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빅토리아 히슬롭의 ‘섬’이라는 소설을 보면, 나병에 걸린 엄마와 딸이 지중해의 작은 섬 스피나롱가에 유폐돼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 섬에는 모두가 기피하는 나병을 치료하겠다는 집념을 가진 두 명의 의사도 있다. 엄마는 결국 나병으로 인해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지만, 엄마가 죽은 한참 뒤 결혼하기 직전에 나병에 걸려 섬으로 들어가게 된 딸은 나병을 치료하고 말겠다는 두 의사의 집념과 나병환자들의 삶에 대한 욕망이 어우러져 생명을 얻게 된다. 그들의 불굴의 정신이 살아서 섬을 떠나겠다는 꿈을 이뤄낸 것이다.
‘섬’보다 약 280년 이전에 나온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는 스트롤드부르그라는 불멸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불멸의 인간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은 “모든 아기들이 불멸의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이 나라는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외치며, 그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그러나 주인공이 만난 불멸의 인간은 그의 부풀어 오른 희망만큼이나 큰 실망스런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불멸의 인간이 보여주고 있는 실망스런 모습을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이 가장 심하게 시기하는 것은 젊음과 죽음이다. 젊은이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자기들은 그러한 모든 종류의 쾌락으로부터 제외돼 있다는 데 분노를 느끼고, 또 장례식을 볼 때마다 자기들은 희망조차 품을 수도 없는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비탄에 빠진다. 그들은 젊은 시절과 중년기에 배우고 경험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한다 해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어떠한 일의 진실이나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그들의 기억보다 차라리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래 사는 데 따르는 위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불멸의 인간 이야기는 허구이긴 하지만 오래 사는 것의 위험성을 생각하게끔 한다. ‘섬’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생물체의 본능일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 역시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소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발을 무덤에 넣은 사람도 나머지 한쪽 발을 무덤에 넣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나이가 많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도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를 바라고 죽음이 찾아올까 봐 노심초사한다”고 말한다. 그 노심초사의 결과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불멸의 인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섬’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눈부신 의학기술의 발달 덕택에 그토록 희구하던 오래 사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인류의 오랜 꿈이 실현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의 실현과 관련된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고 있다. 비록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불멸의 인간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고령화 비용’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고령화 비용’을 경고하고 나섰다. IMF는 수명이 예상보다 3년 더 늘어나게 되면 공공부문에서 더 채워야 하는 자금이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에서 2분의 1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면서 IMF는 “수명 연장의 위험이 국가유동성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은 많은 국가에서 매우 심각하다. 사적 영역이 고령화의 예상 효과를 잘못 전망해 발생한 고령화의 경제적 부담은 공공영역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경고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명 연장에 따라 추가로 발생할 수 있는 은퇴 자금이 향후 40년간 20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IMF의 예상대로 이 비용을 국가에서 떠안게 되면 우리나라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이 현재의 33%에서 80% 이상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령화 비용은 오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잠재적 부채라 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향해 질주하는 수명의 증가 속도를 감안하면 IMF의 경고를 허투루 들을 수 없다. 잠재적 부채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 중지를 모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막대한 잠재적 부채를 한방에 해결하고자 하거나 뒤로 미루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감가상각을 하듯 잠재적 부채를 조금씩 줄여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잠재적 부채에 대비하는 금융기관의 논리를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금융기관에서는 잠재적 금융부채를 상각하기 위해 충당금을 쌓는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부채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 충당금을 더 쌓는다. 정부에서는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제고한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것을 법률로 명문화하기도 한다. 고령화 비용 역시 마찬가지다. 매년 조금씩 충당금을 쌓아가며 상각해야 한다.
고령화 비용은 국가와 개인이 함께 준비해야
이처럼 해결책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하다. 고령화 비용이 국민의 수명 연장에 따른 결과라고 해서 국민에게만 맡겨놓아선 안 된다. 정부도 함께 나서야 한다.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고령화 비용이라는 잠재적 부채가 점점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의 복지 확대 정책을 생각하면 고령화 비용이 국가의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고령화 비용이라는 잠재적 부채를 국가에서 모두 감당하고자 하다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너무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어린 우리의 후손들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위험과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고령화 비용의 사회화와 개인화를 동시에 추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고령화 비용의 사회화란 그 부담을 국가에서 책임지는 것을, 개인화란 그 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국민 개개인이 미리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의지다. 국민은 노후 준비와 관련한 자조 노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정부는 금융기관의 충당금 쌓기를 제도화하듯이 국민의 자조 노력 의욕을 더욱 더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연금세제를 비롯한 제반 정책들을 더 매력적인 방향으로 정비해야 한다.
세제 혜택을 세수 감소라는 단기적인 재정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세제 혜택은 비용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 부채에 대비해 미리 쌓는 충당금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정부에서는 사적 연금의 세제 개선을 위한 작업반을 운영하고 있다. 세제 혜택과 관련한 논의의 방향이 세수 감소가 아니라 충당금을 쌓는다는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월드컵 4강은 결코 운이 좋아서 된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차근차근 준비한 결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장수 사회를 위해선 고령화 비용의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야 한다. 여기에는 민·관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의 밝은 앞날을 위해, 국민은 사랑스런 자녀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정부는 세수라는 욕심을, 국민은 현재의 소비 만족이라는 욕망을 조금씩 양보할 때 고령화 비용이라는 파고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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