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주)로만손 사장
2012년은 (주)로만손이 창립 24년을 맞이하는 해임과 동시에 시계, 주얼리에 이은 핸드백 론칭과 미국 시장 본격 진출로 제2의 도약을 공표한 해다. 한국 시계 브랜드 로만손(ROMANSON)은 올해로 11년 연속 스위스 시계보석박람회인 바젤월드 유럽관(명품관 5홀)에 초대되며 글로벌 워치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다졌다. 김기석 사장은 시계에 이어 피겨 스타 ‘김연아 주얼리’로 유명한 제이에스티나(J.ESTINA)를 론칭하며 주얼리업계에 토네이도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로만손’은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 공업 도시 ‘로만시온(Romancion)’에서 영감을 받은 브랜드 명이다. 1988년 예물시계가 주류를 이루던 국산 시계 브랜드의 치열한 4파전 속에서 어렵게 탄생한 로만손은 일찌감치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려 1990년대부터 두바이를 필두로 중동, 러시아 등으로 수출을 시작했다.이후 로만손 시계는 현재까지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연간 2000만 달러 이상의 수출 실적을 올리며 ‘해외에서 더 유명한 시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를 입증하듯 로만손은 한국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스위스 바젤월드에 11년간 참여했다. 2007년 선보인 프리미엄 라인 ‘프리미어(Premier)’와 2010년 론칭한 ‘액티브(Active)’는 디자인과 기술력을 업그레이드하며 탄생시킨 히트 상품. 특히 프리미어 라인 중 아트락스(Atrax)는 30만~50만 원 선인 다른 모델과는 달리 100만 원대의 고가 라인이지만 국내 20~30대 남성 고객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으며 출시 3개월 만에 완판 기록을 세웠고, 올 하반기 오토매틱 모델 출시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로만손이 시계만 만드는 기업은 아니다. 24년간의 연혁 가운데 2003년은 국내 시계업계는 물론 보석업계에서도 주목해야 할 해다. 액세서리(코스튬) 주얼리와 파인 주얼리 사이의 틈새시장을 겨냥하며 출시한 ‘제이에스티나’가 전례 없는 성공을 이루며 주얼리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 론칭 초기부터 스타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가파른 매출 상승곡선을 기록했던 제이에스티나는 2008년 피겨 스타 김연아를 후원하면서 베스트셀러를 연속으로 탄생시켰다.
창업주인 김기문 회장(현 중소기업중앙회장)에 이어 2007년 1월 사장에 취임한 김기석 사장은 제이에스티나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시계회사에서 만들었던 여성 주얼리 브랜드를 보란 듯이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백(bag) 역시 지난해 성공적으로 론칭시켰다. 지난해 11월에는 제이에스티나로 럭셔리 호텔인 뉴욕 플라자호텔에 매장을 오픈하며 미국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봄비가 촉촉하게 오던 날, 서울 송파구 가락동 로만손 본사에서 김 사장은 누구나 쉽게 소화할 수 없는 블루 톤의 슈트 차림으로 손님을 맞았다. 셔츠 아래 손목에는 로만손 프리미어 라인 히트작인 ‘아트락스’가 채워져 있었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로만손’을 만든 도전정신
세련된 CEO 룩을 연출하셨습니다.
“제가 원래 옷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이에스티나를 론칭한 뒤론 명실 공히 글로벌 패션 브랜드 기업이 됐잖습니까.(웃음) 패션 브랜드회사 최고경영자(CEO)답게 조금 튀게 하고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종의 허용이랄까요.”
창업주인 김기문 회장의 막내 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 24년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로만손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5남매 가운데 남자 형제가 형님과 저 둘이라 형님이 시작하는 사업을 함께 하게 됐죠. 승승장구했다는 얘기는 쑥스럽고 그저 망하지 않고 꾸준히 발전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웃음) 경쟁력이라면 우리 회사의 DNA라고 할 수 있는 도전정신이랄 수 있습니다. 창업 초기부터 국내외 시장을 가리지 않았던 영업 마인드가 있었죠. 두 번째는 열정인데, 형님도 저도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창업 아이템을 시계로 결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때도 시계 하면 스위스나 일본을 제일 먼저 꼽지 않았나요.
“형님이 친척이 운영하던 시계회사에 다니면서 경영수업을 한 경험이 있어요. 자연스럽게 독립하면서 시계회사를 만들게 됐죠.”
