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백화점의 와인 코너, 대형 할인 매장의 와인 코너, 그리고 거리의 독립 와인 숍에서는 와인 장터가 한창이다. 5~6년 전쯤 시작된 와인 장터는 와인 애호가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행복한 행사가 됐다. 그러나 와인 장터 뒤에는 와인업체의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와인 제테크] 가장 아름다운 와인 장터의 모습
와인 장터는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사고 싶은 와인을 아주 싼값에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와인 애호가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와인 장터는, 그러나 와인 수입사들의 눈물겨운 희생의 대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와인 장터와 같은 행사는 초기에는 새로 출시하는 와인을 널리 알리고, 나중에 가격을 정상으로 올리더라도 그 와인을 찾아줄 거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일반적인 제품이라면 그런 마케팅적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와인은 다른 제품들과 달랐다. 와인 장터에서 싸게 구입한 와인은 가격을 환원한 이후 웬만해서는 매출로 연결되지 않았다.



눈물의 고별 세일로 전락한 와인 장터

와인 장터를 통해 와인이 대량으로 팔리는 것을 목격한 백화점과 대형 할인 매장들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당한 시점마다 회사가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와인을 내놓는 수입사들이 생긴 것이다. 망해서 떨이로 와인을 처분해야 하는 수입사 대표들에게는 눈물의 세일이었지만,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이때 왕창 와인을 사두면 한동안 와인 숍을 방문하지 않아도 와인 셀러가 풍성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와인을 취급하는 네고시앙의 숫자는 400여 개로 항상 일정하다. 이와 비슷하게 대한민국의 와인 수입사들의 수도 400여 개로 일정하다. 극명한 차이점이라면 보르도의 네고시앙이 수십 년, 또는 10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며 대를 이어 와인업에 종사하는 반면, 대한민국의 와인 수입사들은 매년 수십 개의 회사가 새로 설립되고 동시에 비슷한 숫자의 회사들이 폐업한다는 사실이다.

망해서 없어지는 와인 수입사들의 재고는 이렇게 와인 장터를 통해 처리돼 왔다. 와인 장터를 기획하는 사람들과 와인 애호가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와인 장터가 열릴 때면 누군가 문을 닫고 좋은 와인을 헐값에 넘겨주곤 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 소비가 늘기는커녕 오히려 2007년을 기준으로 와인 소비 열기가 식어가면서 더 이상 망할 와인 수입사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니 팔릴 만한 새로운 와인을 발굴해서 싸게 공급해야 하는 와인 장터의 기획자들은 더 머리가 아파지고, 와인 애호가들은 듣도 보도 못한 와인 라벨을 들여다보며 고민에 빠지게 됐다. 와인 소비를 늘리기 위한 마케팅의 수단으로 시작된 와인 장터가 와인 시장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이다.
오스피스 드 본 자선병원의 운영비 마련을 위해 시작된 오스피스 드 본 와인 경매. 오스피스 드 본 와인 경매는 숭고한 뜻과 함께 지역 축제로 치러져 와인 경매의 전형을 보여준다.
오스피스 드 본 자선병원의 운영비 마련을 위해 시작된 오스피스 드 본 와인 경매. 오스피스 드 본 와인 경매는 숭고한 뜻과 함께 지역 축제로 치러져 와인 경매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선병원 운영기금 마련 위해 시작된 경매

프랑스 부르고뉴에도 매년 11월 셋째 일요일에 와인 장터가 열린다. 그런데 그 성격이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르다. 오스피스 드 본(Hospices de Beaune) 와인 경매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프랑스판 와인 장터다.

오스피스 드 본은 문자 그대로 ‘본 양로원’ 즉, ‘본이라는 마을에 있는 양로원’이라는 뜻이다. 오스피스(Hospice)라는 단어에는 양로원 이외에도 고아원, 무료 숙박소, 시료원(施療院)이라는 뜻도 있다. 오스피스 드 본 와인 경매는 본 오텔-디외(Beaune Hotel-Dieu·본 자선병원)에서 열리는데, 이 자선병원은 부르고뉴공국의 필립공(Duke Philip the Good of Burgundy: 1419~1467) 시대의 대법관 니콜라스 롤랭(Nicolas Rolin)이 영국과의 100년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의 치료를 위해 1443년 설립했다.

자선병원의 운영기금은 병원에 소속된 포도원에서 생산된 와인을 경매로 팔아 충당한다. 본 오텔-디외에 소속돼 있는 포도원은 61헥타르에 이르는데, 모두 그랑 크뤼 또는 프리미에 크뤼급이다. 병원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 경매는 1859년에 시작됐는데 그해에 생산된 189배럴의 와인이 경매를 통해 팔려나갔다. 그 후 1924년부터는 경매 날짜를 11월의 셋째 일요일로 정해 열리고 있다.

