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인터뷰]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

화가나 음악가 등 예술인들이 은퇴 전 마지막으로 남긴 걸작을 흔히 ‘swan song(백조의 노래)’이라고 부른다. 최근 47년간의 뱅커 역할을 마치고 금융계라는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온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 그에게는 아마도 ‘외환은행 인수’가 스완 송이 아닐까.
“하나금융의 기업 문화는 Integrity(정직·성실)입니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하나금융의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에 정해진 최고경영자(CEO) 정년(70세)을 1년 남기고 퇴임함으로써 외환위기 이후 스스로 물러난 첫 금융지주 회장이 됐고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찬사를 끌어냈다. 김 전 회장 스스로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은행장이 되고 난 후 15년간 CEO로서 금융인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경험했다. 마지막 과업으로 여겼던 외환은행 인수까지 성사됐으니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1965년 한일은행에 입행, 유학(미국 남가주대)을 다녀온 뒤 1971년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에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한투금융은 1991년 은행으로 전환했고 1997년 은행장이 된 김 전 회장은 1998년 충청은행, 1999년 보람은행, 2002년 서울은행, 2012년 외환은행 등을 잇달아 인수해 현재의 하나금융그룹을 일궜다. 하나금융 42년 역사가 곧 금융인 김승유의 이력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김 전 회장은 “직원 20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2만3000명의 금융그룹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함께한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경험”이라며 뿌듯해했다. 퇴임을 앞둔 지난 3월 8일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에서 김 전 회장을 만났다.



사퇴 후 심경과 성공 비결

처음 사퇴 의사를 밝히셨을 때만 해도 금융계에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는데요.

“이제는 내 개인생활을 찾고 싶다는 게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회사생활을 시작한 후 50년 가까이 개인생활이 거의 없었어요. 회사 안팎에서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만류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사퇴 의사를 굽히지 않았죠.”

후배들에게 금융인으로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비결을 전해준다면.

“저는 한 번도 회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일하기보다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니 여러 가지 행운이 따라온 것이죠. 꼭 주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주인 노릇을 하나요.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면 진짜 주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퇴임 후 어떤 일을 하실 예정인지 궁금합니다.

“당장은 중국어 학원에 다닐 예정입니다. 간단한 회화를 익히고 나면 중국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압록강과 지린(吉林) 성 쪽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엔 하나고등학교와 미소금융 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미소금융의 경우 그동안은 주로 이곳(하나금융 회장실)에서 업무를 챙겼는데 앞으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재단 사무실로 출근할 계획입니다.”

하나고 학생들을 보러 자주 학교에 들르신다고 하던데요.

“주로 밤에 들렀는데 저녁 약속 자리에서 반주를 한 상태이다 보니 벌건 얼굴로 학생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얘기를 와이프가 듣더니 한 소리 하더라고요.(웃음). 이제는 안 그래도 되겠지요. 만약 제가 금융인이 안됐더라면 교사가 됐을 겁니다. 사람을 키우는 데서 크게 보람을 느낍니다. 하나고 이사장을 맡고 있으니깐 어느 정도 그러한 꿈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 못지않게 하나고 학생들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고는 모든 학생들이 한 종류 이상의 악기를 다루도록 지도하고 있어요. 얼마 전 학생들이 작은 오케스트라를 편성해 연주회를 가졌는데 뭉클했습니다. 대학생들과도 오래전부터 멘토-멘티 관계를 맺어 그동안 50여 명의 멘티가 생겼어요. 며칠 전엔 제 강의를 들은 여학생으로부터 ‘멘토님, 짱 멋져요. 감동 먹었어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서로 재미있게 지냅니다.”

하나고 이사장으로서 앞으로 목표는 뭔가요.

“금년 8월이면 하나고 이사장 임기가 끝나는데, 좀 더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첫 졸업생들이 대학교 들어가는 것까지는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하나고 학생들은 올해 첫 대학 입시를 치르게 됩니다. 물론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 하나고의 설립 취지는 아니지만 학생들을 맡긴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대학 입시가 가장 큰 관심사이니 되도록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금융인 김승유의 성장기

첫 직장생활은 어땠습니까.

“1965년 한일은행에 입행했는데 대우가 좋아서 간 것만은 아닙니다. 사기업과 달리 금융회사는 공공성이 있고 내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겠다 싶었죠. 아까도 얘기했듯이 전 일할 때 늘 제가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 누가 시켜서 일하는 것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은 경영자가 보기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금융인으로서 인생에 멘토가 있었습니까.

