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민 배우발레 프로덕션 총감독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 한 사람을 만났다. 때론 운명처럼 받아들였고, 때론 지독한 고집으로 밀어붙였던 삶의 순간들. 하지만 당당했다. 외로웠으나 ‘춤’이 있었고, 눈앞을 가리던 농무(濃霧)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말끔하게 걷히기도 했다. 발레리노로서, 안무가로서, 뮤지컬 총감독으로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황현민 배우발레 프로덕션 총감독의 이야기다.
[The Professional] 중국에서 K-팝 뮤지컬로 인생 2막 오프닝
‘춤추는 남자’ 황현민 씨는 배우발레 프로덕션의 총감독이자 (사)조승미발레단의 상임안무가다. 과거의 그를 단순히 ‘발레리노’라 불렀다면, 지금은 ‘뮤지컬 총감독’이라고 정정하는 편이 낫겠다. 열일곱에 입문한 발레에, 영국 유학을 통해 체화한 뮤지컬 재즈댄스, 그리고 대학원에서 수학한 예술학, 이 모든 이력들이 자연스럽게 그를 무용수에서 뮤지컬 총감독으로 변신시켰다.

“배우발레 프로덕션은 2010년에 뮤지컬 제작을 위해 창단했지만, 지금은 TV 광고, 드라마 등에 필요한 발레 안무 지도도 하고 연극배우나 영화배우 등 프로 배우들에게 발레와 재즈댄스를 지도하는 곳이기도 해요. 또 연기와 춤이 겸비된 배우들의 에이전시 역할도 하고 있지요.”

하지만 ‘뮤지컬 총감독’과 함께 그는 여전히 ‘조승미발레단 수석안무가’라는 타이틀도 지키고 있다. 조승미발레단이 무대에 올리는 공연 작품의 안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춤의 창작과 연출, 어느 하나 녹록지 않은 작업이지만, 그는 10여 년 전에 작고한 스승 조승미 교수의 자리를 채우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2007년 공연작 동화 발레 <유리구두>
2007년 공연작 동화 발레 <유리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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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동화 발레로 겪은 희(喜)와 비(悲)

조승미발레단은 발레리나였던 조승미 한양대 무용과 교수가 1980년에 창단한 후 800여 회에 달하는 국내외 공연을 통해 한국 발레를 알리는 데 혁혁한 역할을 했다. 조 교수는 <모세의 기적>(1989), <삼손과 델릴라>(1992) 등 수준 높은 창작 발레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교수님께서 폐암 투병 중이실 때 저는 영국 런던 스튜디오 센터(London Studio Centre)에서 유학 중이었어요. 뮤지컬 재즈댄스를 배우고 있었죠. 비자 문제로 잠시 한국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은행에 데려가시더니 통장에서 10만 원을 빼서 주시더라고요. 100만 원이 아니고 10만 원…. 치료비가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스승께서 주시니까 기쁜 마음으로 받았지만 돌아설 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유학을 끝내고 교수님께서 쾌차하시고 난 후엔 제가 꼭 모시고 싶었어요. 성공해서 물질적인 도움도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까울 뿐이죠.”

10만 원의 ‘용돈’을 받고 다시 돌아간 런던에서 지인으로부터 조 교수의 타계 소식을 들은 것이 2001년 9월이었다. 황 감독은 한양대 무용과 91학번이다. 동기생 전체에서 세 명밖에 안 되는 남학생 중에 유난히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입학 다음해인 1992년, 한국무용협회콩쿠르와 전국대학생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거머쥐었다. 자연 사제지간이 돈독할 수밖에 없었다. 은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 때문이었을까. 그는 유학이 마무리되던 즈음, 한국에서 걸려온 지인의 전화 한 통에 바로 귀국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의 재능을 알아본 영국 언론들이 그를 소개한 데 이어, 영국 무용계에서 러브콜도 왔던 때였다. 하지만 마치 숙명처럼 귀국을 결정했고, 자연스럽게 조승미발레단에 합류했다.