경매에 나오는 와인은 바타르-몽라셰(Batard-Montrachet), 코르통-샤를마뉴(Corton-Charlemagne), 뫼르소(Meursault) 등과 같은 특급 와인들과 유명한 와인 산지인 코트 드 뉘(Cote de Nuits)의 마지 샹베르탱(Mazis-Chambertin), 클로 드 라 로슈(Clos de la Roche) 등이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와인은 배럴 단위로 팔리기 때문에 낙찰자를 위한 극진한 서비스로 병에 붙는 라벨에 낙찰자의 이름을 넣어 준다. 예를 들면 코르통 퀴베 버락 오바마(Corton Cuvee Barack Obama), 또는 본 퀴베 니콜라스 롤랭(Beaune Cuvee Nicolas Rolin) 같은 식이다. 요즘은 이 와인 경매를 통한 수익금보다는 아름다운 본 자선병원 자체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1년에 40만 명)들의 입장 수입이 더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자선 경매는 그 수익금이 오스피스 드 본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경매에서의 낙찰 가격이 해당 와인의 가격으로 결정되는데 보통 같은 등급의 와인보다 비싸게 거래되므로 와인 생산자는 상당한 혜택을 받는 셈이다.



성삼위일체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은 와인 경매

가장 최근에 열린 오스피스 드 본의 자선 경매는 2011년 11월 20일에 개최됐는데 이번이 151번째 경매다. 이번 경매에서는 143종류의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618배럴 출품됐고, 총 540만 유로의 낙찰 수입을 올렸다. 그 전 해인 2010년에 비해 낙찰 가격은 하락했으나 출품된 와인의 수량이 많아 수입은 전년보다 증가했다. 구체적으로는 레드 와인의 가격은 전년도에 비해 6.21% 하락했고, 화이트 와인의 경우에는 12.86% 하락했다. 이 경매에서 낙찰되는 가격은 그 해의 작황을 가늠하는 좋은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2007년도부터는 크리스티에서 이 경매를 주관하고 있다. 크리스티가 경매를 주관하기 전까지는 매우 독특한 경매 방식을 사용했는데, 한 개의 양초에 불을 붙여놓고 이 양초가 다 타기 전까지를 유효 경매 시간으로 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이 꺼지는 순간에 낙찰가를 부른 사람이 낙찰받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매는 배럴 단위로 이루어지는데, 1배럴은 75cl(750ml) 12병짜리 와인 24박스에 해당한다. 낙찰받은 와인은 12개월 내지 24개월을 더 숙성시킨 후에 인도받는다. 매입하고 한참 후에 와인을 인도받는다는 점에서 보르도의 앙-프리뫼르(En-Primeur)와 유사하지만, 와인 라벨에 매입자의 이름을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실 오스피스 드 본의 와인 경매는 성삼위일체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자선 경매가 있기 하루 전인 11월 셋째 토요일에 샤토 클로 드 부조(Chateau du Clos de Vougeot)에서 부르고뉴 와인 기사단(the Confrerie des Chevaliers du Tastevin)의 미팅이 열린다. 저녁 만찬을 하면서 열리는 이 미팅에는 와인 기사단 정회원들과 그들의 초청 손님들만 입장할 수 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오후 2시 30분에는 오스피스 드 본에서 와인 경매가 열리고, 그 다음 날인 월요일에는 샤토 드 뫼르소(Chateau de Meursault)에서 라 폴레 드 뫼르소(La Paulee de Meursault)가 열린다. 이는 포도 수확을 축하하는 와인 생산업자, 보관업자 등 와인업 종사자들의 축제다. 3일간 이어지는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오스피스 드 본의 와인 경매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최근에 아시아인들의 낙찰 비율이 많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2011년 경매에서는 아시아 13%, 유럽 84%, 미국 3%의 낙찰 비율을 보이고 있다. 오스피스 드 본 와인 경매에서는 확실히 미국보다 아시아인들의 관심이 더 많은 셈이다.

이처럼 오스피스 드 본의 와인 경매와 대한민국의 와인 장터는 그 발생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와인 장터가 지금처럼 와인 대바겐세일의 성격만을 지닌다면 오래 존속될 수도 없고, 와인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수도 없다. 와인 장터는 오스피스 드 본의 와인 경매처럼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숭고한 뜻과 함께 축제로 치러져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김재현 하나은행 WM센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