“지난해 고인이 되신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입니다. 제가 한일은행에서 처음 근무를 할 때 지점장으로 모셨죠.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후 저는 그분을 평생의 사표로 삼게 됐습니다. 정직과 성실이 몸에 밴 분이셨고 모든 행동이 배울 만 했습니다. 나중에 은행장이 되셨는데 알고 보니 그분의 선친도 은행장이셨고 자제분도 은행 임원이 됐습니다. 그분은 매일 1시간씩 저를 일찍 출근시켜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주판 연습부터 시키셨죠. 그분이 지점을 떠나고 후임자가 왔는데 대번에 지점 분위기가 바뀌더라고요. 첫 직장 상사로서 김정호 행장님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죠. 고인께선 애국심도 유별나 한번은 독도 근처 동해 바다로 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팻말을 놔두고 오셨다더군요.”

한국투자금융 설립에는 어떻게 참여하시게 됐나요.

“한일은행에서 2년 남짓 근무하다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입행 동기들이 벌써 대리로 승진했더군요. 지금 같으면 그런 생각 안할 텐데 당시엔 동기들 밑에 행원으로 복직하는 게 내키지 않았죠. 그러던 차에 마침 한 국책연구기관에서 외자 도입 관련 업무를 맡겨 잠시 그 기관에서 일했습니다. 그 일이 끝날 때쯤 금융계 선배 한 분이 ‘곧 한국투자금융이라는 회사가 출범하는데 그 회사에서 같이 일해 보자’고 권유해 합류하게 됐습니다. 단자회사였던 한투금융은 법규상 담보가 아닌 신용으로만 대출을 했습니다. 1991년 한투금융이 하나은행으로 전환한 후에는 단자회사 시절에 쌓인 신용평가 능력이 선발 은행과의 차별화에 큰 도움이 됐죠. 선발 은행처럼 담보대출에 의존했다면 하나금융의 현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1997년 행장이 되신 후에 본격적인 인수·합병(M&A) 행진이 이어졌는데 첫 M&A는 어떻게 이뤄졌나요.

“행장을 맡고 얼마 안 돼 외환위기가 터졌습니다. 그 통에 대기업 여신이 많았던 선발 은행들이 부실화되고 하나 같은 후발 은행들이 상대적으로 우량 은행이 됐죠. 특히 하나은행은 1997년 초에 기아자동차 여신을 많이 축소한 것이 건전성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해가 바뀌어 1998년 어느 휴일에 지인들과 골프를 치고 있는데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충청, 동남, 대동, 경기, 동화 등 퇴출 은행 명단을 알려준 후, 이 가운데 한 개를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충청은행을 선택했습니다. 어차피 떠안아야 할 거라면 규모가 가장 작은 곳이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충청은행 지점 수가 하나은행보다는 많았습니다. 당시 충청은행 직원들이 퇴출 판정에 반발해 금고를 잠가놓고 일제히 지점을 비우는 바람에 인수팀들이 애를 먹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대전의 한 지점에서는 지점장이 홀로 금고를 지키고 있더라고요. ‘뱅커로서 금고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면서요. 후에 충청은행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는데 그 지점장도 신청했더군요. 제가 말 그대로 삼고초려 끝에 반려시켰습니다. 그 지점장이 지금 박종덕 부행장이에요.”
“금융위기는 늘 반복됩니다.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금융회사의 성쇠가 갈립니다.”
“금융위기는 늘 반복됩니다.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금융회사의 성쇠가 갈립니다.”
협상의 달인 김승유

금융인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언제였나요.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 때였습니다. SK의 주채권 은행으로서 채무 조정 협상을 하는데 외국 채권단들에게 ‘국내 채권자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하니까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국제신인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울며 겨자 먹기로 외국 채권단을 우대해 줬거든요. 저는 ‘해외 채권단이 국내 채권단과 공동 부담을 하지 않는다면 SK글로벌은 법정관리로 갈 수밖에 없다’며 벼랑 끝 전술을 폈습니다. 당시 우리 쪽에서는 외환위기 때 활약했던 마크 워커 변호사를 법률 대리인으로 고용했는데 하루는 그가 회의석상에서 실무진들 다 내보내고 단둘이 보자고 하더군요. 그가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묻기에 ‘기업 가치가 커지는 것이 채권단에도 좋다. 그것만 생각하라’고 했죠. 그러자 그는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고 말했고 결국 외국 채권단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저는 워커의 수임료도 깎았어요. 그가 보낸 수임료 명세에서 ‘식사 시간’ 등 이것저것 빼고 상당한 금액을 깎아서 제시했죠. 워커는 ‘당신도 역시 프로’라며 흔쾌히 받아들이더군요.”

