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는 전 세계 와인업자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지향점이다. 그렇다면 보르도에서는 언제부터 와인이 생산됐던 것일까. 세계 와인의 중심, 보르도 와인의 원류를 따라가 본다.
수확한 포도가 숙성되고 있는 바릭
수확한 포도가 숙성되고 있는 바릭
카베르네 계열의 원조 품종 ‘비투리카’

보르도 와인의 시작은 대략 1세기경으로 추측한다. 여러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당시 겨울철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이 지역에 자생하던 대부분의 포도나무가 죽게 됐다. 마침 새로 보르도 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로마계 이주민들이 ‘비투리카(Biturica)’라는 새로운 품종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 포도나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비투리카는 지금의 ‘카베르네(Cavernet)’ 계열 포도나무들의 조상인 듯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카베르네 프랑’ 등의 조상이 바로 비투리카인 셈이다.

다음으로 보르도 와인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시기가 바로 아키텐 여공작과 나중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헨리 플랜태저넷의 결혼이다. 이때가 1152년이다.

원래 바이킹족이었던 플랜태저넷 가문은 100년 전 프랑스를 침공했으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프랑스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이들 가문은 프랑스 왕이 하사한 브레타뉴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헨리 플랜태저넷(프랑스어로는 앙리 플랑타쥬네라고 읽는다)은 남부의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있는 아키텐 여공작과 결혼하게 된다. 당시 풍습대로 아키텐 여공작은 지참금으로 비옥한 아키텐 지방의 풍부한 물자를 가져왔는데, 헨리 플랜태저넷은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 필요한 충분한 준비를 해서 잉글랜드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헨리 플랜태저넷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보르도는 영국령에 속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보르도에서는 영국으로 와인을 수출(엄밀하게 말하면 같은 국가이므로 수출이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했고, 영국에서는 보르도에 음식과 섬유, 금속 등을 수출했다.

보르도와 영국 간의 대규모 무역은 1453년 가스티용(Castillon) 전투에서 프랑스가 영국을 패퇴시킴으로써 막을 내린다. 보르도가 다시 영국령에서 프랑스령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잔 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한 전쟁이다. 이때 마지막까지 보르도에 남아 항전했던 장군이 탤벗 장군이고, 그의 영지는 지금도 보르도에 남아 장군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그의 영지였던 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바로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샤토 탈보(Chateau Talbot)’다.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조화를 이룬 풍경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조화를 이룬 풍경
병균에 의한 두 번의 위기를 극복한 보르도 와인

17세기가 되면서 보르도에는 새로운 상인들이 와인을 사러 왔는데 네덜란드 상인들, 한자(Hansa)동맹의 도시에서 온 상인들, 그리고 브레타뉴에서 온 상인들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보르도는 세계와 무역하는 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런 열기는 18세기에 이르러 더 확장돼 서인도 제도의 앤틸리스(Antilles) 열도나 도미니카공화국의 산토도밍고에서도 상인들이 찾아오게 된다. 프랑스 혁명이 있기 전까지 보르도가 최대의 영예를 누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영국에서는 보르도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단지 10% 정도만 수입했지만, 고급 와인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런던의 사교계에서는 와인에 열광하는 귀족들이 많아 고급 와인에 대한 수요가 넘쳐났다.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 보르도에 대재앙이 밀어닥쳤다. 오이듐균에 의해 포도나무에 병이 생긴 것이다. 1857년이 돼서야 유황을 이용해 소독하는 방법으로 오이듐균에 의한 병을 퇴치할 수 있었다.

오이듐균에 의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에 보르도에서는 19세기 중 가장 위대한 빈티지가 연속으로 나오게 된다. 1844·1846·1847·1848 빈티지가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1855년에는 메도크, 소테른, 그라브 지역의 와인을 묶어 등급 체계를 발표하면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러한 번영은 1864년과 1865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는 전 세계 식민지 경영에 성공해 끊임없는 부를 축적해나가는 런던의 영향이 매우 컸다. 런던은 보르도 와인 시장에 있어 양으로나 금액으로나 따라올 자가 없는 가장 중요한 시장이 됐다.

그런데 보르도는 1879년부터 1892년 사이에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 위기는 필록세라라고 하는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작고 노란 벌레로부터 유발됐다. 1893년에야 필록세라에 의한 위기는 극복됐다. 그 방법은 바로 필록세라에 강한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 위에 프랑스 포도나무 줄기를 접붙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도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뿌리에 노균병(Mildew)이 발생한 것이다. 노균병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것은 ‘보르도의 걸쭉한 죽’이라 불리는 라임과 황산구리의 혼합물이었다.
와이너리에서 내려다본 포도밭
와이너리에서 내려다본 포도밭
코냑과 알마냑 탄생의 비밀

20세기에 들어서는 가짜 와인의 등장으로 보르도 와인의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져서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 도입한 것이 바로 와인 생산지 명칭 사용에 대한 통제였다.

‘보르도’라는 이름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가 1911년 처음 나왔고, 1936년에는 메도크 지역 내에서 보다 다양하게 와인 생산지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통제하는 원산지 명칭 통제위원회가 지역별로 발족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라브와 생테밀리옹 지역에서는 1955년에 비슷한 위원회가 발족해 와인 생산지 명칭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제도를 통칭해 AOC (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 제도라고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익숙하게 사용했던 AOC라는 명칭도 이제 AOP(Appellation d’Origine Protect)로 변경된다. 통제(controlee)라는 명칭이 보호(protect)로 변경되는 것이다. 통제에서 보호로 이름이 바뀌는데 실제로는 뭐가 바뀔지 아직은 확인하기 어렵다.

영국과 보르도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보르도 바로 북쪽의 코냑 지방과 동쪽의 알마냑 지방에서는 새로운 술이 탄생했다. 보르도와 다름없이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는 두 지방에서는 가격 경쟁력(영국 수출 시의 관세) 때문에 해마다 팔리지 않고 쌓여가는 와인 재고 때문에 골치를 앓게 된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증류주였다. 안 팔리는 와인을 증류해 코냑과 알마냑이라는 위대한 브랜디가 탄생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보르도는 아직도 세계 와인 시장의 중심에 서있고, 투자할 만한 와인을 해마다 쏟아놓고 있다. 세계 와인업자들이 새로운 기술과 정성으로 보르도 와인을 뛰어넘으려고 애를 쓰고 있기도 하다. 확실한 목표점과 중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보르도가 해주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 와인업계가 쉼 없이 좋은 와인 생산을 위해 달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바릭이 저장되고 있는 대형 와이너리
수많은 바릭이 저장되고 있는 대형 와이너리
김재현 하나은행 WM센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