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데는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사건에서 기인한다. 바로 백년전쟁이다.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 사이 무려 116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이다. 물론 이 기간 내내 전투가 벌어졌던 것은 아니고, 각국의 국내 상황에 따라 휴전과 개전을 반복했다. 100년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벌어진 전쟁이므로 전쟁 이전과 이후의 사회는 크게 달라졌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두 국가 모두 중세 봉건국가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정복왕 윌리엄의 이중적 지위
백년전쟁이 일어난 중세 말 두 국가의 인구를 비교해보면 영국은 약 500만 명, 프랑스는 2000만여 명으로, 사실상 국가 간 경쟁은 별로 의미가 없을 정도로 프랑스가 우세했다. 그런데 어떻게 두 국가가 전쟁을 하게 됐고, 이 전쟁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와인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먼저 당시의 프랑스 사정을 살펴보자. 10세기에 지금의 노르웨이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내려온 바이킹족들은 프랑스를 침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맹한 바이킹족이라 하더라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국가인 프랑스를 단번에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도 용맹한 바이킹족의 침공을 완전히 물리치기에는 벅차, 노르망디 지방을 바이킹에게 내주는 조건으로 전쟁은 마무리됐다.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족은 약 100년간 프랑스 말을 익히고, 고급문화를 체득한 뒤 파리 대신 영국 런던으로 창날을 겨누고 버킹검궁을 점령하게 된다. 그가 바로 저 유명한 ‘정복왕 윌리엄’이다. 1066년 헤이스팅 전투에서 영국군을 물리친 윌리엄은 영국 왕위에 오른다. 이때 많은 노르망디 사람들이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이를 계기로 프랑스어는 귀족의 언어, 영어는 평민의 언어가 된다. 본래 노르망디의 영주인 정복왕 윌리엄은 이로써 두 개의 신분을 동시에 가지게 됐다. 프랑스 왕이 다스리는 프랑스 영토 내에 자신의 영토가 있으므로 프랑스 내의 영토를 기준으로 보자면 영국의 왕 윌리엄은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는 셈이었다.
12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앙주 출신의 헨리 2세(1154~ 1189)가 건설한 ‘앙주제국’은 그 영토가 스코틀랜드 남단에서부터 피레네산맥의 북쪽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헨리 2세가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지방을 봉토로 차지하게 된 것은 영국의 왕이 되기 이전에 아키텐의 공주 알리에노르가 결혼 지참물로 자신의 봉토였던 아키텐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다른 나라의 신하가 되는 이런 기묘한 관계는 결국 백년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두 나라가 빠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영국 왕에 진상된 보르도 와인
1328년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자라고 주장한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를 손봐주기로 작정하고, 프랑스 내에 봉토를 가지고 있는 모든 영주들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한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문서상의 서약만 했는데,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군사상의 봉사가 담겨 있지 않은 1337년 가스코뉴 공작령을 몰수하게 되고, 이에 반발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됐다.
사실 보르도 지방은 앙주제국이 건설된 12세기 중반부터 백년전쟁이 끝난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내내 영국령이었다. 그로 인해 이 지방의 특산물인 와인은 프랑스 왕이 아니라 영국 왕에게 올리는 진상품이 됐다. 보르도 와인은 영국 입장에서 보면 영국 내 물품이므로 당연히 관세 없이 영국으로 반입됐지만, 보르도 바로 북쪽의 코냑 지방이나 남쪽의 알마냑 지방은 비슷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관세 장벽 때문에 수출되지 못하고 엄청난 재고가 쌓이게 된다.
재고 처리에 고심하던 코냑 지방 와인업자들은 이를 증류하기에 이른다. 더 이상 와인을 보관할 창고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저장시설이 없어 무언가 대책을 내놓아야만 했다. 증류한 코냑 와인은 뜻밖에 아주 훌륭한 브랜디가 돼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알마냑 역시 코냑과 같은 과정을 겪게 된다.
프랑스인들보다 영국인들에게 더 많이 사랑받았던 보르도 와인은 그 영롱한 색깔 때문에 ‘클래레(clairet)’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당시 영국에는 차(tea)나 커피가 수입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보르도 와인의 인기는 대단했다.
첩보 영화 ‘007’시리즈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의심스러운 레스토랑 종업원을 시험해보기 위해 ‘클래레’를 주문한다. 프랑스에서 와인을 취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클래레가 보르도 레드 와인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프랑스인이 아니라 스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와인을 모르는 구소련의 스파이는 “우리 집에는 클래레가 없다”는 말을 했다가 본드의 총에 희생되고 만다. 영국의 세계 정복과 함께 한 보르도 와인
백년전쟁 중 세 번의 큰 전투에서 참패한 프랑스는 막판에 잔다르크의 출현으로 역전승을 거두며 프랑스 땅에서 영국 군대를 몰아낸다. 영국은 그 이후 백년전쟁의 패전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30년 장미전쟁을 벌이게 되고, 왕조도 바뀌게 된다. 이후 영국은 잃어버린 프랑스 내의 영토 대신 대서양으로 눈을 돌려 결국 세계를 식민지로 삼아 해가 지지 않는 영광된 시절을 맞이한다. 백년전쟁에서 승리해 프랑스 내의 영토에 만족했다면 아마도 세계 역사는 이토록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왜 가장 비싼 와인이 나오는 부르고뉴가 와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보르도가 와인을 지배하게 됐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백년전쟁이 끝난 이후 영국인들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와인에 눈길을 주기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보르도 와인을 찾았다. 그들이 세계정복을 하는 길에는 어김없이 보르도 와인이 뒤따랐고 이를 통해 보르도 와인은 전 세계 와인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됐다.
보르도 와인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사례는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선박의 배수톤 측정에 활용하게 된 것이다. 보르도 와인의 영향으로 지롱드 강은 와인 수출항으로 자리 잡았다. 보르도 항에서는 주로 영국 배로 와인을 실어 날랐는데 이때 와인 선적 단위는 225리터짜리 오크통 4개 분량의 900리터짜리 토노(tonneau)라는 단위가 사용됐다. 토노는 이후 선박들의 국제적 상품량을 측정하는 배수톤의 단위가 됐다.
백년전쟁과 그 이후 영국의 식민정책에 따라 보르도 와인은 세계 와인의 표준이며, 중심점이 되는 역할을 맡게 됐고, 현재 쓰이는 선박의 배수톤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김재현 하나금융그룹 WM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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