론스타와 외환은행 인수 협상 때도 결국 5000억 원이나 가격을 깎았습니다. 협상 전략이 있었나요.

“전 SK와이번스 야구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의 ‘1구 2무’ 전략을 좋아합니다. 첫 번째 공 말고 두 번째 공은 없으니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뜻이죠. 론스타와도 그런 자세로 임했습니다. 협상 과정에선 ‘견인불발(堅忍不拔)’이라는 말도 좋아합니다. 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협상도 원칙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대학 동기 동창이라서 외환은행 인수 때 혜택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론스타는 어느 나라 정부의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국제 사모투자펀드입니다. 내가 조금 특혜를 받았다면 정부가 좀 외환은행 인수 허가를 빨리 해주지 왜 1년 4개월씩이나 걸렸겠습니까. 그런 시각 때문에 힘들어요. 그렇다면 제가 계속 회장직에 있어야지 이렇게 회장직을 그만두는 데 뭐가 특혜라고 하는 건지.”



하나금융의 미래

하나금융은 매트릭스 조직(은행·증권·보험 등 계열사별 관리가 아닌 가계·기업·금융 등 고객 중심의 금융지주회사 관리 조직)을 채택했는데 실제 효과가 있나요.

“매트릭스 조직은 고객을 위한 제도입니다. 고객이 뭘 원하느냐에 맞춰서, 예를 들어 기업고객 같으면 인베스트먼트 뱅킹(investment banking), 혹은 코퍼레이트 뱅킹(coperate banking) 같은 것도 해주고, 거기에 따르는 각종 매니지먼트도 엮어주고 하는 거죠. 이게 제대로 작동하려면 관리회계 제도가 철저히 뒷받침돼야 합니다. A라는 고객에 대한 여러 서비스라든가 영업한 것을 몰아서 담당자에게 인센티브를 공평하게 줄 수 있는 체계가 구축돼야 하죠. 그런데 국내 금융계는 워낙 오랫동안 공급자 중심으로 일을 해 와서 아직 소기의 목적이 덜 나고 있는데 앞으로는 좀 나아지리라고 봅니다. 또 이건 우리가 하고 싶다, 하기 싫다의 문제가 아니고 고객이 그렇게 원합니다. 예를 들어서 고객의 영업장이 해외에도 있고 국내에도 있는데 이걸 통합 좀 해 달라, 혹은 회사채도 발행하고, 기업공개(IPO)도 하겠다 등등 요구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면 매트릭스 조직이 불가피해요.”

외환은행 M&A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씨티뱅크가 트래블러스하고 합병을 추진할 때 양측 경영진 중에서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6명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리고 협상도 불과 일주일밖에 안 걸리고 끝냈습니다. 저는 M&A의 속성이란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무라증권도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 법인과 유럽 법인을 인수하는 데 나흘 만에 끝냈습니다. M&A라는 게 시간을 끈다고 꼭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사전적으로 충분히 검토를 하고 있어야죠. 우리도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 그 내용을 충분히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너덧 명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좀 섭섭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하나금융의 경영진이 새로 구성됐습니다. 평소 인사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저는 임직원들의 인티그리티(Integrity), 즉 정직과 성실성을 가장 중요시 여깁니다. 하나금융은 내부적으로 임원들의 법인카드 사용 내역까지 봅니다. 법인카드로 유흥음식점 등 옳지 못한 곳에 써서 낙마한 임원들도 꽤 많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도 얼마만큼 정직하고 성실한지가 중요하다는 얘기죠. 이번에 하나금융 회장과 사장, 은행장이 내부 조직에서 나온 것은 잘된 것이지만 밖에도 경쟁자는 없지 않습니다. 외부에서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금융의 인사가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기 위해선 더욱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끝으로 후배 금융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시다면.

