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하 UL코리아 사장
황순하 UL코리아 사장은 자동차 전문가이자 미술품 애호가이며, 와인 동호회 회장이다. 다양한 문화적 호기심과 경험을 가진 그는 가정, 일과 함께 그림과 와인, 자동차 등 개인적인 삶이 자신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안전규격 개발 및 인증기관인 UL코리아의 황순하 사장은 자동차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 분야 전문가다. 자동차 칼럼니스트로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는 한때 아트라이프샵닷컴이라는 문화 벤처기업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미술품 컬렉터이자 와인 동호회 아미드뱅(Amis de vin) 회장인 그는 최근 소믈리에 시험에 합격하며 또 한 번 주변을 놀라게 했다.
지적·문화적 호기심의 시작은 그림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다니던 무렵부터 그림에 관심이 높았다. 정확히 말하면 미술 관련 책이 먼저다. 미술 서적을 읽으며 미술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고, 그 후 그림을 보러 다녔다. 심심하면 화랑에 들러 그림 보기를 즐겼다.
“그림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림을 자주, 그리고 많이 보라고 합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미술사와 작가에 대해 모르면서 그림만 본다고 그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거든요. 서양미술사, 한국미술사 서적 2~3권은 읽어야죠. 신문과 잡지에서 미술 관련 기사도 관심 있게 챙겨보고요.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그림도 보이게 마련입니다.” 어머니가 선물한 최욱경의 작품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올 때까지 그림을 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첫 직장인 기아자동차에 입사한 후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판화 한 점을 산 것이 컬렉터로서의 첫발이었다.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판화였다.
판화 한 점을 샀을 뿐인데, 서울 인사동 화랑에서 대우가 달라졌다. 개인전이 열리면 먼저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 나갈 때면 따로 커피숍을 찾을 필요 없이 갤러리에서 차를 내줬다. 차를 내주면서 창고에 쌓아둔 그림도 함께 보여줬다. 전시장에서는 볼 수 없던 귀한 그림들이었다. 그 재미에 그는 인사동을 더 자주 찾게 됐다.
그러던 1988년 그는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그림 한 점을 선물 받는다. 바로 최욱경의 회화 한 점을 선물 받은 것.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는 아들을 안쓰럽게 보신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그림을 선물한 것이다.
“호암미술관에서 최욱경 선생의 유작 전시회가 있었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전시장에 갔는데, 작품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치열한 작가 정신이 엿보였다고 할까요. 작가의 내장까지 보여주는 듯했어요. 예쁜 그림보다 그런 치열함이 느껴지는 작품에 끌렸어요. 그중 하나를 골랐는데, 작품 가격을 물어보시곤 어머니가 놀라시더군요. 12호짜리 작품인데, 호당 40만 원이었으니까 480만 원짜리 그림을 사게 된 거죠. 제겐 너무나 소중한 작품이라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를 행복하게 해준 작가와 작품
이후에도 그는 틈만 나면 인사동 화랑가를 찾았고, 적지 않은 작품을 컬렉션했다. 그중에는 오윤의 판화 작품도 있는데, 너무 갖고 싶어 화랑에 부탁해 겨우 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는 대로 주고 컬렉션했다. 그는 제 가격을 주고 사야 애착이 더 간다고 했다.
화랑가와 일찍 인연을 맺으면서 작가들과의 교류도 적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한만영이다. 한만영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였다. 그림 속에 3~4세의 아이가 룩색(배낭)을 매고 가는데 그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중에 작가를 알게 되면서 잘 정돈된 느낌이 작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일단 도록을 구해 다른 작품을 살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작품을 구입할 요량으로 작가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 작품을 사겠다는 그에게 작가는 고맙지만 화랑을 통해서 사라는 하더란다.
“나중에 소개로 한만영 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어, 그때 얘기를 했더니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그러면서 젊은 사람한테 바른 길을 보여주려 했다며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뒤에 한두 차례 그림을 구하려고 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희 집에 오실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작품 하나를 선물로 주셔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급기야 2000년 아트라이프샵닷컴이라는 아트 벤처기업을 세우기에 이른다. 아트라이프샵닷컴에는 오랜 친구인 김재준 국민대 교수를 비롯해 40여 명의 각계 전문가가 합세했다.
순수문화의 대중화라는 모토로 시작한 아트라이프샵닷컴은 초기에는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오랫동안 자동차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그는 사이트에 한국의 자동차 문화에 대해 칼럼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창립 2년 만인 2002년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다. 폭우로 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갤러리와 사무실을 겸하던 지하 1층이 온통 물에 잠긴 것이다.
“김재준 교수 자택 지하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새벽 2시에 축대가 무너진 겁니다. 사고를 당하자 최욱경 선생 그림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랍니다. 부랴부랴 그건 챙겨 나왔지만 나머지는 다 물에 젖었죠.”
그 일을 계기로 아트라이프샵닷컴도 정리하고, 컬렉션도 한풀 꺾였다. 평소 그림 사 나르는 그를 마뜩잖게 보던 아내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이듬해에는 쌍둥이까지 태어나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 그는 컬렉션을 그만두었노라고 했다.