“교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조승미발레단이 위기에 놓여있을 때였죠. 발레단 주역 무용수로 1년을 활동하면서 발레 최대의 문제점이 대중과 호흡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란 걸 알게 됐어요. 공연을 못하니 단원들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단장한테 동화를 주제로 발레 공연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엄마들은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니까요. <피터와 늑대>, <미녀와 야수> 등 창작 동화 발레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 순회공연에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발레 공연에 이해를 돕기 위한 말(내레이션)이 나오니 ‘발레의 이단아’라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동화 발레라는 새로운 장르는 객석점유율 87%를 기록하며 승승장구 했습니다. 하지만 2~3년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돈이 된다’는 소문이 나면서 국립발레단, 유니버셜발레단 등에서도 동화 발레를 앞 다퉈 무대에 올리면서 저희는 다시 위기를 겪게 됐죠.”

덩치 큰 발레단들이 시장에 뛰어들자 제작비 ‘규모’의 차이는 무대 위에서 여실히 드러났고, 관객들은 더 유명한 발레단의 공연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후반, 동화 발레의 전성기 앞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승미발레단은 다시 ‘보릿고개’에 직면했고, 단원들은 여기저기 다른 발레단으로 ‘시집’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버틴 것이 7년. 더 이상 동화 발레를 창작하지 않게 되면서 그는 ‘무용수’ 타이틀도 벗어버렸다.

영국에서 경험한 새로운 영역인 뮤지컬 재즈댄스와 발레의 ‘마리아주’를 시도하면서 발레단의 상임안무가와 배우발레 프로덕션의 총감독으로 변신한 것. 하지만 그는 여전히 ‘춤’을 춘다.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과 함께, 그리고 수십 명에 달하는 제작 스태프들과 호흡을 맞추는 군무(群舞) 속에서 그는 여전히 ‘주역’ 무용수다.
안무가로 주역 무용수로 1인 2역을 했던 창작 발레 <요셉>(2005)
안무가로 주역 무용수로 1인 2역을 했던 창작 발레 <요셉>(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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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좌표 없던 젊은 날의 등대가 되다

발레리노 황현민이 발레를 알게 된 것은 열일곱 되던 때다. 사업가 아버지 슬하 1남 1녀 중 둘째로 자란 그는 사실 승마 빼고 안 해본 운동이 없던 터라 테니스 선수를 목표로 삼았었다.

“공부는 누나가 잘했었기 때문에 저는 운동이나 하며 놀던 학생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테니스에 재미가 붙어 테니스로 유명한 건대부중에 진학하기를 희망했는데, 광장중으로 가게 되면서 완전히 놀아버렸죠.(웃음) 공부를 못했다기보다는 완전히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부끄러운 얘기지만 연합고사(고등학교 입시시험)도 떨어졌어요. 그 당시 경기도 하남에 연합고사에 탈락한 학생들이 갈 수 있는 전수학교가 있었는데, 허가가 나기 전 일종의 무허가 학교라고 할 수 있죠. 서울에서 ‘논다’ 하는 아이들이 다 모였으니 1000명이 입학하면 300명이 남을까 말까 했어요. 왕대밭에 왕대 난다고 그 학교를 가면서 저도 많이 변했죠. 등교할 때 교문에 소주병 하나 정도는 물고 들어가야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라고 할까요. 하하하.”