창업연도가 1988년인데 1990년부터 일찌감치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시계가 사치 품목으로 분류돼 있어 시계 시장이 개방되지 못했을 때였어요. 당시 국내 시계 시장은 예물시계가 주류를 이루며 오리엔트, 아남, 한독, 삼성 등 대기업의 4대 브랜드가 출고가 기준으로 1000억 원대 시장을 형성할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었죠. 작은 회사의 브랜드가 대기업 브랜드와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해외 시장이었어요. 해외 전시회 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첫 번째 전시회가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주관했던 두바이 한국물산전시회였습니다. 전시회를 통해 1990년에 중동 바이어들과 첫 거래가 이뤄지면서 10~20달러짜리 시계부터 팔기 시작했죠. 당시 중국이나 러시아(구소련) 사람들도 두바이에 와서 물건을 사갔어요. 그 덕에 로만손 시계가 러시아에도 알려지고 중동 여러 나라에서 수입 요청이 들어오게 됐어요.”
중동이나 구소련, 홍콩까지 여러 국가로 수출을 했는데 한국적 디자인이 통했습니까.
“저희 디자인은 당시 그야말로 톡톡 튀었습니다. 수출하는 국가의 지역적 특성을 살려 디자인을 개발한 것이 주효했는데, 예를 들면 중동은 큐빅을 박아 화려한 시계를 많이 수출했어요. 러시아 쪽은 도금한 제품들이 인기가 높았어요. 당시에 로만손이 세계 최초로 IPG 도금 방식을 개발하는가 하면 보석처럼 보이도록 유리를 세공하는 커팅 글라스 등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국내 예물시계 브랜드들과는 전혀 다른 콘셉트였죠. 사실 시계회사들이 초기에는 주문자생산방식(OEM)을 많이 하게 마련인데 저희들은 자사 브랜드를 고집했기 때문에 브랜딩과 마케팅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로만손 시계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평가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초반 10년간은 한국 브랜드 같지 않은 새로운 디자인으로 선호도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수입 개방 이후 한국 소비자들이 외국 브랜드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저하됐죠. 시간이 지날수록 올드한 느낌도 배제할 수 없었고요. 로만손은 인지도는 높은데 국내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낮은 브랜드였죠. 그래서 올해부터 브랜드 리프레싱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국내 마케팅 비용을 늘이면서 아트락스 등 중·고가 시계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죠. 한국 대표 브랜드라는 자부심, 해외 브랜드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실제 아트락스 모델의 경우 지난해 바젤월드 대표 모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이어들에게 호평을 많이 받았던 제품이죠.”
시계에서 주얼리, 지금은 가방까지 사업 분야가 점차로 확대됐습니다. 기업의 청사진을 확고하게 마련했던 시점은 언제였습니까.
“10년 전쯤이었어요. 로만손 시계가 정체기를 겪을 때였거든요. 이런 상태로는 발전은커녕 회사의 존속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로만손의 비전을 펼칠 새로운 사업을 찾기 시작했죠. 당시 임원으로 신규사업개발본부장을 맡았는데, 그 첫 사업이 바로 제이에스티나입니다. 주얼리의 정밀성, 세팅 기술 등은 시계와 연관이 있기도 했고요. 특성 있고 차별화된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실존 인물인 이탈리아 조반나 에스티나 공주를 뮤즈로 공주 콘셉트의 주얼리를 기획했어요. 1년 이상 준비했는데 이탈리아도 가고 에스티나 공주의 삶을 연구해 스토리텔링의 콘셉트를 만들었죠.”
그 제이에스티나가 한마디로 ‘대박’이 났었죠.
“에스티나 공주의 생애를 만들어 마케팅했던 이유는 국내외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콘셉트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론칭하자마자 국내 스타들이 앞 다퉈 제이에스티나를 착용하기 시작했어요. 제이에스티나는 에스티나 공주의 공주 시절을 담은 주얼리로 액세서리 주얼리와 파인 주얼리의 중간 시장을 겨냥했는데, ‘브리지 주얼리’라는 말도 저희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예요. 소재는 파인 주얼리이고 스타일은 패셔너블한 보석을 지칭하는 말이죠. 지난해 소개한 제이에스티나 백 라인은 브랜드의 성장 2단계를 위한 확장의 의미를 띠죠.”
미국 진출의 첫 단추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끼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2년 정도 뉴욕을 오갔어요. 5번가에도 가보고 소호도 자세히 살폈죠. 소호로 거의 결정이 날 때쯤 플라자호텔 관계자를 만나게 됐어요. 뉴욕의 랜드마크 호텔이라 입점하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플라자호텔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꾸준히 접촉하며 노력을 했죠.”
