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최병관
최병관 상명대 사진학과 교수는 10여 년의 세월을 대나무와 함께 보냈다. 흑백이 주를 이루는 그의 사진은 묘한 흡입력이 있다. 동양정신의 상징인 대나무를 소재로 세계 시장으로 향하고 있는 최 교수의 작품 세계를 만났다.최병관 상명대 사진학과 교수는 30년이 넘게 사진 작업을 해온 중견 작가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나와 프랑스 파리 8대학교에서도 순수사진을 전공했다. 귀국 후 한동안 거리의 풍경, 정물 등을 카메라에 담아온 그는 10여 년 전부터 대나무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대나무와의 아주 특별한 인연
최 교수가 대나무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사진학과 사진 여행이었다. 2002년 연례행사로 떠나는 사진 여행의 목적지가 대나무 숲이 근사한 소쇄원이었다.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학생들이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섰는데, 그때 거리를 두고 서있는 대나무가 새롭게 비쳤다.
멀리서 보니까 대나무마다 빛의 조건이 제각각이었다. 앞에 선 대나무와 뒤에 선 대나무, 숲 속에 숨은 대나무의 빛의 조건이 모두 달랐다. 사진은 사람의 눈과 달라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함께 인식하지 못한다. 밝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어두운 부분이 날아가고, 어두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밝은 면을 담지 못한다. 대나무는 사진의 그런 특성을 무척이나 잘 보여주었다.
“그때가 네 번째쯤 소쇄원을 찾은 때였는데, 그전에는 대나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피사체는 작가가 포용할 수 있는 정도가 됐을 때 눈에 들어오는 듯한데, 그때가 대나무를 만날 때였나 봅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사진 여행을 다녀온 후 마침 가나아트에서 기획전에 그를 초대했다. 한창 열을 올리던 월드컵을 기념해 가나아트에서 준비한 ‘한국의 풍경전’이었다. 초대를 받고 보니 한국의 풍경이라고 마땅히 내놓을 만한 작품이 없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소쇄원에서 촬영한 대나무 작품이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틈틈이 35mm 소형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현상해둔 필름을 꺼내 인화했더니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에 가까운 작품이 나왔다.
‘이거다’ 싶었다. 작품은 콘셉트가 중요한데, 대나무는 인위적인 조작을 전혀 하지 않는 그와 잘 어울렸다. 그때부터 대형 카메라를 들고 전국 대숲 기행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 그렇게 촬영한 작품으로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 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대에 1년간 교환교수로 가게 됐어요. 영국에서 생활하는데 이상하게 대나무가 그리웠어요. 대나무를 찍고 싶다는 생각보다 대숲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오브제로 대나무를 대하다 대숲에 매료된 거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사진 여행
그가 10여 년간 대나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대나무가 주는 이런 특별한 마력이 있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개인전을 하고 나면 그 피사체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 준비하는 동안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에 개인전을 치르고 나면 피사체 근처에도 가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나무는 달랐다. 오히려 힘들고 피곤하면 대숲이 생각났다.
대숲에 앉아 비 떨어지는 소리, 대나무의 비릿한 향, 대나무 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치유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대숲에서 그런 에너지를 받고 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사진 여행이 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국의 대숲을 찾다 보니 이제는 자주 찾는 서너 곳이 정해졌다. 한 번 여행을 가면 1박 2일, 혹은 2박 3일간 한 곳에 머문다.
사진 여행은 자동차에 올라앉으며 시작된다. 자동차에 오르면 습관처럼 영화 <봄날은 간다>의 주제곡 등 대나무와 어울리는 음악을 튼다. 음악에 취해 여행지에 닿으면 맛집이 그를 기다린다. 지난 연말 다녀온 담양은 추어탕 집과 대통밥이 유명하다. 사진 촬영이 끝나면 하루 종일 대숲에서 언 몸을 노천온천에 담근다. 하늘 보고 별 보며 온천욕을 하다 보면 세상사 시름은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다. “몇 년 전까지는 비가 와서 작업을 못하면 안달이 났습니다. 이제는 오랫동안 해서 그런지 특별하거나 차별화된 게 많이 나오지도 않지만, 작업 그 자체를 즐기게 됐어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 소리를 들으며 대숲의 은은한 향기에 빠져듭니다. 자기 일을 하며 저처럼 행복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사진을 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나무의 매력에 빠지면서 대나무의 특성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하루 1m 이상 자라 30~40일이면 다 자란다는 사실, 뿌리가 얕아 몇 년밖에 못 자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얕은 뿌리 탓에 뿌리가 줄기를 지탱하지 못해 무리를 지어 자라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과 비슷하다는 점도 배웠다.
그뿐이랴. 옛사람들은 대나무를 사군자의 하나로 칭송했다. 최 교수는 그 이유를 세 가지에서 찾는다. 대나무 속이 빈 것처럼 욕심을 버릴 것, 늘 푸르른 대나무를 좇아 변절하지 말 것, 그리고 어디서나 곧은 대나무를 보며 불의에 굴복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대나무와 물결 작품으로 세계 시장 진출
10여 년 넘게 작품을 하며 적은 변화도 있었다. 초기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뀐 게 변화라면 변화다. 간혹 “밤에 촬영하느냐”고 묻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일체의 조명작업 없이 오로지 자연환경에서 작업한다. 최 교수는 이처럼 흑백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미니멀리즘이 개인 취향에 맞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소설에 가깝다면 제 작품은 시에 가깝다고 봅니다. 소설은 많은 걸 설명하지만 시는 읽는 사람이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잖아요. 제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답이 없습니다. 그저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거죠.”
앞으로 그는 대나무 작품을 중심으로 세계 미술 시장으로 나갈 계획이다. 한국이 경제와 스포츠 등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반면 미술은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어서다. 회화와 조각에 비해 사진은 더 대접을 못 받는다.
“2004년 버밍햄 국제사진페스티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파리에서 공부하던 1980년대만 해도 사진은 미술의 변방이었는데, 10여 년 만에 사진이 미술 시장의 중심에 와 있더군요. 사진이 어느새 컬렉션의 대상이 돼 있었고요.” 그곳에서 그는 해외 미술계 인사들에게 대나무 사진 몇 점을 보여줬다.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그때부터 2년을 준비해 2006년에는 버밍햄 국제사진페스티벌 ‘포트폴리오 리뷰’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는 대나무와 함께 물 파문 작품을 선보였다. 반응도 좋았다. 그때 3곳의 해외 갤러리와 관계를 맺게 됐고, 지금도 소속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해외 시장은 대나무 작품을 중심으로 나가게 될 겁니다. 외국 컬렉터들은 흰 바탕의 대나무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배경이 어두운 대나무 작품은 미술애호가들이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결은 컬러 작품이 반응이 좋습니다. 서두르지는 않겠지만 머지않아 물결 작품도 전시회를 가질 생각입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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