그때부터 시쳇말로 학업과는 두터운 ‘담’을 쌓기 시작했다. 일일찻집, 나이트클럽을 종횡무진하며 1학년을 보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써니>가 그린 ‘놀던’ 학생들의 분위기 그 자체였다고. 그즈음 누나가 대학에 진학했다. 학력고사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얻지 못했던 누나는 원하는 대학을 포기하게 됐고, 누나에게 유독 기대가 컸던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을 본 후 그는 생각을 바꾸게 됐다. 자식으로서 대학은 가야 불효는 면할 수 있겠다는 결론이 서자 어떻게 하면 대학에 갈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영국 런던 스튜디오 센터에서 뮤지컬 재즈댄스 과정 유학 당시 공연 포스터
영국 런던 스튜디오 센터에서 뮤지컬 재즈댄스 과정 유학 당시 공연 포스터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학교 선배 중에 3명이 한국무용으로 J대학에 갔다는 말씀을 해주시면서 한국무용 배우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시더라고요. 실기만 잘하면 대학도 갈 수 있겠구나 싶어 무조건 손을 들었죠. 그래서 선생님이 가라는 학원에 가서 춤을 배우는데, 분명히 한국무용이라고 들었는데 타이즈를 입고 연습을 하는 겁니다. 3개월이 지나서야 그게 발레였다는 사실을 알았죠.(웃음) 그런데 턴(turn)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무조건 턴이 하고 싶어서 발레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런 걸 두고 ‘숙명(宿命)’이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 앞에서 그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놀던’ 친구들과의 관계 정리. 일단 삭발부터 했다. 거절 못하는 성격으로 매일 교문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에게 결연한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액션’이었다고나 할까. 삭발 발레리나에게서 친구들은 고맙게도 멀어져 갔지만 문제는 아버지였다. 발레를 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창피하니 나가라”고 하셨다.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를 철저히 속이는 수밖에.

“고3 때 아버지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발레 선생님과 마주쳤어요. 선생님이 아버지께 다방에서 잠깐 말씀 좀 나누자고 하시더니, 현민이는 이대로만 나가면 촉망받는 발레리노가 될 수 있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아들이 잘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거죠. 그 이후론 아버지께서 발레 비디오까지 사다 주시면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셨어요. 고3 때는 너무 행복했죠. 필기 성적은 비록 안 나왔지만 실기는 만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에 정말 열심히 했죠. 그런데 학력고사 이틀 전에 사건이 벌어졌어요. 연습이 너무 늦게 끝나 울산에서 올라온 여자 동기를 집에 데려다 주고 새벽 2시에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는데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 2명이 시비를 걸더라고요. 뒤를 보니 무리가 있었어요. 한 대 때린 기억밖에 없는데, 깨어나 보니 병실이었어요.(웃음)”

시쳇말로 ‘17대 1’로 맞았다. 머리를 너무 많이 맞아 구토와 어지럼증을 호소했지만, 어떻게든 학력고사는 봐야 했다. 대충 본 시험 점수는 98점(당시 체력장을 포함한 학력고사 만점은 340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로 본 실기 점수는 탈락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게 막을 내린 대학 입학의 꿈을 억울해서라도 접을 수는 없었다. 재수시절 국어, 영어, 수학을 제외한 소위 ‘암기과목’을 교과서를 달달 외우다시피한 결과, 학력고사에서 244점을 받았고 자신 있었던 실기는 당연히 패스. 국립발레단, 유니버셜발레단의 기라성 같은 무용수들의 양성소라 불렸던 한양대 무용과에 합격했다.
“ 체육과 동기 9명과 학군단에 들어갔는데, 기획장교로 군대의 다양한 공연과 행사 기획 업무를 담당했어요. 그런데 공연 기획이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지금 뮤지컬 기획과 연출의 토대를 그때 배웠다고 할 수 있죠.”
“ 체육과 동기 9명과 학군단에 들어갔는데, 기획장교로 군대의 다양한 공연과 행사 기획 업무를 담당했어요. 그런데 공연 기획이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지금 뮤지컬 기획과 연출의 토대를 그때 배웠다고 할 수 있죠.”
뮤지컬의 무대, 보다 넓은 중국 대륙으로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쟁쟁한 선배들, 동기생 전체 3명밖에 안 되는 발레리노 중 한 명으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마음고생이 시작됐다. 말 통하는 친구가 그립다 보니 체육과 동기들과 어울리게 됐고, 졸업 즈음 얼떨결에 그들과 학군단(ROTC) 신체검사를 받게 됐다.