플라자호텔 매장에서는 8만5000달러짜리 보석도 판매했다고 들었습니다. 고가 전략인가요.
“럭셔리 호텔에 맞게 100% 주문 제작 상품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제품들도 있습니다. 8만5000달러짜리 주얼리는 한 세트가 판매됐는데 생각보다 백도 잘 팔립니다. 향후에는 미국 셀레브리티를 활용한 스타 마케팅을 계획 중입니다. 뉴욕 매장 이후부터는 전 세계 면세점으로 진출할 예정입니다. 그때 뉴욕 플라자호텔에 입점한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뒷받침되겠죠. 로스앤젤레스(LA), 자카르타, 홍콩, 유럽의 거점공항 면세점에 제이에스티나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지닌 단독 매장을 오픈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글로벌 토털 패션 브랜드를 꿈꾼다
현재 로만손의 연매출 규모, 로만손 시계부문 매출, 제이에스티나 매출은 각각 어떻게 됩니까.
“현재 매출 구성은 시계부문이 30%, 제이에스티나가 70% 정도를 차지하는데, 올해 매출 목표액은 1300억 원 정도입니다. 시계는 성장 속도가 완만한 편이었지만 주얼리는 급성장 곡선을 그려왔어요. 한때는 연 20~30%까지 성장했다가 현재는 연 8~10%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이에스티나는 소녀시대, 김연아 등 빅 스타들을 활용한 스타 마케팅도 적극적이었죠.
“이상하게 출시부터 연예인들이 좋아했어요. 제품을 본인들이 구매해서 착용해줬어요. 하나도 거저 준 적이 없었습니다.(웃음) 제이에스티나의 최초 공식 모델은 김연아 선수인데, 그것도 참 우연이었어요. 5년 전에 스태프 회의를 하는데 김연아 선수가 우리 제품의 카피 제품을 착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때 김 선수가 고등학생이었죠. 그럼 하나 보내주라고 했는데, 그 이후에 관계사를 통해 모델 계약을 하게 됐어요. 김 선수가 동계올림픽(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매달을 땄을 때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습니다.(웃음) 올림픽 임팩트가 대단했죠. NHK, 아사히 등 일본 언론에서 취재까지 왔었어요. 참 희한한 것이 박태환 선수가 로만손 시계를 차줬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우연히 박 선수를 만나 시계를 선물할 기회가 생겼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께도 선물하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지난해 연말 유엔이 전 세계 언론인들을 불러 개최하는 파티의 스폰서가 되면서 반 총장께 정말로 로만손 시계를 선물했지 뭡니까. 하하.”
로만손의 향후 비전을 어떻게 그리고 계신가요.
“로만손에 이어 제이에스티나를 론칭하면서 회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고 생각합니다. 회사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주가인데 로만손 주가가 연초보다 현재 더블로 올랐습니다.(웃음) 그동안 회사가 저평가됐던 것이 회복세를 띠고 있는 것이죠.”
어느 인터뷰에서 ‘티파니’를 뛰어넘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제이에스티나의 궁극적 목표라고 하셨는데, 티파니에 비해 현재 제이에스티나가 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요.
“비즈니스마다 선의의 경쟁자를 둡니다. 론칭 후 몇 년 내에 같은 제품군 내의 선의의 경쟁자였던 스와로브스키를 뛰어넘었습니다. 이제는 제2의 선의의 경쟁자가 필요할 때죠. 그래서 ‘티파니’를 연구했어요. 지금 제가 이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이에스티나가 현재 톱으로 올라갈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지금의 티파니가 지난 시간 쌓은 이미지로 브랜드 가치를 만드는 것처럼 제이에스티나도 충분히 티파니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만손을 토털 패션 브랜드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음 도전할 분야가 있다면요.
“제이에스티나 백 라인이 안정기에 들어서면 코스메틱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현재 그리고 있는 그림이 완성되면 론칭할 계획입니다. 일단 다음 아이템이 화장품으로 확정했으니 밑그림을 그리고, 다음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그것이 완성되면 전략을 고민해야겠죠.”
성공 경영의 저력, 기업 경영에 있어 롤모델 혹은 멘토가 되신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 나름대로 해 나가는 타입입니다. 롤모델이나 멘토 대신 책, 매체, 정보를 활용하는 편입니다.”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