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디자인 오디세이
‘주름치마를 아시나요?’무슨 방송사 퀴즈 프로그램 문제 같지만 주름치마는 사실 1970년대 우리네 아낙들이 즐겨 입던 실용적 서민 옷의 대명사다. 그때는 너나없이 옷감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어쩌다가 명동에 나가면 멋쟁이 원피스와 화려한 투피스의 눈부신 자태에 눈길을 빼앗겼다. 그래도 주름치마만큼 실용적인 원단도 흔치 않았다. 이제 주름치마는 양장 기성복에 떠밀려 세월의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져 잊힌 그때 그 시절의 정겨운 유산이 됐다.어머니 장롱 속에나 쳐 박혀 있어야 할 법한 주름옷이 다시 세상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플리츠 플리즈 이세이 미야케(Pleats Please Issey Miyake) 컬렉션이 그것이다. 플리츠 플리즈는 과학 기술을 이용해 30톤의 롤러 압력으로 폴리에스테르 원단에 주름을 잡아 가공한 직선의 아름다움을 의상에 접목한 것이다. 플리츠 플리즈는 가볍고 구김이 없어 활동성이 높고, 주름진 조형성을 인체에 적용해 매우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의상이다. 누가 입어도 몸매가 드러나지 않고 외형이 갖는 탁월한 미감은 보다 유연하고 수려한 자태의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플리츠 플리즈
이세이 미야케는 일본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三宅一生·1938~)가 론칭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다. 플리츠는 주름이라는 뜻으로 글자 그대로 주름옷이다. 일본 무사의 갑옷과 여인들의 기모노에서 모티브를 차용하고, 일본 전통 오징어잡이 종이등과 신사(神社)의 종이접기에서 유래를 읽을 수 있는 플리츠 플리즈는 패션 세상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작고한 정보기술(IT)의 천재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단상에 올라 둥근 안경과 청바지에 검정 터틀넥 티셔츠를 입고 손 안에 아이폰을 들고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그때 입은 검정 터틀넥도 알고 보면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한 옷이다.
잡스는 생전 저택의 옷장에 이세이 미야케의 옷을 수백 벌 두고 번갈아 입었다고 한다. 그가 이세이 미야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만 해도 잘나가던 전자기업인 소니를 방문했던 잡스는 소니의 직원 유니폼을 인상적으로 보았다. 소니의 직원 유니폼을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도 애플의 직원 유니폼을 이세이 미야케에게 의뢰했다. 애플 유니폼은 직원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됐지만 잡스와 이세이 미야케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잡스는 일상의 편리함과 자신의 특징적 스타일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세이 미야케에게 자신의 유니폼격인 검정 터틀넥 몇 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이세이 미야케는 한꺼번에 무려 100여 벌의 터틀넥을 보내왔다. 잡스가 이세이 미야케에게 반한 것은 그의 혁신적인 디자인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디자인이 단순함을 추구하는 애플 디자인 철학과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세이 미야케의 옷은 잡스의 일화뿐 아니라 우리들 일상에서도 흔히 마주한다. 중년의 점잖은 여인들이 해외여행을 가면 가방 속에 서너 벌의 플리츠 플리즈를 반드시 들고 다닌다. 여행지에 도착해 가방에서 꺼내 입어도 금세 옷장에서 꺼내 입은 것처럼 산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플리츠 플리즈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소중하게 간직하려 한다기보다 편하고 실용적이기 때문에 선호한다.
