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힐 SC금융지주 회장 겸 SC은행장
리처드 힐 SC은행장은 한국에서 은행업을 하며 가장 놀란 것은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갖는 엄청난 영향력이었다고 말했다.1997년, 런던발 그리스행 비행기에 한 영국인 청년이 올라탔다. 다부진 몸매에 잘 차려입은 슈트가 어울렸지만 푸른 눈은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이제 막 영국계 주류회사인 얼라이드도메크(Allied Domecq PLC)의 그리스 사업부 최고경영자(CEO)로 부임돼 가는 길이었다.
특명은 엄중했지만 현실은 난망했다. 밸런타인, 깔루아, 말리부 등 유명 위스키를 생산하는 얼라이드도메크는 세계 시장 점유율이 최상위권이었다. 그런데도 얼라이드도메크의 그리스 판매 실적은 형편없었다.
도착해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실이 엄청났다. 유통 시스템은 엉망이었고 전산망도 늘 말썽이었다. 더불어 직원들은 소소한 리베이트 정도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부패가 적잖이 퍼져 있었다. 그에게는 모두 ‘참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부패에 관련된 직원은 과감하게 퇴출시키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실적이 더 좋아질 것 같지 않았던 와인사업부는 매각했고 유통은 아예 아웃소싱해 버렸다. 정보기술(IT) 시스템을 완전히 갈아엎었고 본사 위치도 옮겨버렸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6개월 만에 이익규모가 3배로 쑥 올랐다. 일독에 빠져 살던 그는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리스의 양주 시장 판도를 바꿔놓은 이 영국 사내는 11년 후 생면부지의 나라 한국을 찾게 된다. 리처드 힐(Richard Hill) SC금융지주 회장 겸 SC은행장(47)의 이야기다. 노는 것을 싫어하는 청년
힐 행장은 ‘직업이 CEO’다. 본인이 회사를 키운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것도 아닌데 32세 이후 쭉 글로벌 기업의 ‘C-레벨(경영진 레벨)’에 머물렀다. 그의 인생사는 평균적인 한국인들에 비해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17세에 엑세터대에 진학해 20세에 졸업했고, 졸업 후엔 전공과 아무 관련 없는 주류회사에 취업해 2년 만에 이사회 참석 멤버가 됐다. 또 10년 후엔 CEO로 승진했다.
대학 진학과 사회 진출 시기가 빠른 영국식 학제 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워커홀릭 기질’을 빼고 이를 설명하긴 힘들다. 힐 행장은 “나는 놀기 싫어하는 청년이었다”고 했다. “하루라도 뭔가 내가 이것을 성취했다는 보람찬 느낌이 없으면 잠이 오질 않았어요.”
힐 행장은 스톤헨지가 있는 영국 솔즈베리 인근 윌튼 출신이다. 중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0세에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일찍 철이 들었다. 14세에는 기숙사 방장을 했고 17세엔 학생회장을 맡았다. 리더십을 일찌감치 키운 셈이다. 영국 대학시절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수준급의 럭비 선수였고, 크리켓을 즐겼으며 아스날FC 팀의 광팬으로 축구도 사랑했다. 연극을 한 적도 있고 도서관의 사서 노릇도 했다. 노래를 잘해 합창단의 솔로이스트를 맡은 경험도 있다. 바쁜 게 좋아서 오케스트라 두 곳에서 동시에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는 지경에 이르면 좀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다.
전공은 다소 엉뚱한 물리학이었다. 엑스레이 등을 다루는 의료 물리학을 추가로 전공했다. 그러나 전공에 큰 애착은 없었다. “사람들하고 어울리길 좋아해서 비즈니스 쪽으로 진로를 바꿨고, 그래서 취직한 곳이 얼라이드도메크였습니다.”
주류회사서 얻은 교훈, 은행업에 녹이다
주류회사 말단 영업사원에게 현실이 녹록지 않기는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에 영국 북부지방에 술을 팔러 갔더니 한 상점 주인이 잠깐 들어오라며 안 팔리고 쌓여 있는 우리 회사 술 궤짝을 쫙 보여줬다”고 했다. 그는 그때 ‘고객이 원하지 않는 것을 팔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했단다. 하지만 말단사원이 마음대로 회사 유통체계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얼라이드도메크는 아주 큰 글로벌 회사였고 일선에선 고객이 아니라 공급자의 입장만 강조하는 관료주의가 팽배해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3년 차에 와인 비즈니스를 위해 이탈리아 판매법인으로 발령이 난 것은 그에게 기회였다. 22세에 이사회 멤버가 된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운에 가까웠다. “이탈리아에 갔는데 마침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본사 출신으로 현지에 거주하는 직원이 나 하나뿐이어서 자연스레 이사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기회를 그는 흘려보내지 않았고 그 덕분에 8년 후 그리스사업부 CEO가 될 수 있었다.
