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일 락앤락 회장


버버리 코트, 호치키스, 어그 부츠. 한 브랜드가 특정 카테고리의 이름이 돼버린 대표적인 경우다. 그 예를 주방생활용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밀폐용기 ‘락앤락’이다. 이 락앤락 하나로 사업에 성공해 이른바 슈퍼리치가 된 이가 김준일(60) 락앤락 회장이다.
[뉴 밀레니엄 슈퍼리치] 맨손의 사업가를 거부(巨富)로 만든 두 번의 선택
2010년 1월 28일 코스피 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한 락앤락의 2012년 1월 16일 기준 시가총액은 무려 1조9000억 원에 달한다. 김 회장은 락앤락 주식 2676만 주(54.01%)를 보유하고 있다. 그 덕분에 김 회장의 지분 평가액은 1조를 넘어선다. 지난해 재벌닷컴의 조사에서 주식, 배당금, 부동산 등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그의 총자산은 1조632억 원으로 평가됐다.

락앤락은 김 회장이 맨손으로 일군 회사다. 1998년 외환위기 때 대표 상품인 4면 결착 방식의 저장용기 ‘락앤락’을 출시해 밀폐용기 시장에서 혁신적인 제품으로 인정받으면서 성장했다. 현재 밀폐용기 시장에서 주방생활용품 전 분야로 확대하는 중이다.

김 회장의 경우 밀레니엄 슈퍼리치 중에서는 유일하게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른 밀레니엄 슈퍼리치가 정보기술(IT), 바이오, 금융 업계임을 생각하면 비교적 ‘클래식’한 형태의 부자라고 할 수 있다.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김 회장의 사업 인생은 1978년 어느 날 신문에서 ‘수입 자유화’라는 단어를 보면서부터 시작된다. 수입자유화대책위원회 발족 기사였다. 그는 곧 열릴 수입 자유화 시대에 맞춰 수입업에 뛰어들기로 했고, 국진유통을 설립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다.

김 회장은 경북 대구 부호의 3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광산 운영, 유통업을 비롯해 아버지의 사업이 줄줄이 실패했다. 1968년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혼자 올라왔다. 중학교 때 등교하다 다리가 부러져 당시 고교 입시 과목 중 60점이 배점된 체육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진학에 실패한 김 회장은 독한 마음에 검정고시로 1년 만에 대학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영업사원으로 학비를 벌어가며 대학입시를 준비했지만 낙방했다. 재수가 부담됐던 김 회장은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진학한 뒤 군에 입대했다. 20대 초반을 평범하게 보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과 사업에 대한 구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 신문에서 수입 자유화라는 운명과도 같은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국진유통은 그의 꿈을 이룰 발판이었다. 수입 사업을 결심하고 유럽 선진국인 이탈리아, 독일 등의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마침 그때 주방용기를 전시하는 중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주방용기가 생소했지만, 국민소득과 함께 주방용기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아이템을 선택했다.

김 회장은 처음에는 한 업체에서 수입한 물건을 받아 백화점과 남대문에 파는 중간상인으로 출발했다. 사업은 순조롭게 풀렸다. 남대문 도매시장에서 수입제품으로선 가장 탁월한 성공을 보였다. 7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200개의 제품을 수입해 196개를 성공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김 회장의 첫 터닝 포인트는 여기서 시작된다. 국진유통의 성공에서 자신감을 얻어 1985년 락앤락의 전신인 국진화공을 설립하고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전환이었다.

제조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초기 3년간 악재가 겹쳤다. 1985년 갑자기 환율이 급등했다. 특히 엔화와 스위스프랑이 50% 올랐다. 공장 설비를 들이는 과정에서 스위스 자금을 쓰고, 일본 원부자재에 의지해야 했던 김 회장에겐 큰 타격이었다. 여기에 노사 분규로 임금을 3년간 2배로 올렸다. 이익을 내도 환차손과 임금으로 인해 엄청난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김 회장은 견디다 못해 지분을 팔고 회사를 떠났다. 다시 돈을 벌어서 재인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1988년 그는 다시 유통업을 시작해 자금을 모았다. 실적은 예전 못지않았고 1992년 마침내 국진화공을 다시 인수했다. 회사 이름은 하나코비로 바꿨다. 실패한 제조업으로 돌아와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잘못을 분석하니 제조, 연구·개발(R&D), 유통 세 가지 다 하려고 한 게 패착이었다. 그래서 공장 없는 제조를 하자는 생각에 R&D와 영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보유하던 기계를 생산업체에 넘기고 기술을 가르치며 노동집약적인 부분은 아웃소싱 계약을 했다. 이후 도시락통, 피크닉통, 욕실제품 등 내놓는 제품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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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폐용기에 집중하다

