 그리고 바꿈이다. 필자는 10년 가까이 ‘주역’을 읽고 있지만 우둔한 탓에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요체를 잡지 못하고 있다. ‘쉽다’는 말에 혹해서 입문했지만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내용이 있을까 하고 회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무를 살피면 숲이 보이지 않고, 숲을 살피면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낡아빠진 ‘주역’에 쓸데없이 매달리는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주역’이 세상 변화의 원리를 알려주고 변화의 낌새를 보여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주역’은 내비게이션과 흡사하다

‘주역’이 수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인 주제이지만, 인간사의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완벽한 지혜’로 받아들이기에는 비약이 너무나 많고 포괄적이라는 것이 아직까지 경지에 들지 못한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주역’은 크게 점(占)을 중시하는 상수역(象數易)과 철학적 수양을 중시하는 의리역(義理易)으로 나눌 수 있고(정병석 영남대 교수는 전자를 이경, 후자를 이전으로 구분하고 있다), 필자는 의리역에 기울어 있는 실정으로 애써 상수역을 무시하려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점 기능을 무시하는 의리역은 공허한 원론이 될 가능성이 많다.

‘주역’은 하늘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인생 내비게이션’ 또는 ‘상황의 지도’라는 느낌이 든다. 그것을 활용하면 큰 변화의 흐름을 알 수 있고, 큰 흐름을 알면 당황하거나 멀미를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기호가 너무 복잡해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는 ‘하늘의 뜻을 묻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버스를 타고 굴곡이 심한 길을 가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멀미를 하는데 이는 버스가 좌우로 회전할 때마다 거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쏠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다. 운전자는 길이 구불구불한 것을 미리 알고 좌회전할 때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동시에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몸이 오른쪽으로 쏠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인생길 역시 변화무쌍하다. 이 고달픈 인생길을 해결하는 방법은 먼저 운전자처럼 인생의 길과 그 대처 방안을 파악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성인이 제작한 비결서가 바로 ‘주역’이다.”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주역’의 효용은 ‘인생의 여정에서 멀미를 피할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주역’을 안다고 우리에게 닥친 오르막길을 내리막길로 만들고, 굽은 길을 바르게 펼 수는 없다. 어려운 상황임을 미리 알고 적절히 참고 조심해 위기를 넘기고, 좋은 상황임을 미리 알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 어려움이 닥치면 머지않아 쉬운 일도 찾아온다는 것 등 낌새를 미리 알아 ‘멀미를 느끼지 않는 것’ 그것만 해도 얼마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빛과 어둠의 양 극단을 양(陽)과 음(陰)으로 압축해 만들어낸 것이 ‘주역’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빛과 어둠의 양 극단을 양(陽)과 음(陰)으로 압축해 만들어낸 것이 ‘주역’이다.
반도체와 비슷한 변효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빛과 어둠의 양 극단을 양(陽)과 음(陰)으로 압축해 만들어낸 것이 ‘주역’이다. 이러한 생각은 동양의 거의 모든 사상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주역’이 흥미로운 점은 강유, 노소, 고저, 장단, 대소, 남녀, 능동-수동, 적극-소극 등 모든 대대적 관계를 음과 양이라는 두 개념으로 압축, 추상하고, 이러한 음양을 하늘(天)·땅(地)·인간(人)의 삼재(三才), 그리고 시간적 단계, 사회계층적 단계 등의 다원적 요소를 입체적으로 결합시킨 6효를 가진 대성괘를 만들고, 그것으로 우주만물의 핵심적 요소인 8괘를 형성해 시간적 흐름과 공간적 방위를 부여해 인생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8괘가 서로 마찰되고 섞이면서 64괘를 만들어 인간 주변의 모든 사물 또는 현상과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음양 두 획으로 이루어진 복희의 ‘주역’이 ‘과학에 관한 최고의 기념물’이라고 감탄해 우주에 내재한 이진법 체계를 창안했다. 이러한 이진법이 오늘의 컴퓨터를 발명케 하고 오늘의 문명을 이루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변화를 주도하는 가장 미묘한 것이 ‘변효(變爻)’다. 노양(또는 태양)은 지금은 양이지만 곧 음으로 바뀔 것이고, 노음(또는 태음)은 지금은 음이지만 곧 양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전기가 흐르는 도체도 되고 전기가 흐르지 않는 부도체도 될 수 있는 현대 과학의 핵심 중 하나인 반도체(半導體)와 매우 흡사하다. 그 반도체의 발명으로 오늘날 디지털 문명을 열지 않았는가.

다산 정약용의 ‘주역사전(周易四箋)’에서는 사물과 현상의 변화 원리로서 효변(爻變)의 원리를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손괘 다음에 익괘가 온다

경영학 중에서도 회계학을 전공하는 필자가 오래전부터 품어오던 의문 중 하나는 주요 재무제표 중 하나인 ‘손익계산서’는 왜 ‘익손계산서’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회계제도는 서양에서 도입된 것이고 서양에서는 의례 이익계산서(income satement) 또는 익손계산서(profit and loss statement)라고 쓰는데 말이다. 이런 의문은 필자가 주역을 공부하면서 손괘 다음으로 익괘가 나오는 것을 알고 나서야 풀렸다.

주역 64괘의 인과성을 발견하고 그 순서를 부여해 ‘서괘전(序卦傳)’을 쓴 공자는 위대하다. ‘주역’의 40번째 괘가 해(解)괘이고, 해괘 다음이 손(損)괘, 손괘 다음이 익(益)괘다. 서괘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解)는 느슨함(풀어짐)이니 느슨하면 반드시 잃는 바가 있으므로 손(損)으로 받았고, 덜어내고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더하므로 익(益)으로 받았다(解者 緩也 緩必有所失 故受之以損 損而不已 必益 故受之以益).”



손괘는 산택손(山澤損· )으로 산이 위에 있고 아래로 못이 있는 상(象)이고, 이것은 아래 3효에 있던 양효를 맨 위 6효(상효)에 보탠 모양으로 ‘아래를 덜어 위를 더한’ 것이라고 본다. 반대로 익괘는 풍뢰익(風雷益· )으로 위에는 바람이 있고 아래는 우레가 치는 형상으로 위의 4효 양이 맨 아래 초효로 내려간 모양으로 ‘위를 덜어 아래를 더해줌’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손은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탬’이고, 익은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탬’이니 백성이 기뻐하고 그 도가 크게 빛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랫사람인 백성을 중심으로 말했다는 데 의미가 깊다. ‘회남자(淮南子)’의 인간훈에서 “공자가 ‘주역’을 읽을 때 손익괘에 이르러 소리치면서 말하기를 손괘와 익괘야말로 바로 왕(王)의 일이라고 했다”는 기록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다.

물론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도 차를 잘 타고 다녔듯이 ‘주역’을 읽지 않았다고 세상을 못 살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 목표에 다다르는 최적의 코스를 쉽게 찾고 불안이 줄어들어 자신감이 생기는 것처럼 불확실한 세상살이가 그리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어떤 사물이라도 극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간다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자연원리를 이해한다면, 아무리 궁한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결국에는 변하게 되고(窮則變), 변하면 통할 수 있고(變則通), 통하면 오래간다(通則久)는 변화의 이치를 깨닫게 돼 힘든 고통도 거뜬히 참을 수 있다. 반대로 지금 조금 성공해 잘 됐다 하더라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조신하면서 신중히 처신할 수 있으리라.




일러스트 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