플리츠 플리즈는 색깔이 고급스럽고 실루엣이 우아하며 현대적인 세련미도 겸비한 옷이다. 여기에 가볍고 원단 복원력이 탁월해 접었다 입어도 금방 다림질해 입은 것처럼 말짱하니 그야말로 실용 그 자체다. 플리츠 플리즈는 옷의 실용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추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감을 선보였는데, 그 이면에는 일본의 독특한 문화를 옷에 담으려는 이세이 미야케의 노력과 천재성이 숨어 있다. 세상과의 조우
이세이 미야케는 1938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다마(多摩) 미술대학 재학 중 1963년 제1회 컬렉션 ‘천과 동의 시’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돼 패션계에 입문했다. 1965년 2회 컬렉션을 열고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오트 쿠튀르 조합 양재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했고, 1966년 기라로시의 보조 디자이너로 있다가 1968년에는 지방시 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세이 미야케는 젊은 패션디자이너의 해외 유학이라는 평범함 속에 있었다. 유럽 패션을 어느 정도 익히자 세계 문화의 중심 뉴욕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뉴욕은 팝아트의 열기로 세상이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고 실험예술의 보고였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윌리엄 드 쿠닝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 사이에 이세이 미야케는 발을 디뎠다. 1969년 뉴욕 제프리 빈의 기성복을 디자인했으며, 1971년에는 뉴욕에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했고, 뉴욕 블루밍 데일 백화점에 이세이 미야케 코너를 개설했다. 뉴욕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73년 파리로 진출해 제1회 미야케 이세이 가을·겨울 컬렉션을 발표했다. 1976년의 도쿄 시부야 파르코의 세이부 극장에서 ‘미야케 이세이와 12인의 흑인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코스튬 쇼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그의 나이 38세에 그는 세상과의 조우를 통해 화려한 무대를 두루 섭렵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한 층 한 층 구축하면서 브랜드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는 고국 일본에서 가장 큰 관객 동원력을 가진 디자이너로 평가받으며 “미야케 이세이가 표현한 의상은 움직이는 조각이다. 그의 옷 안에서 여성은 오브제가 되고 있다”라는 평을 받는다.
그는 패션 정보를 얻는 것을 거부하고 천과 육체와의 교감이라는 관점에서 복식 조형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상품 진열이나 포장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전통 일본식 디자인과 아프리카 타입의 직물과 형태를 결합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네 생각으로는 아프리카는 멀게만 느껴진다. 원시 미술의 한 형태로, 피카소의 그림 소재로 등장하는 것쯤 치부하는 멀고 먼 문화다.
하지만 이세이 미야케는 파리 시절에 접했던 아프리카의 독특한 문화와 미감을 과감하게 자신의 디자인에 접목시켰고, 모델도 아프리카 흑인 모델을 선정해 자신의 디자인을 입혔다. 아프리카는 자주 보거나 접하지 못했을 따름이지 나름 그 속에 진정성과 새로움이 곁들여진 미감이다. 어쩌면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한 장으로 감싼 헐렁한 의상에서 기모노의 평면 재단을 연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직물과 볼륨에 대한 독창적·감각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몸을 느슨하게 감싸는 헐렁하고 커트가 적은 직선적인 옷감을 즐겨 사용했다. 이세이 미야케의 철학
1978년 <미야케 이세이와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책을 출판해 자신의 패션 철학을 대중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확실하게 했고, 1974년 일본 패션편집인클럽상, 1976년 마이니치신문 패션상, 1979년 뉴욕 프레트 패션디자인학교에서 수여하는 상을 수상하고, 1980년에는 모리스 베자르의 발레 <카스타 디바>의 무대의상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1984년에는 니만 마커스상 2개 부문과 미국 패션디자인협회(CFDA) 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패션 세계를 일본적·동양적 모티브로 서구적 어법을 구사해 풀어내고자 했던 이세이 미야케만의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이세이 미야케다운 것일까. ‘한 장의 천’과 ‘플리츠’다. “나는 몸과 직물이 적절하게 만났을 때에만 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기모노의 본질을 좋아한다”는 그는 한 장의 미학을 자신의 디자인에 풀어 놓는다. 마치 한 장의 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하늘에 날려 띄우는 것처럼, 한 장의 천으로 박음질한 것이, 입으면 하나의 옷이 되는 일종의 마술이다. 사람들은 이세이 미야케의 옷에 열광한다. “나는 옷의 절반만 만든다. 사람들이 내 옷을 입고 움직였을 때에 비로소 내 옷이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그런 의미다. 초창기 이세이 미야케가 패션의 소재로 삼은 것은 일본 전통 직물 가운데 하나인 사시코였다. 사시코는 누빈 면의 일종으로 일본의 노동자나 무사들이 많이 입었던 것이다. 한 장의 천으로 인체를 완전히 감싸는 작업은 이세이 미야케의 철학이자 성공의 한 요소였다.
