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타기 예능보유자 인간문화재 김대균
아홉 살, 외줄 하나에 인생을 걸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 김대균 명인은 줄 위에서 철도 들고 인생도 배웠다. 그가 최근 선물 하나를 받았다. 우리의 줄타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 폭 2.7cm 좁디좁은 외줄에서 걷고, 뛰고, 비상하며 허공과 싸워온 그의 35년 삶의 이야기다. “10대에는 줄 위에서 줄 학습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20대는 줄 위에서 날아다녔고, 30대에는 줄타기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40대 중반이 돼누군가 제게 줄타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안갯속을 걷듯 오리무중입니다’라고.”
줄에 오르기 전 지상에 두 발을 딛고 풀어놓은 줄광대 김대균 명인의 재담(才談) 속에 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으로 사는 곳을 옮겼을 때부터 줄을 탔다고 하니 외줄에 몸을 맡긴 것이 꼬박 35년.
그런 그가 불혹을 넘긴 지금 줄타기를 오리무중이라 표현하는 것은, 줄 위에서 세월의 깊이만큼 겸손해졌기 때문이리라. 전국에 4~5명밖에 남지 않은 줄광대 가운데 유일한 인간문화재인 김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로서 줄타기와 재담, 음악이 어우러진 1300년 전통의 우리 줄타기의 명맥을 잇고 있다.
Scene #1. 줄타기를 좋아했던 아홉 살 소년
“고향이 전북 정읍이에요. 아버지께서 판소리를 좋아하셔서 예전엔 어른들이 집에 소리꾼들을 불러다가 사랑방에 기거시키며 소리를 배우곤 하셨죠. 아버지도 소리를 하고 싶으셨는데, 할머니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러다 제가 아홉 살 때 정읍에서 용인 한국민속촌으로 옮겨왔고, 아버지는 민속촌서 근무를 하셨죠. 실제로 전시가옥에서 살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니 민속촌이 제 놀이터였습니다. 그렇게 뛰놀다가 줄을 타게 됐고, 김영철 스승님께 줄타기를 배우게 됐죠.”
아홉 살 소년 김대균이 줄을 타게 된 사연이다. 스승이신 고(故) 김영철(1920~88: 1976년 인간문화재 등재) 명인이 줄을 타면 그는 낮은 줄에 올랐다. 두 발을 외줄에 맡긴다는 것이 꽤나 공포스러운 일이라지만, 개구쟁이 기질에 배짱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그에게 줄타기는 그저 재미있는 놀이였다. 지나고 보니 아들이 잘 놀던 줄 위에 아버지는 이루지 못한 당신의 꿈까지 실었을지도 모른다.
민속촌에서 놀며 배운 줄타기는 자연스럽게 소년 김대균의 꿈이 됐고, 줄의 높이도 점차 높아갔다.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씩 줄을 타다 보니 학교에 갈 시간도 없었다.
선생님이 민속촌으로 찾아와 과외를 해주니 학교는 시험 치러갈 때만 찾았다. 나중엔 그나마도 어려워 학교에 가지 않았다. 벌건 대낮이나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야 하는 밤, 어떤 환경에서도 줄 하나에 집중하고 연행(演行)할 수 있기까지 혹독한 훈련과 연습이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과 몸의 호흡이 맞아가던 때, 스승께서 거동이 불편해 누워 생활하시면서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거동을 못하시니 한 동작을 대여섯 가지로 나눠서 말씀으로 가르치셨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그 내용을 저한테 설명하시고, 저는 줄 위에서 아버지 지시대로 움직였지요. 그런데 스승님의 교수법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과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섯 가지 동작 중에 1번과 3번, 2번과 3번, 나중엔 1번에서 5번까지 한꺼번에 지시를 하시면 동작이 저절로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과학적이에요.(웃음)”
열세 살이던 1980년 줄타기 전수자로 선정된 후 1987년에는 줄타기 전수조교가 됐고, 1982년부터는 한국민속촌에서 전속공연 무대에 올랐다. ‘줄광대 김대균’으로 줄 위에서 놀 때 그 옛날 스승님의 술을 쳐드리며 들었던 이야기들은 걸쭉한 재담의 소재가 됐다. Scene #2. 스승의 타계, 방황했던 이십대
민속촌 전속공연을 시작하며 3m 높이, 오름줄과 내림줄이 만드는 장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비상하며 줄 위에서 놀았다. 줄 위로 1m가 넘게 뛰어 올랐다 양반다리로 내려앉기도 하고, 몸을 반대 방향으로 틀어 내려앉으며 관객의 가슴을 있는 대로 졸이도록 만드는 줄광대의 연행은 가히 ‘놀음’이다.
그래서 줄타기는 ‘줄놀음’으로 불리기도 한다. 줄 위에 설 때만 느낄 수 있는 무념무상의 희열은 오직, 줄에 집중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줄에 끌려가지 않고 줄이 ‘안기게’ 만드는 것은 줄광대와 줄의 끊임없는 사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줄이 한창 안기던 시기,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때늦은’ 사춘기를 맞이하게 된다.
“제겐 정신적 태산(泰山)이셨던 스승님이 1988년에 작고하셨을 때였죠. 그 후 2년 동안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고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어요. 줄 타느라 모르고 지나갔던 사춘기가 찾아온 거죠. 제가 타고난 ‘촌놈과’인데 담배와 술을 그때 배웠을 정도였으니까요. 민속촌 공연도 몸에 익을 대로 익으니 연습을 별달리 하지 않아도 공연 시간은 흘러갔고, 2년간은 작정하고 놀며 방황했어요. 예술특기자로 군 면제 혜택을 받아놓고도 군대를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제가 줄을 안타면 1300년 우리 줄타기의 맥이 끊어지겠구나 싶더라고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줄타기는 제게 주어진 사회적인 책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때부터 공부에 정진했어요.”