힐 행장은 “지금 하고 있는 은행업과 포도 농업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돈과 포도가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싶지만 나름의 논리가 있다. “포도 농사는 이런 겁니다. 어느 날 아침 뉴질랜드의 우리 회사 포도 농장에 서리가 내려서 갑자기 수확량이 25% 감소하겠다는 전화가 옵니다. 곧이어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포도에 파리가 옮기는 병이 생겨서 농사를 망쳤다고 연락이 와요. 이런 식으로 매일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겼다고 아우성입니다. 해법이 안 보일 때가 대부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어떤 사태가 오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포도 경작지를 분산하는 것입니다. 이는 은행도 마찬가지고요.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고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되 문제가 터지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놓아야 한다는 것을 이때 배웠습니다.”
그는 그리스 법인 정상화 실적을 발판으로 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겸임하는 자리에 올랐다. 2002년 7월엔 이 회사의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성공시켰다. 승승장구했지만 2005년 세계 2위 얼라이드도메크가 3위 퍼노드리카드(Pernod Ricard) 사에 인수됐을 때 회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2006년 영국계 금융회사 SC로 이직했다. 와인에서 금융이라니 쉽지 않은 전환이지만 그는 “주류사업을 할 때 경영자들이 은행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재무적으로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초반엔 싱가포르 등에서 근무한 뒤 2008년 한국SC의 CFO로 옮겼다. “한국은 전통과 혁신 공존하는 흥미로운 나라”
힐 행장은 1988년 23세에 결혼한 아내 수전와 세 아들 래비(18), 조지(16), 잭(14)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 그의 집무실엔 아내의 초상화가 한가운데 걸려 있다.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팔불출’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애들이 저를 닮아서인지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것 같다”고 했다. “첫째 래비는 지금 시드니의 예술대학을 다니고 있고, 둘째는 록스타가 꿈이고, 셋째는 8세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애들을 키우려면 오랫동안 일해야 할 것 같다”며 그는 웃었다.
그는 “학창시절 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 극장이나 런던 코벤트가든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를 부르는 꿈을 비밀스레 가진 적도 있다”고 할 만큼 음악을 좋아한다. 2010년 4월 SC은행의 노래경연대회 ‘리스크 아이돌’이 열렸는데 힐 행장은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한국어로 불러 직원들의 큰 호응을 받기도 했다.
한국은 미지의 나라였지만 지금 그는 “100% 만족한다”는 입장이다. 그와 아내의 한국어 실력은 수준급이다. 힐 행장의 한국어 실력은 지난 1월 11일 SC제일은행을 SC은행으로 바꾸는 행사에서 10여 분간 한국어로 연설을 할 정도다. 그래도 “연습할 시간이 많은 아내가 훨씬 더 잘 한다”고 한다.
“한국은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기회를 포착하는 다이내믹한 나라입니다. 또 항상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가지 힘, 곧 전통과 혁신이 함께 가는 나라라고 생각됩니다. 상하관계가 명확하다거나 긴 역사를 가진 언어는 전통적이지만, 신기술에 열려 있고 과학이 빠르게 발전합니다. 무척 흥미롭습니다.” “세계 70개국 네트워크로 한국 경제 기여”
SC행장으로서 그가 보는 한국 금융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한국에서 은행업을 하며 놀란 것은 우리 고객들, 특히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갖는 엄청난 영향력이었다”며 “한국 제조업이 성공을 거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금융산업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게 그의 평이다. 힐 행장은 “한 국가의 경제가 성공하려면 은행에서 수익이 나야 하는데 한국의 은행들은 자산 대비 수익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익을 높여야 한국의 은행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그것이 결국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리라는 논리를 폈다. 이익을 외국으로 빼간다는 고배당 논란에 대해서도 “SC 본사가 그간 한국에 4조 원이 넘게 투자했는데 작년에 2000억 원을 배당했다”며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고 답했다.
수시로 SC은행의 ‘철수설’이 제기되는 데 대한 그의 변은 항상 똑같다. “SC는 한국에 반드시 장기적으로 머물며 우리의 가치 ‘이곳에서 영원히(here for good)’를 실현할 것이다”가 그 답이다. 힐 행장은 특히 “글로벌한 특성을 제외하고 SC를 생각한다면 그저 ‘중간 규모의 은행’에 불과하지만 글로벌한 측면을 고려한다면 SC는 한국 최고의 은행”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미국, 유럽 대신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신흥국에 강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STX중공업의 이라크 발전소 프로젝트가 SC아랍에미리트로부터 3억8400만 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세계 70개국 SC그룹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교량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소매금융 부문에서도 다양한 고객 서비스를 선보이겠다고 약속했다. “작년 12월 서울 강남과 종로에 스마트뱅킹센터 두 곳을 열었습니다. 올 2월에는 아이패드뱅킹을 시작했죠. 한 명의 고객에게 전담상담전문가(PB)와 투자컨설턴트(IA)를 동시에 배정해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듀얼 케어 서비스’도 우리의 자랑입니다. 저녁에 문을 열거나 주말에 문을 여는 은행도 검토해 볼 예정입니다.”
힐 행장의 삶의 모토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다. 그는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뭔가를 배우지 않으면 답답해하는 것이 나 자신”이라고 했다.
글 이상은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selee@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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