기쁨도 잠시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만들면 성공은 하는데 제품수명이 길지 않았다. 1~2년이 지나면 다른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야 했다. 효율성은 떨어지고 재고는 늘어났다. 여기서 김 회장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시작된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답이 ‘브랜드’라고 생각했다. 소비자가 기억할 브랜드를 달기 위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김 회장은 그가 취급하던 600개의 제품 중 599개를 창고에 넣어놓고 하나에 ‘올인’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선택된 것은 ‘밀폐용기’였다. 잘 깨지지 않아 운송 및 보관이 쉬운 제품, 부피가 크지 않은 제품, 계절을 타지 않는 제품,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은 제품 등 20여 가지 요건을 유일하게 만족시키는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10억 원의 R&D 비용을 투자했다. 1년 후인 1998년 그는 ‘전혀 새지 않는’ 밀폐용기를 만들었다. 제품 이름은 ‘락앤락(Lock & Lock)’으로 정했다. ‘두 번 잠근다’는 뜻이다. 1999년 제품을 시장에 내놨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시장 반응이 썰렁했다. 왜 안 팔리는지 직접 보기 위해 대형 마트로 가서 소비자의 반응을 관찰했다. 처음엔 신기해하며 들었다가 갸우뚱하고 다시 내려놓는 모습을 보면서 설명이 필요한 제품이란 것을 알아냈다.

그는 제품을 설명할 방법으로 TV 홈쇼핑을 활용하기로 했다. 국내보다 먼저 미국과 캐나다에서 홈쇼핑 채널인 QVC를 통해 제품을 소개했다. 진행자가 락앤락 속에 지폐를 넣고 물속에 한참 넣었다 꺼내 뚜껑을 열었다. 조금도 젖지 않은 지폐를 보고 소비자들이 줄줄이 주문 전화를 했다. 해외에서의 성공이 소문을 타면서 락앤락은 국내 홈쇼핑에서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락앤락 성공신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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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앤락 하나로 1조 원 이상의 부를 축적한 김준일 회장. 그의 성공에는 제조업으로의 전환, 단일 제품으로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두 번의 결단이 크게 작용했다.



“주방생활용품 톱 브랜드가 목표”

김 회장은 2003년, 1050억 원의 매출을 올린 해에 중국 진출을 결심했다. 한국 시장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매출 기록을 보고 ‘일시적인 과수요’임을 간파한 것이다. 국내 매출 감소를 예견하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로 했다.

김 회장은 중국 현지에 공장을 세웠지만 해외 진출 초기에는 관세와 운임을 내면서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수입해 팔았다.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중국인에게 ‘메이드 인 차이나’보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고급 제품이란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4년 동안 브랜드 충성도를 높인 후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락앤락은 지난해 3분기까지 3564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해외 진출 확대와 제품 종류를 다양화한 게 주효했다.

락앤락은 현재 11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한다. 해외 22개 현지 영업·생산법인을 통한 해외 매출 비중이 약 70%다. 특히 중국 시장 매출 기여도가 높다. 지난해 매출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5%다. 중국 매출은 진출 첫해인 2004년부터 연평균 103%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아직 주방생활용품 전반을 다루는 글로벌 기업은 없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업체들이 분야를 넓히는 중이다.

밀폐용기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김 회장은 ‘주방용품업계 황제’가 되는 것이 목표다. 김 회장은 밀폐용기에 집중하면서도 꾸준히 주방생활용품 개발에도 투자하고 있다. 2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현재 세 가지 프라이팬 시리즈 등 200여 가지 주방용품, 욕실용품 등 각종 생활용품을 취급한다. 이미 중국에서는 ‘생활용품 전문업체’로 이미지를 굳혔다. 김 회장은 “중국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다”며 “아시아 지역을 시작으로 2020년 매출 10조 원의 종합 주방생활용품 톱 브랜드로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승민 기자 hamquixot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