그때부터 민속촌 공연이 끝나면 서울로 달려갔다. 줄 소리와 재담, 춤, 판소리까지 고 이동안·서우향 명인에게서 사사하며 파고들기 시작했다. 제때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탓에 고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대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도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줄타기 분야가 없었던 터라 탈춤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한예종 2학년 재학 당시인 2000년 줄광대 김대균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줄타기 인간문화재 1호였던 스승에 이어 2호가 된 것. 하지만 1300년 전통의 줄타기를 잇는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그치지 않았다. 안동대 대학원에서 민속학으로 석사를 따고, 현재는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한예종에서 줄타기 강의를 하며 줄타기의 명맥 잇기와 우리 전통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고민을 놓지 않고 있다. 다행히 아홉 살 ‘소년 김대균’처럼 지금 줄타기를 배우는 꿈나무들도 여럿 있다. 그 가운데 중학교 1학년인 송승준 군은 가끔 스승의 공연에 설 정도의 실력을 갖춘 수제자다. Scene #3. 외줄 위에서 깨달은 나의 일, 나의 삶
줄을 탈 ‘될성부른 놈’은 근성이 있어야 한다. 허공으로 비상했다가 내려앉다 엉덩이가 터져 하얀 모시 바지에 선혈이 낭자한 지경에 이를지라도 줄에서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연행을 이어갈 수 있는 집중력 또한 필수다. 20대 이후로 엉덩이 보호대를 던져버렸다는 그는 35년을 탄 줄에서 요즘도 엉덩이가 터진다고 한다.
‘보물단지’라며 열어 보여준 그의 여행가방 안에는 손때 가득한 초립과 부채가 나왔다. ‘아슬아슬’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꽃분홍색 부채의 너덜너덜해진 천은 부챗살에 겨우 붙어 있었다. 새로 맞춘 공연복도 있지만 21년 전부터 입던 해진 공연복을 자주 입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1997년 공연 중에 줄이 끊어지는 큰 사고가 있었어요. 1년 정도 병원 신세를 졌지요. 꼬박 1년 후 줄 위에 다시 섰을 때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요. 줄을 20년 이상 타면서 엉덩이와 발바닥에 굳은살이 엄청났었는데, 그게 없어지는 데 두 달이 채 안 걸리는 겁니다. 하하하….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두 달도 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없어진 20여 년의 흔적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가 너덜너덜해진 부채를 새것으로 바꾸지 않는 것도, 해진 공연복을 20년이 넘게 빨아 입는 이유도 그렇다. 초심을 잊지 않으려는 예인의 겸허이며 자세인 것이다. 1년에 60~70차례씩 지역 축제를 돌며 공연하는 그가 공연 전날 서둘러 내려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세계 각국에 저마다의 줄타기가 있어요. 우리 줄타기가 유네스코가 인정할 정도로 평가받은 것은 줄을 타는 것에 삼현육각의 음악, 줄광대의 재담이 어우러진 공연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줄광대의 재담에 느낌이 없다면 앵무새일 뿐이죠. 지역축제 섭외가 오면 미리 내려가서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도 가보고 문화재도 살펴봅니다. 그런 것을 녹여냈을 때 공연을 찾은 관객들과도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재담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풍자와 해학이에요. 한번은 모 지역축제에 갔는데, 그곳 군수가 너무 거드름을 피우더라고요. ‘당신 제대로 걸렸다’ 싶어 공연 중에 1탄, 2탄, 3탄으로 군수를 비틀어 재담을 날렸더니 공연이 끝나고 상차림이 달라지더라고요.(웃음)” 스승이 한평생 그랬듯 그 역시 몸이 허락할 때까지는 우리 삶의 이야기를 줄 위에서 걸쭉한 재담으로 풀어낼 작정이다. 관객과 줄광대의 소통이 정점에 이르는 최고의 공연, 신명나는 한판 줄놀음에 관한 한 ‘국가대표’가 되기를 자청한다.
“우리 줄타기를 국제적 브랜드 가치로 따지자면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줄놀음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대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제자들이 줄을 타고 있으니 그 아이들이 국제무대에서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제가 길라잡이가 돼주어야 하고요. 과천시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니 조만간 줄타기 전용 공연장과 교육장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줄타기보존회 대표로 있는 그가 홈페이지에 인사말로 남긴 글귀를 소개한다. 하늘과 더욱 가까워지려 뛰어 오르는 줄광대 김대균의 고백이다.
“‘어떤 사람이 그러데요.줄 하나만 잘 타면 빨리 성공한다고….
그래서 저는 그 말만 믿고 홑 아홉 살에 줄에 올라와
줄타기를 한 지 30여 년이 지났습니다만, 별 볼일 없대요. 매일 엉덩이만 터지고….’
제가 줄판에서 자주 쓰는 말입니다.
물론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만, 그 대사를 할 때마다 저는 가슴이 저려옵니다. 왜냐하면 전통 줄타기의 맥을 잇기 위해 외로이 홀로 걸어온 세월만큼이나 저의 양쪽 어깨에 무게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흰 바지저고리에 초립을 쓰고, 부채를 펴들고, 줄에 오르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행복합니다. 언제나 하늘과 더 가까운 삶이 있기에….”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인물)·줄타기보존회 제공(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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