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현 미스터피자 회장


자서전 출간을 앞둔 정우현 미스터피자 회장은 ‘어떤 단어가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낼까’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계시처럼 머리를 친 단어가 ‘꾼’이었다. 그만큼 자신을 잘 나타내는 말이 없는 듯했다. 농사꾼, 노래꾼, 승부꾼, 피자꾼까지.
미스터피자를 세계 1등 피자에 등극시키겠다는 피자꾼 정우현을 서울 방배동 본사에서 만났다.

[Success Story] 장사꾼·피자꾼 정우현의 ‘꾼 예찬론’
미스터피자 방배동 사옥에 이르자 가장 먼저 사석원의 1000호짜리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방배동 사옥이 문을 열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던 바로 그 당나귀 벽화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벽화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회장실이 있는 건물 7층에 들어서자 사석원, 배병우, 이왈종, 도성욱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도열하듯 곳곳에 걸려 있었다. 여느 미술관 부럽지 않은 작품을 보며 정우현 미스터피자 회장의 그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을 둘러보는 사이 정 회장이 들어섰다. 외부 행사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며 인사를 건넨 그는 넥타이부터 벗어젖혔다. 자리를 권하며 그는 “원래 장사꾼 출신이라 넥타이를 매면 불편하다”고 했다. 호방한 웃음이 시원시원했다.



2012년은 중국 진출 원년, 최종 목표는 세계 1등

“행사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넥타이를 맸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미스터피자의 중국 진출 의의를 이야기하는 자리라….”

커피로 목을 축인 그는 중국 진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보는 중국은 정말 광활한 나라다. 상하이(上海) 중심의 남부와 베이징(北京) 중심의 북부는 다른 나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넓은 곳이 중국이다. 최근 미스터피자는 합작법인을 설립하며 광활한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중국 합작법인을 설립한 것은 최근이지만 2000년 중국 진출 후 자연발생적으로 문을 연 23개의 매장이 있다. 10년의 세월은 중국 시장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10년 동안 신뢰를 심으며 미스터피자는 중국 최대 음식 평가 사이트인 ‘다중뎬핑(大衆點評)’에서 ‘2009년 중국 50대 맛집’에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 50대 맛집에 선정된 것은 중국 진출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됐다. 정 회장은 합작법인 설립을 계기로 매장을 늘리고 남쪽에 플래그십스토어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그 외 지역을 컨트롤할 지주회사를 통해 중국 시장을 거침없이 질주할 거라고 신이 나서 말했다.

중국에서의 성공을 마치 눈앞에 펼쳐진 현실처럼 이야기하던 그는 우리 정부나 식자들이 우리나라 브랜드인 미스터피자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운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많은 외국 브랜드들이 한국에서 로열티를 가져가지만, 미스터피자는 외국에서 로열티를 받아오는 국부 브랜드다. 그는 이런 브랜드를 키워내는 데 정부도 힘을 보태야 한다고 했다.
회장 입장에서 1차 고객은 매장을 찾는 손님이고, 2차 고객은 내부 직원과 가족점주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점들이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회장 입장에서 1차 고객은 매장을 찾는 손님이고, 2차 고객은 내부 직원과 가족점주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점들이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피자 춘추전국시대, 이대에 미스터피자 깃발을 꽂다

외국 브랜드와의 싸움,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피자업계에 뛰어든 1990년은 미국과 일본에 본사를 둔 피자업체들이 속속 들어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무엇보다 미스터피자 1호점을 열기까지 그는 동대문시장의 섬유도매업체를 경영하던 장사꾼이었다.

“섬유도매업을 하면서 돈은 원 없이 만져봤습니다. 하지만 섬유도매업은 많은 재고를 떠안아야 하고, 외상 거래가 너무 많았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별보기 운동을 해야 할 정도로 근무 환경도 나빴고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익도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외식업과 인연을 맺은 건 그즈음 이화여대 앞에 커피 전문점 ‘마리포사’를 차리면서다. 섬유도매업을 하면서 부업으로 커피 전문점을 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재고 부담도 덜하고 현찰 장사에, 근무 환경까지 좋았다. 이익도 섬유도매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외식사업의 매력에 빠진 그는 본격적으로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고 피자를 만났다. 정 회장은 처음 피자를 맛보고 전율을 느꼈다. 지구상에 수많은 음식이 있지만 피자만한 음식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밀가루 반죽 위에 자기가 좋아하는 식재료를 얹는 피자야말로 지구상 가장 완벽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일본 기업과 사업을 하던 친지의 소개로 호소카와 요시키 미스터피자재팬 사장을 만났다. 미스터피자재팬도 한국 진출을 위해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미스터피자 1호점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이대 1호점을 여는 자리에서 그는 한국 1위가 되겠다고 선포했다. 미스터피자의 레시피를 보면서 세계 어디에 내놔도 통하는 피자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사는 예상했던 만큼 잘 됐다. 오픈된 부엌에서 핸드 토스팅 등 피자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 게 이대 상권과 잘 맞아떨어졌다.