“뭘 너무 몰랐던 거죠.(웃음) 체육과 동기 9명과 학군단에 들어갔는데, 기획장교로 군대의 다양한 공연과 행사 기획 업무를 담당했어요. 그런데 공연 기획이 아주 재미더라고요. 지금 뮤지컬 기획과 연출의 토대를 그때 배웠다고 할 수 있죠. 전역을 했더니 동부그룹에서 장교 출신 신입사원을 뽑더라고요. 그때는 발레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터라 지원했죠. 인사팀에서 근무했는데 어느 날 제가 아주 싫어하는 소장 한 분이 사무실에서 벽을 보고 앉아 계시더군요.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회사에서 나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때가 IMF 때였는데 그 얘길 듣고 저도 그냥 사직서를 쓰고 나왔어요. 비정한 현실이 싫었다고 할까요. 감정이 이성을 앞섰던 거죠.”

회사원 생활은 1년 만에 막을 내렸고, 끼를 살려 보려 연기학원에 다녔다. MBC 연기자 공채 시험 파이널까지 갔지만 고배를 마셔야 했고, 다음 도전한 분야는 패션 디자인. 러시아에 무용복을 제작해 수출한다는 사업계획은 착착 진행되는 듯했으나 1999년 유색인종에 대한 반감이 커졌던 러시아 현지 분위기를 접한 뒤에 그것 역시 접었다. 뭘 해도 풀리지 않는, 꼬일 대로 꼬인 인생. 하지만 오아시스 같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 역시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하는 것마다 안 되던 때 뮤지컬 출연 제의가 있었어요. 뮤지컬계의 ‘최불암’이라고 하는 신시뮤지컬컴퍼니 서병구 안무가와 작업을 하는데, 저더러 너무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넌 뭘 해도 발레냐’ 그러시는데 오기가 발동했어요. 뉴욕에 가서 뮤지컬 재즈댄스를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마음먹고 비자 준비에 착수했죠. 그때만 해도 미국 비자 받기가 어려워서 브로커한테 맡겼는데 출국 전날 TV 뉴스에 제가 일을 맡긴 브로커 검거 소식이 나오더라고요. (웃음)”

그리하여 건너간 곳이 미국 대신 영국이었다. 뮤지컬 재즈댄스의 기본기가 발레다 보니 그의 재능은 영국에서도 빛을 발했고, 2000년 초반 귀국 후 조승미발레단에 합류하면서 대학원에 진학,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으며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지금 안무가이자 뮤지컬 총감독으로서의 그에게 지난날 삶의 굴곡은 꽤 괜찮은 ‘드라마’의 재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무대는 이제 한국을 넘어 중국 대륙으로 옮겨가고 있다.
황현민 감독은 2011년 최초의 한·중 합작 뮤지컬 <슈팅 스타>를 기획, 연출했다. 올 8월에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슈팅 스타> 2탄을 베이징 하이디안 대극장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황현민 감독은 2011년 최초의 한·중 합작 뮤지컬 <슈팅 스타>를 기획, 연출했다. 올 8월에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슈팅 스타> 2탄을 베이징 하이디안 대극장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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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최초의 한·중 합작 뮤지컬 <슈팅 스타>(중국어 제목은 유성연가)를 베이징 무대에 올렸어요. 6성급 호텔 크라운 플라자를 소유한 부동산기업인 중국 쌍전그룹(雙錢集團)이 투자했는데, K-팝 스타와 중국 소수민족 소녀의 사랑 이야기예요. 중국 배우 2명과 한국 배우 5명이 출연해 5일간 공연했는데, 쌍전그룹의 후원 덕분에 7000석이 꽉 채워졌죠.(웃음)”

황 감독이 쌍전그룹과 조우한 것은 2010년. 쌍전그룹은 부동산기업을 모태로 한 중국 재벌기업이다. 문화예술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려는 쌍전그룹이 한류를 주제로 한 뮤지컬의 연출자를 찾던 과정에서 황 감독을 낙점한 것. 동화 발레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뮤지컬 문화가 아직은 미숙한 중국은 그에게 다음 챕터를 이어나갈 무대다. 그런데 의심 많기로 유명한 중국인, 중국 기업과의 양해각서(MOU)를 어떻게 성사시켰던 것일까.

