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시리즈 작가 최준근
최준근은 2008년 돌 시리즈를 선보이며 화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그의 작품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미술대학 졸업 후 생계를 위해 10여 간 미술학원을 운영하기도 한, 사연 많은 작가 최준근을 만났다. 최준근 작가의 작업실은 서울 홍익대 부근에 있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바탕의 대형 캔버스 10여 개가 눈에 들어왔다. 작업실 안쪽에서 작업을 하던 최 작가는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자를 맞았다.그는 최근 작품을 보내달라는 곳이 있어 한창 준비 중이라고 했다. 5월 경주에서 있을 3인전 작품도 준비해야 하고, 중국 화랑에서 요구한 작품도 서둘러야 한다. 한꺼번에 여러 장의 밑작업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밑작업이라고는 하지만 작업 자체가 상당히 정교함을 요한다. 나이프로 서너 번 정도 바탕을 칠한 뒤 사포로 바닥을 다듬는다. 그 위에 10여 번 젯소(초벌제)를 칠해야 비로소 ‘돌이 놓일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제주도 바닷가에서 시작된 돌 시리즈
“돌 시리즈로 전시를 한 게 2008년이니까, 이제 4년 됐네요. 그전에는 나무도 그리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돌 시리즈를 하고 제 작품을 찾았다고 할까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돌은 엄밀히 말하면 현무암, 그것도 제주도 현무암이다. 그는 제주 여행길에서 우연히 제주도 현무암을 만났다. 벌써 5, 6년 전 이야기다. 작업실을 차리고 전업 작가로 나섰지만 자기만의 그림을 찾지 못해 세상을 주유(周遊)하던 시절. 그는 제주도에 사는 친구를 찾았다. 섬을 여행하던 길, 차창 밖으로 해변가에 놓인 현무암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물기를 머금으면서 돌의 색깔은 더 검어졌다. 차에서 내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바닷물이 덜 빠진 상태라 수면 위로 돌만 둥둥 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특별한 느낌에 자연 카메라에 손이 갔다.
그때만 해도 그걸 그릴 생각까지는 없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작업실에 있는데 불현듯 그때 모습이 떠올랐다. 때마침 붓글씨 연습을 하던 때라, 들고 있던 붓으로 몇 점 찍어보았다. 몇 번 덧칠을 했더니 더 그럴듯해 보였다. 돌 작업의 미약한 시작이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돌이 있는 해안가 풍경’ 정도. 그렇게 제목을 달고 나니 지나치게 구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그의 작품이 구상보다는 오히려 추상화에 가깝다는 점이다. 구상에서 출발한 추상, 결국 그 경계 어디쯤에 그의 작품을 세울 수 있을 듯하다.
“먹 대신 유화로도 작업해보고, 색도 써봤지만 그 맛이 안 났어요. 그런데 색보다 더 중요한 건 돌의 개수와 위치예요. 전체적인 구도에 따라 그림의 느낌이 전혀 다르게 나오거든요. 그런 게 이 작업의 매력인 거 같습니다.” 미대생이 한 사람의 작가로 서기까지
그렇게 시작한 돌 작품으로 그는 2008년과 2011년 두 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특히 그는 첫 번째 전시를 잊을 수가 없다. 전시를 보고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사갔기 때문이다. 그 전시는 북촌 외이방 갤러리에서 가진 전시였다. 그의 작품을 본 한 외국인이 관심을 보이며 갤러리를 통해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해 11월 그 컬렉터가 그림을 더 보고 싶다며 작업실을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그 컬렉터가 그림을 사간 것이다. 그는 난생 처음‘이 맛에 그림을 그리는구나’ 싶었단다.
“대학 때 꿈이 이뤄지는 듯했어요. 사실 많은 미대생들이 대학 다닐 때는 졸업하면 그림 팔아서 먹고 살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저만 해도 1991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이 훨씬 지나 제 그림을 찾았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그가 작가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대학 졸업 후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홍익대 서양학과 84학번인 그는 대학 졸업 후 작가의 꿈을 안고 작업실을 마련했다. 말이 작업실이지 경기도 고양시 원당 부근 우사를 개조한 허름한 창고였다. 자기 작품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절,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와 막걸리를 나누는 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학원
신통한 벌이가 없던 그에게 학원 강사 자리는 제법 쏠쏠한 제안이었다. 아르바이트로 학원에 나갔다 미대 동기들과 함께 아예 학원을 차린 게 1993년이다. 그때부터 2007년까지 그는 친구와 함께 미술학원을 경영했다. 학원생들의 진학률이 좋아 학원은 잘 됐다. 강남에서 시작해 홍익대 부근에도 학원을 차렸다. 학원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도 하고, 기획전도 몇 번 했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원도 다녔다. 그런데 생각보다 작업은 크게 나아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저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요. 점심 때쯤 학원 나와서 새벽에나 집에 들어가니까 작업할 시간이 없는 거죠. 입시 때가 되면 같이 밤도 새야 하고요. 학원을 운영하면서 개인전을 2번 정도 했는데 성에 안 찼어요. 자기 것을 찾아서 그려야 재밌는데 그게 안 되더군요.”
입시생들만큼이나 바쁜 일과와 대학에 진학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쫓기다 보면 정작 자신의 꿈을 잊기 쉽다.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15년간 하던 학원을 접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
학원을 그만두고 강남에 작업실이라고 내기는 했지만, 당장은 뭘 그려야 할지 막연했다. 소일거리삼아 시작한 게 붓글씨 연습이었다. 그게 결국은 돌 작업으로 이어졌다. 돌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 그는 작업실을 지금의 홍익대 부근으로 옮겼다.
“제주도에서 그 풍경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방황하고 있을지 모르죠.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구상에서 출발했지만 추상에 가까운 그 맛을 더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조형적으로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캔버스 앞에 서면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이 재밌고, 또 좋습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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