“제가 동대문 거상 출신이잖아요. 동대문에서 장사할 때는 돈의 가치를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커피 전문점은 다르더군요. 700원짜리 커피를 하루에 1000잔 팔면 70만 원이 들어옵니다. 그걸 매일 은행에 입금하고, 거기서 비용을 빼고 나면 고스란히 이익으로 남는 겁니다. 섬유도매업하고는 달랐죠. 미스터피자 1호점을 열었더니 또 달라요. 미스터피자 한 달 순이익이 커피 전문점 한 달 매출을 뛰어넘더군요.”
고객과 가족점에 몽땅 다 주자는 게 제 비즈니스 전략입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단 한 곳도 폐점한 곳이 없습니다.
고객과 가족점에 몽땅 다 주자는 게 제 비즈니스 전략입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단 한 곳도 폐점한 곳이 없습니다.
400여 개 가족점 중 폐업한 곳은 한 곳도 없어

1호점의 성공을 발판으로 미스터피자는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갔다. 급기야 창업 18년이 되던 2008년 미스터피자는 국내 피자업계 1위 자리를 차지했다. 2012년 현재 미스터피자는 전국에 400여 개 가족점(정 회장은 가맹점을 가족점이라고 부른다)을 둔 한국 최고 피자회사로 자리 잡았다.

정 회장은 미스터피자의 성공 뒤에 “저온 숙성의 생도(dough)만을 사용해 정성껏 수타하고 일일이 손으로 토핑한 후 석쇠에 굽는다는 원칙이 있었다”고 말한다. 미스터피자의 성공에는 그 세 가지 원칙과 함께 정 회장의 고객 만족 서비스가 있다. 정 회장 스스로도 한국 브랜드인 미스터피자가 오랜 해외 경험을 가진 유명 브랜드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고객 만족 경영을 든다.

정 회장은 미스터피자와 외국 브랜드들의 가장 큰 차이는 누구를 최우선에 두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외국 브랜드들은 주주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주들에게 많은 배당을 주기 위해서는 이익을 많이 남겨야 하는데, 그러자면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싼 재료를 찾게 되고, 피자의 질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미스터피자는 고객이 최우선이다. 고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다 보니 값이 비싸더라도 점점 더 좋은 재료를 쓰게 됐다. 정 회장은 미스터피자를 경영하는 22년 동안 한 번도 잊지 않은 게 고객 만족이었다고 했다.

“회장 입장에서 1차 고객은 매장을 찾는 손님이고, 2차 고객은 내부 직원과 가족점주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점들이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고객과 가족점에 몽땅 다 주자는 게 제 비즈니스 전략입니다. 다행히 돈이 되니까 어떤 점주들은 점포를 한두 개 더 열기도 합니다. 그 덕에 지금까지 폐업한 사례가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Success Story] 장사꾼·피자꾼 정우현의 ‘꾼 예찬론’
제시카키친과 마노핀 갤러리의 탄생

정 회장은 미스터피자가 정상에 서자 뒤이어 이탈리안 홈 메이드 뷔페 레스토랑 ‘제시카키친’과 수제 머핀·커피 전문점 ‘마노핀’을 연이어 세웠다. 제시카키친은 자본금이 상대적으로 많이 들어 성장이 더딘 반면, 마노핀은 16.5㎡ 정도 점포로도 창업이 가능하다.

마노핀 창업을 앞두고도 정 회장은 고민이 많았다. 수제 머핀과 커피를 결합한 매장을 내자고는 했지만, 커피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특별한 차별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고심 끝에 찾아낸 것이 그림이다. 수제 머핀과 커피, 여기에 그림을 가미하면 괜찮은 조합이 탄생할 듯도 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그림이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다 전국 방방곡곡에 미술품을 쉽게 즐기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카페가 정착되면 좋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마노핀 갤러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마노핀 갤러리 오픈 후 2001년 정 회장은 제1회 마노핀 신진 작가 공모전을 열었다. 마노핀 수상 작가가 되면 푸짐한 상금과 함께 가나아트센터가 운영하는 장흥 아틀리에 입주 자격과 순회 전시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마노핀 공모전의 열기는 대단했다.

공모전을 치르는 한편 정 회장은 지하철 역사에 마노핀 익스프레스점을 열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개점 후 머핀은 많이 팔리는 데 커피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보다 못한 정 회장은 마노핀사업본부장을 불러 커피 한 잔의 원가를 물었다. 본부장은 원가가 500원 정도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정 회장은 당시 2500원하던 커피 값을 800원으로 내리라고 지시했다. 본부장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통치권’을 발동해 그 자리에서 커피 값을 800원으로 결정했다.

“나중에 원가가 많이 올라 지금은 990원에 됐지만, 한동안 커피 한 잔에 800원을 받았습니다. 800원으로 내린 후 본부장이 커피 값을 환원하자고 하길래 화가 나서 다시 10원 더 내렸어요. 사랑을 받으려면 몽땅 줘야 합니다. 가격 때문에 망하면 고객들이 데모를 해서라도 가격을 올려주게 마련입니다.”



장사꾼의 기본은 고객 만족

정 회장은 마노핀 갤러리가 이제 뒤집기를 시작한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했다. 할 일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정 회장은 마노핀 갤러리가 종국에는 머핀과 커피가 있는, 문화 공간으로 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서예로 상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림에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무턱대고 그림이 좋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그 덕에 1970년대부터 그림을 좀 모았습니다.”

너무 그림에 빠지면 안 되겠다 싶어 한동안은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예술을 마케팅에 접목하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 생각을 좀 더 구체화하는 중이다. 매장을 갤러리화하겠다는 구상도 그중 하나다. 정 회장은 미스터피자가 배달 전문점이 아니라 다이닝 매장이기에, 고객들의 입뿐 아니라 눈까지 즐겁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장사꾼다운 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객에게 무조건 다 주겠다는 식으로 세포가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