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푹 빠진 여행 사진작가 신미식
아프리카 전문 사진작가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신미식 씨다. 그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풍경을 최초로 ‘구경’시켜 준 사람이다. 우연처럼 만난 아프리카를 7년째 필연처럼 찾고 있는 그는 요즘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신발을 배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아프리카를 담은 그의 카메라 렌즈 한쪽에는 ‘소년 신미식’이 숨어 있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데, 90% 정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에요. 박지성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시내에 나가면 아이들이 벌떼처럼 뒤를 쫓아와요.‘지성 파르크~’라며 제 몸을 만지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조용필이 안 부럽다니까요.(웃음)”
요즘 한창 유행하는 빈티지풍 야상점퍼 차림이지만 소녀시대나 비스트 대신 조용필을 언급하는 지천명(知天命)의 사진작가는 아프리카에서의 에피소드를 전하며 소년처럼 해맑게 웃었다. 20년이 넘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사진작가’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그는 ‘그냥 사진가’로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좋다, 그저 ‘사진가’라고 해두자. 신발 1000켤레에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사진가 신미식은 지난해 12월, 13일간 시간을 내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다녀왔다. 필자는 지난해 11월 그가 서울 홍익대 앞 한 카페에서 마련한 작은 콘서트에 다녀온 적이 있다. 작은 음악회를 겸한 토크쇼 후에 진행된 미니 경매를 통해 마련된 돈을 아프리카 아이들이 신을 신발 구입에 쓴다는 게 행사의 취지였다. 그는 자신의 사진 작품과 사진집을 경매에 내놓았었다. 행사에 참석했던 한 사람으로, 십시일반 모금된 돈이 제대로 쓰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카페와 블로그 이웃, 지인 등 7명이 동행했어요. 신발 나눔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힘들더라고요. 협찬 받은 신발이 부피가 있기도 하고 아프리카 내수경제에 도움이 되려면 현지에서 신발을 구입하는 게 나을 듯해 도착해서 나머지 신발을 샀는데, 1000켤레의 신발을 한꺼번에 구입할 수 있는 가게가 없는 겁니다.(웃음) 결국 물어물어 찾은 곳이 국가에서 운영하는 신발 가게였는데 하루 매출이 우리 돈으로 10만 원가량 되는 곳에서 1000만 원어치를 샀으니 북새통이었죠. 저희가 창고에 들어가서 사이즈별로 신발을 찾았을 정도니까요.”
한국에서 태국, 태국에서 비행기로 또 10시간을 날아가면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다. 그곳에 전달한 신발이 120켤레, 거기서 8~9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시다모 아이들에게 선물한 것이 700켤레, 또다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예가체프에서 나눠준 신발이 300켤레. 1000켤레가 넘는 신발은 생각보다 부피가 커 트럭 2대가 동원됐다.
트럭에 신발을 싣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기분 좋게 나눠주려 했던 것은 이상일 뿐, 현지 사람들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뜯어 말렸다. 그랬다간 서로 받겠다며 폭동이 일어난다는 경고를 받았다. 하는 수 없이 현지 비정부기구(NGO)에 협조를 구해 정부기관에 신고를 한 후 그곳에서 지정해주는 가정의 아이들에게 신발을 선물했다.
“아프리카는 아이들에게 신발만 신겨도 사망률의 25%는 줄일 수 있다고 해요. 발에 상처가 나서 파상풍 같은 병으로 죽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신발을 나눠준 집 아이들 대부분이 태어나서 신발을 처음 신는 아이들인데, 정말 뛸 듯이 좋아하더군요. 한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집 아빠가 기분이 좋은지 아이한테 직접 신발을 신겨주시더라고요. 그런데 신발 끈을 한 번도 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쪼그리고 앉아 신발 끈과 한참 동안 씨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아프리카, 그리고 나를 꼭 닮은 사람들
그의 나눔이 알려지면서 요즘엔 인터넷 이웃들은 물론 외국에 사는 교민들까지 마음을 보내온다. 신발만 나누려고 했던 최근 에티오피아 방문에도 바닥에 까는 매트리스에, 핸드메이드 인형까지 개수는 몇 개 안되지만 보탬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갈 때마다 ‘나는 사진 찍는 사람인데 이제 그만 해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돌아올 때는 다음에 갈 땐 뭘 선물하면 좋을지 숙제를 만든다. 이번 방문에서 돌아올 때는 바닥에 깔고 잘 수 있는 매트리스가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것도 200개씩이나.
2005년 한 항공사가 제안한 팸투어를 통해 우연히 방문하게 된 마다가스카르 이후 아프리카는 자꾸만 그를 불러들였다. 지난 7여 년간 마다가스카르만도 7번, 에티오피아를 4번, 케냐를 2번, 우간다·수단·콩고·탄자니아·남아프리카공화국을 한 번씩 다녀왔다.
“여행사 초청을 받고 마다가스카르가 어떤 곳인지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사진 한 장 찾을 수 없더라고요. 여우원숭이가 있다는 것 이외에 별 정보도 없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팸투어에 따라나섰죠. 그런데 공항에서 내려 차를 타고 20분 정도 달렸을까 둑방 위로 아줌마들이 빨랫감을 들고 우루루 줄지어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때가 아침 7시였는데, 저도 모르게 차를 세워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었어요. 여행을 그렇게 다녀도 수첩에 메모한 적이 없는데, 그때 처음으로 수첩을 꺼내 적었어요. ‘나머지 삶을 산다면 이곳에서 살고 싶다’라고요. 그땐 이유를 몰랐는데 3년 후에 알게 됐죠. 그 아줌마들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을, 맨 앞에 엄마 대신 빨래 양동이를 들고 가던 꼬마의 모습에서 제 모습을 봤기 때문이죠.”