대화를 위한 술, 와인에 취하다
그림에 소홀해진 대신 그는 와인에 심취했다. 본격적으로 와인을 마시게 된 것은 2000년, 와인나라에서 운영하던 와인아카데미를 다니면서다. 물론 대학 시절 마주앙을 통해 와인을 처음 접하기는 했다.
“사실 마주앙이 한국에 와인을 알리는 데 일조한 면은 있지만, 와인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킨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당시 수입한 마주앙은 굉장히 달아서 와인은 달콤하다는 인식을 심어줬거든요.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드시라고 와인을 드리면 떫고 맛이 없다고 안 드시는 거예요. 음식이랑 같이 드시는 게 와인인데 달면 되겠느냐고 말해도 통하지 않더라고요. 그러고는 마트에서 달고 싼 와인을 사다 드셨거든요.”
그가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실은 술이 약한 덕도 컸다. 기아차를 나와 컨설팅회사 아더앤더슨에서 자동차 담당 파트너로 일하면서 클라이언트를 만날 일이 많았다. 반주를 겸한 저녁과 폭탄주로 이어지는 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게 와인 바였다.
술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그 민족만의 음주문화가 있다. 술의 속성을 보면 그게 나타난다. 도수가 높은 위스키와 보드카는 추운 지방에서 몸을 데우는 도구다. 반면 한국의 소주는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한다. 식사에 곁들이는 와인은 대화를 위한 술이다.
처음에는 아더앤더슨에 있던 동료 컨설턴트들을 꼬드겼다. 남녀 비율도 적당히 조율해서 와인아카데미 초급 과정에 등록했다. 주 2회 3개월 과정이었는데 와인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은 배울 수 있었다.
와인아카데미를 나온 후 실험적으로 클라이언트를 데리고 2차로 와인 바에 갔다. 그런데 클라이언트들의 반응이 별로였다. 그 자리를 굉장히 불편해했다. 결국 폭탄주로 돌아갔지만 배운 게 아까워 와인 모임을 만들었다. 얼마 전 10주년 행사를 치른 와인 동호회 아미드뱅이 그것이다.
삶에서 그림과 와인이 갖는 의미
2001년 처음 모임을 가질 때는 각자 한 병의 와인을 가지고 와서, 와인을 설명하고 서로 테이스팅했다. 그러다 보니 부담을 느끼는 이들이 생겼다. 그래서 방향을 식도락 모임으로 틀었다. 이탈리아 음식, 중식, 일식 등 다양한 음식을 와인과 매칭하는 시험을 했다. 한 번 간 레스토랑은 다시 가지 않는다는 원칙 덕에 지금까지 아미드뱅이 거쳐온 레스토랑만 120여 곳에 이른다. 모임에서는 또한 와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화제에 올린다.
모임에서는 각자 별칭을 부른다. 사적인 모임에서 전무님, 사장님 하기가 어색해서다. 그렇게 지은 이름이 재밌다. 초기에 나온 회원들은 샤토의 이름을 따 콩티나 라피트 등의 별칭으로 불렸고, 나중에 밑천이 달리자 코르크, 타블르 등의 별칭을 붙였다.
“와인을 마시던 초기에는 당연히 싼 와인을 마셨죠. 그런데 싼 와인은 품질이 고르지 못해요. 개인적으로 피노 누아 품종의 여리고 섬세한 와인을 좋아하는데 초기에는 운반상 문제가 있어서 수입이 어려웠어요. 그러다 보니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를 중심으로 하는 보르도 와인이나 미국, 칠레 등 신대륙 와인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선호하는 와인이 달라지더라고 했다. 젊어서는 보르도 와인을 마시다 지금은 부르고뉴 와인이 좋다고 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젊어서는 스파게티나 펜네 등 밀가루 음식이 좋았는데 지금은 속에 부담이 없는 리조토를 즐겨 찾는다. 와인 이야기를 하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책상 뒤쪽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왔다. ‘샤토 무통 로트칠드’ 1994년 빈티지였다. 와인 레이블에는 ‘지현이 와인, 내가 어른이 되는 날 따는 특별한 와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와인에는 그만의 사연이 담겨 있다. 유학 간 큰딸이 1994년생이다. 프랑스에서는 성인이 되는 날, 아이가 태어난 해의 와인을 꺼내놓는다. 그걸 보고 그도 큰딸이 태어난 해의 와인을 몇 병 사뒀다. 다행히 큰딸이 태어난 해는 빈티지가 그리 좋지 않아서 저렴하게 구입했다. 그런데 쌍둥이가 태어난 2003년은 빈티지가 좋아서 많이 사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제게 그림이나 와인은 퍼스널 라이프(personal life)에 해당합니다. 퍼스널 라이프는 가족(family life), 회사(company life)와 함께 제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삼발이가 균형을 이루듯 제 삶을 정립(鼎立)하는 중요한 부분인 거죠. 주중에는 회사에서,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냅니다. 그 대신 토요일은 저를 위해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직원들한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황순하
현 UL코리아 사장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미시간대 MBA
대우자동차판매 상무
아더앤더슨 자동차산업 파트너
GE코리아 전무
세라젬 부사장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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