“지인 소개로 쌍전그룹을 찾았을 때 중국 뮤지컬 한 편을 보여주며 ‘당신이라면 어느 정도의 기간과 제작비로 이 정도 작품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이미 한국 굴지의 엔터테인먼트사와도 접촉했다고 하더군요. 그쪽 관계자만도 30여 명쯤 참석한 자리였어요.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리 공들인 작품 같지 않아 솔직하게 제작비 3000만 원, A급 배우면 한 달, B급 배우면 두 달이면 가능하다고 대답했더니 쌍전그룹 회장이 대뜸 ‘당신은 세계에서 유일한 감독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대부분의 감독들이 제작 기간 1년 반, 제작비 10억 원을 얘기했다고 하면서 솔직함이 마음에 드니 당장 계약하자고 하더라고요.(웃음)”

통 큰 중국인 회장은 아예 배우발레 프로덕션과 쌍전그룹 간의 MOU 체결을 제안했고, 양사는 다시 한·중 합작 뮤지컬 <슈팅 스타> 2탄을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며 오는 8월 22일부터 베이징 하이디안 대극장에서 올릴 예정이다. 현재 한국 스타급 아이돌 그룹 캐스팅이 거의 마무리 단계로, 2차 공연에는 K-팝 스타와 중국 뮤지컬 배우, 발레리나 등 25명의 배우가 출연해 보다 스펙터클한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은 뮤지컬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라 이번 일을 계기로 중국으로 무대를 옮길 계획입니다. 중국은 아직도 뮤지컬을 보여주면 ‘이게 뭐냐’고 물을 정도로 저변 확산이 안 된 시장이죠. 쌍전그룹에서는 중국 33개성에 문화예술관과 300개 소극장, 테마파크 5개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어요. 일본 사계예술센터처럼 중국에도 뮤지컬 배우 양성과 발레뮤지컬을 위한 아카데미를 건립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먼 미래에는 당연히 한국에서도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슈팅 스타> 2탄 공연을 위한 오디션으로 황 감독의 4월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훗날 후학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잘 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혹시 뮤지컬 무대에 서고 싶다면 언제고 귀띔해 달라 고. 사람의 꿈을, 꿈을 가진 사람을 잘 되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중국은 아직도 뮤지컬을 보여주면‘이게 뭐냐’고 물을 정도로 저변 확산이 안 된 시장이죠. 일본 사계예술센터처럼 중국에도 뮤지컬 배우 양성과 발레뮤지컬을 위한 아카데미를 건립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먼 미래에는 당연히 한국에서도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중국은 아직도 뮤지컬을 보여주면‘이게 뭐냐’고 물을 정도로 저변 확산이 안 된 시장이죠. 일본 사계예술센터처럼 중국에도 뮤지컬 배우 양성과 발레뮤지컬을 위한 아카데미를 건립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먼 미래에는 당연히 한국에서도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황현민
1994년 한양대 체육대학 무용과 졸업
2000~2001년 영국 런던 스튜디오 센터 수료
2005년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예술학 석사
2003년~ <유리구두>, <피터와 늑대> 등 동화 발레 연출
<시바의 여왕>, <아이다> 등 오페라 안무
백제예술대, 상명대 등 무용·뮤지컬과 출강
2010 한·중 합작 뮤지컬 <슈팅 스타> 베이징 공연 총감독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공연 사진 제공 배우발레 프로덕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