마치 오래전 흑백영화처럼, 마다가스카르는 그의 가슴 속에 들어와 버렸고, 그는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을 또 찾았다. 관광사진과 달리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그의 사진은 아프리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콘텐츠가 됐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아이들의 얼굴, 자연, 일상 등 그가 렌즈에 담은 아프리카의 모습은 사진집으로, 전시회로 사람들과 소통했다.
아프리카가 좋아서 이 나라 저 나라를 찾다 보니 나눔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됐다. 자신들은 모르지만 그의 사진 속에 출연(?)해 준 모델들에게 사진집을 선물하기도 하고, 전기도 없는 동네 사람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영화를 상영하며 ‘시네마천국’의 시간도 마련해 봤다. 가진 재주가 사진이니 가족사진 찍어주기는 기본이다.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에게 신발도 선물하게 됐고, 맨땅에 돗자리 하나 깔고 자는 사람들에게 푹신하고 포근한 매트리스를 선물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도 이르렀다. 교만한 도움보다 즐거운 나눔으로
사람들은 그가 ‘잘나가는’ 사진작가니 가진 것이 많아 나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지만, 신미식이란 사진가가 꼭 그렇다. 밥값 내는 것 하나만큼은 후하디후한 그도 사실 얼마 전까진 신용불량자였다.
“10년 넘게 신용카드 하나 못 만들고 살다가 그 빚 다 청산하고 지금은 빚이 10원도 없어요.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다시 만들던 날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그날 바로 50만 원을 쏘았다니까요. 하하하. 늦게 사진을 시작해서 죽을 만큼 힘이 들었지만, 결국 또 이렇게 빚 청산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사진이에요.”
서른 살까지는 잡지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컴퓨터와 벽만 바라보고 살기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그때 잡지사 사진부장의 사진에 자극을 받고 월급 42만 원 시절 56만 원짜리 카메라를 무작정 구입해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습’이다. 오후 6시에 퇴근했다가 9시에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 사진팀의 인화지를 훔치기도 부지기수. 만능키를 만들어 암실 문을 따고 들어가 새벽 3시까지 인화 연습을 했다. 사진부장만이 쓸 수 있었던 코닥의 고급 인화지를 훔쳐 인화된 사진을 보고 흐뭇해했던 시절이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 잡지사를 그만둘 수 없어 휴가를 내서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죠. 나중엔 회사를 그만두고 양수리로 들어갔는데, 2001년 당시에 그래픽 디자인으로 한 달에 열흘만 일하고도 600만~700만 원을 벌었어요. 그런데 제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돈과 타협하고 있다는. 그래서 디자인 일은 완전히 그만두고 사진에 전념했는데, 누가 알아주는 사진작가도 아니고 말도 못하게 어려웠죠. 친구가 돈이 급히 필요하다고 해서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줬다가 못 갚는 바람에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신용불량자가 됐고, 그 때문에 주소이전 신고도 못해 주민등록이 5년간 말소되기도 했죠. 주민등록 살리려고 동사무소에 벌금 내러 갔을 때 그래도 담당자가 제 이름을 보더니 팬이라며 벌금의 상당 부분을 깎아줬어요.(웃음)”
지긋지긋한 빚 독촉에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 때 제발 아침에 눈 뜨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다. 사진을 떼려치워야겠다는 생각도 수천 번. 그런데 이상했다. “전시회에서 3000만 원짜리 작품 하나밖에 안 팔렸다”는 동료 사진작가의 부러운 푸념에 두물머리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도 강변에 핀 꽃을 보고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되더란다. 하지만 카메라를 팔아서 사진집을 출간하면서 조용히 사진가 신미식을 알려갔고, 잔잔한 물결이 결국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13남매의 막내로 워낙 가난하게 자랐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이 꼭 어릴 적 저 같아요. 저희 어머니도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는데, 어릴 땐 엄마를 여자가 아닌 엄마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 미안해요.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 엄마 생각이 나서 한 아이 엄마한테 장바구니랑 조화 한 다발을 사갔는데, 꽃을 내밀었더니 제 몸까지 통째로 안으며 좋아하더라고요.(웃음) 그 아줌마한테는 장바구니가 샤넬이고 루이비통이죠. 가난하게 컸던 터라 아프리카 아이들을 동정해 본 적이 없어요. 가난한 것도 그저 삶의 모습 중에 하나이니까요.”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지’ 않을 작정이다. 적어도 자신으로서는 그건 너무 교만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저 사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13남매의 막내로 워낙 가난하게 자랐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이 꼭 어릴 적 저 같아요. 저희 어머니도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는데, 어릴 땐 엄마를 여자가 아닌 엄마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 미안해요.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 엄마 생각이 나서 한 아이 엄마한테 장바구니랑 조화 한 다발을 사갔는데, 꽃을 내밀었더니 제 몸까지 통째로 안으며 좋아하더라고요.(웃음) ”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자료사진 제공 신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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