“최근 케네스 로고프가 지은 <이번엔 다르다>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고 임직원에게도 일독을 권했습니다. 책의 내용은 제목과는 반대로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 말대로 금융위기는 16세기부터 지금까지 반복됐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그 위기를 누가 잘 극복하느냐에서 금융회사의 흥망성쇠가 갈립니다. 하나은행도 외환위기 때 잘 대비해 오늘날의 하나금융을 이룬 것입니다. 금융인에게는 항상 위기에 대비하고 위기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전 SK와이번스 야구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의 ‘1구 2무’전략을 좋아합니다. 첫 번째 공 말고 두 번째 공은 없으니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뜻이죠.”
“전 SK와이번스 야구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의 ‘1구 2무’전략을 좋아합니다. 첫 번째 공 말고 두 번째 공은 없으니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뜻이죠.”
하나금융은 1971년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으로 출발해 20년이 지난 1991년 하나은행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이후 1998년 충청은행, 1999년 보람은행, 2002년 서울은행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금융권에서는 네 개 은행의 영문 첫글자를 따 ‘한국의 HSBC’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2005년에는 국내 1호 투자신탁회사인 대한투자신탁증권(현 하나대투증권)을 인수해 강력한 투자금융(IB) 역량을 가진 하나금융지주로 새롭게 출범했다.

하나금융은 유독 금융권 ‘최초의 시도’를 많이 했다. 고액 자산가를 위한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를 1995년 국내 은행 최초로 도입했다. 하나금융의 주력 자회사인 하나은행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6년 연속 유로머니(Euromoney)로부터 한국 최고 PB 은행으로 선정됐다. 2003년 SK그룹이 어려워졌을 때 하나은행은 SK그룹의 주채권 은행으로서 채무 조정을 주관해 대기업과 은행 간 ‘상생’의 모범 사례를 만들기도 했다.

2008년엔 국내 금융지주 최초로 ‘매트릭스 조직체계’를 도입했다. 현재는 우리·신한금융지주도 부분적으로 매트릭스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 밖에 2010년엔 국내 최초로 스마트폰 모바일뱅킹 서비스와 유언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하나금융의 기업 문화는 Integrity(정직·성실)입니다”
김승유 회장은 지난해 말 기자회견에서 “외환은행을 인수하면 9개 부문에서 국내 1~3위에 드는 한국 금융산업을 대표하는 그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금융 자체 분석에 따르면 외환은행을 인수한 후 시너지가 극대화되면 하나금융은 소매금융 분야에서 가계대출 부문 국내 2위, PB영업 부문 국내 1위에 오르게 된다. 기업금융 분야에서도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여신이 많고 해외 네트워크가 잘 갖춰진 외환은행의 역량에 힘입어 대기업 대출 국내 2위, 외화 대출 국내 2위, 무역금융 국내 1위 등으로 오를 전망이다. 펀드 판매도 국내 1위가 된다.

영업망도 하나은행의 점포 654개에 외환은행 점포 358개를 합하면 모두 1012개가 돼 은행권 2위가 된다. 해외 자산 역시 총 36조 원으로 우리은행(22조 원), 신한은행(19조 원) 등을 제치고 국내 1위가 된다. 건전성의 경우 두 은행은 이미 은행권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9월 기준 연체율은 하나은행이 0.51%, 외환은행이 0.68%로 우리은행(1.36%), 국민은행(1.09%)에 비해 크게 낮다.

하나금융의 핵심 기업 가치는 자주, 자율, 진취다. 자주 즉 ‘주인의식’이 강해 인사에 있어서 정치권이나 관료 등 ‘외풍’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은 굳건한 기업 문화를 유지하는 데 바탕이 됐다. 충청·보람·서울은행 등 다양한 출신이 섞인 조직이어서 자율적인 기업 문화도 정착됐다. 주류와 비주류가 없는 것. 김정태 신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신한은행 출신이다. 임원들도 각각 학력, 경력, 지역 등이 달라 어느 하나 편중된 부분이 없다.

진취적인 정신으로 인수·합병(M&A)과 해외 진출에도 앞장섰다. 하나대투증권, 하나다올신탁, 하나캐피탈 등 하나금융 계열사들은 모두 M&A 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사례다. 2007년엔 인도네시아 현지 은행을 인수해 법인을 세웠고 2010년에는 중국 지린(吉林) 은행 지분 18%를 인수했다. 인도네시아 법인은 고객 88%가 인도네시아인일 정도로 현지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중국 현지 법인 역시 다른 한국계 은행보다 현지 고객 비중이 월등히 높다. 하나금융은 외환은행 인수로 ‘아시아금융벨트’를 전 세계 금융네트워크로 확장할 계획이다. 이 밖에 하나SK카드는 통신과 유통, 금융의 융합 서비스로 모바일 카드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고 하나캐피탈 역시 높은 건전성을 보여주고 있다.



글 안대규 한국경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