이는 의복과 인체 간에 일정한 공간을 부여해 인체의 존재를 새롭게 변형시키고 조형성을 극대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곧 입는 방식의 자유를 제공해 인체의 신비감과 여유를 주어 몸에 정확하게 맞추어 재단하는 서구 패션과 큰 차이를 두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세이 미야케는 일본 전통과 혁신 사이에 희미하게 그어져 있는 선과, 동양과 서양 사이에 확실하게 나뉜 선 모두를 없애버린 혁신적인 디자이너다. 포스터, 21-21 디자인 사이트, 도쿄">
어빙 펜과 이세이 미야케
도쿄 미드타운에 이세이 미야케와 안도 타다오가 함께 만든 디자인 미술관인 21-21 디자인 사이트가 있다. 이곳에서 작년 9월부터 올 4월 8일까지 <어빙 펜과 이세이 미야케의 비주얼 다이얼로그> 전이 열리고 있다. 어빙 펜(Irving Penn·1917~2009)은 미국의 전설적인 패션 포토그래퍼로서 펜과 미야케의 만남은 1983년 보그 잡지에서 펜이 미야케 옷을 촬영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펜이 해석한 미야케의 옷 사진을 보고 “이런 견해가 있는가”라고 놀란 미야케는 이후 파리 컬렉션에서 발표해 왔던 자신의 옷 촬영을 펜에게 의뢰했고, 1987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1999년 가을·겨울 컬렉션까지 13년 동안 미야케는 한 번도 촬영장에 입회하지 않았다. 펜에게 모두를 맡긴 채 ‘시각적 대화(Visual Dialogue)’만을 교환했다. 당시 촬영된 사진은 250컷이 넘었고, 그 상호 창조의 과정을 21-21 디자인 사이트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펜은 1988년 주식회사 리브로 포트에서 “미야케의 존재는 깊은 문화적 뿌리, 사무라이와 신화와 전설이 바탕이 된다. 미야케의 디자인은 유행을 좆지는 않지만, 기품 있는 여자를 더 풍부하고 더 아름답게 한다”고 적고 있다.
전시 포스터 상단에는 펜의 양귀비 사진이 요염하게 자리하고, 하단에는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플리즈를 입은 흑인 모델이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눈에 봐도 양귀비의 주름과 플리츠 플리즈의 주름이 오버랩된다. 여기에 강열한 빨강과 보색인 녹색과 검정이 하얀 지면을 더욱 화려하게 만든다.
일본다운 색채감이 물씬 풍기는 전형적인 일본 포스터다. 뭔가 모르는 ‘일본다운 맛’이 보인다. 무채색의 도시 풍경에 가부키의 화려함이랄까. 이세이 미야케의 옷보다 더 일본답다.
전시는 두 사람의 교감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이미지와 펜의 오리지널 사진 작품으로 구성됐다. 패션디자이너의 기념비적 전시에 오리지널 의상 한 벌 없이 오직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조금은 어색하지만 멋진 첨단의 전시다. 미야케가 만들어온 지난날의 화려했던 과거를 영상으로 제작해 18분의 시간 속에 담아 흰 벽에 투영해 수많은 의상으로 태어난다. 모두들 숨죽이며 넋 놓듯 바라본다.
옷이, 전시 기획이, 전시 공간이, 사람들의 관람 태도가 모두 하나가 된다. 그곳에서 이세이 미야케라는 한 패션디자이너의 디자인은 옷이 아니라 예술이 된다.
예술과 실용이 만나는 접점은 오랜 시간 세상과 조우하고 인내하며 노력한 결과물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미야케의 1994년 계단형 플리츠 플리즈는 그의 혁신과 창의성, 그리고 도전에 대한 빛나는 아름다움의 결과물이다. 플리츠 플리즈 이세이 미야케는 패션이 실용이기에 앞서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걸작이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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