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는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와인 생산국이다. 최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서 와인 애호가들은 싼 가격에 칠레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와인의 유통 구조를 보면 그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몬테스 알파(Montes Alpha), 1865 등 칠레 와인의 인기는 아직도 대단하다. 몬테스 알파는 벌써 10년 넘게 단일 품목으로는 최대의 판매 기록을 달성하고 있으며 그 아성에는 어떤 와인도 도전할 수가 없다. 몬테스 알파를 판매하는 와인타임의 고민이 회사 매출의 70% 이상을 몬테스 알파에 의존한다는 점일 정도다. 1865도 마찬가지다. 원래 1865는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의 설립연도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요즈음의 해석은 그와 다르다. 18홀을 65타에 치라는 의미를 담아 골프장에서 인기 있는 와인이 됐다. 7언더파를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와인이니 골프장이 아니라도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 환영받고 있다. 칠레 와인의 태동이 된 파리 만국박람회
칠레의 유명한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1860년대부터 와인을 생산해오고 있다. 이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대부분의 와이너리가 그때 조성된 걸까. 그 비밀은 1855년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나폴레옹 3세(우리가 아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는 나폴레옹 1세의 정복전쟁에 패해 부담하게 된 엄청난 배상금에 허덕이다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런던 만국박람회를 본떠 1855년에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때 프랑스의 특산품인 와인을 내놓게 되는데 프랑스 사람들이야 워낙 와인을 잘 아니 상관없지만 와인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이고 어떤 와인이 덜 좋은 와인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이에 프랑스인들은 외국인을 위한 획기적인 와인 등급체계를 고안해 내게 된다.
우선 프랑스에서도 와인으로 가장 유명한 보르도 지역을 선정하고 그중에서도 또 훌륭한 와인이 생산되는 메도크 지구로 지역적인 선을 긋는다. 더 나아가 메도크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6000여 개의 샤토(포도원) 중에서 최상위 1%에 해당하는 66개의 샤토를 선정하고 이를 1등급부터 5등급까지 메기게 된다. 그러니 5등급이면 나쁜 와인이 아니라 메도크 지구의 최상위 1%에 들어가는 최고급 와인이라는 뜻이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특히 관심을 많이 갖게 된 사람들이 바로 칠레의 포도농장 주인들이었다. 그때까지 식용포도만 재배해오던 칠레의 포도농장 주인들은 와인에 대한 열망을 품고 수차례 보르도를 방문해 각종 와인제조용 포도 묘목을 구해다가 1860년대 칠레에 포도농장을 일구게 된다. 이때 들여온 묘목 덕에 칠레의 와인산업이 태동하게 됐다. 칠레 와인산업이 전 세계에 큰소리를 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뿌리혹박테리아의 창궐로 모든, 정말로 모든 포도나무가 죽어버리고 만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포도농장의 포도나무가 다 마찬가지였다. 어떤 방법으로도 포도나무가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포도원 전체를 물에 침수시켜 보기도 하고, 온갖 농약을 뿌려보기도 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뿌리혹박테리아는 미국에서 들여온 포도나무 묘목과 함께 유럽에 전파된 것으로 해결 방법도 미국에서 찾았다. 뿌리는 미국산으로 하고 줄기에 유럽산 포도나무를 접붙였더니 포도나무가 죽지 않고 견뎠다.
미국 대륙 개척 초기에 많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3년이 지나 포도가 수확될 무렵이면 나무가 다 말라죽어 와인을 만들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뿌리혹박테리아가 원인이었다.
미국 대륙 전체에서 뿌리혹박테리아의 영향이 없는 곳은 로키산맥 너머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 소나마밸리 등이었다. 여기서는 포도묘목이 말라죽지 않아 드디어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 FTA에도 불구하고 와인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
다시 칠레로 돌아가서 칠레의 와인업자들은 유럽 와인의 정통성은 유럽에 있지 않고 칠레에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포도나무 묘목 때문이다. 칠레의 포도나무는 뿌리와 줄기가 모두 유럽의 전통적인 포도나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반면 유럽 특히 프랑스의 포도나무 뿌리는 미국산이고 줄기는 프랑스산인 기형적인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보도가 최근 잇달아 나왔다. FTA를 체결하고도 칠레의 와인 가격이 한 푼도 내려가지 않으니 와인 수입업체가 폭리를 취하는 것 아니냐는 보도였다. 그 화살은 주로 도매업자에게 넘어가고 있다. 도매업자가 취하는 마진을 15~20%라도 줄이면 와인 가격이 많이 내려갈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도매업자가 하는 일은 와인의 운송이다. 용인 보세창고에 보관돼 있는 와인 중 12병을 홍익대 부근과 청담동에 있는 레스토랑 4군데에 3병씩 배달해주는 일은 도대체 누가 하는 걸까. 수입업자가 직접 소매업자인 레스토랑에 판매하면 이 일이 해결될까. 수입업체 사장님이 자기 자가용으로 와인 12병을 가져다가 레스토랑에 배달하면 오히려 기름 값이 더 많이 들 것이 분명하다. 도매업자가 15~20%의 마진을 취하고 와인을 배달해주는 것은 매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그럼 와인 수입업자와 와인 소매업자(레스토랑이나 와인 숍)가 폭리를 취하는 것일까. 문제는 마진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와인의 소비량에 달려 있다. 와인 수입업자, 도매업자, 소매업자가 폭리를 취한다면 와인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1년 만 지나면 벤츠를 타고, 2년 만 지나면 요트를 탈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한 그런 사람은 없다.
보통 와인 한 컨테이너를 수입하면 약 1만2000병 정도의 와인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실제로 판매되는 것은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수입업체가 눈물을 머금고 폐업 세일로 수입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시중에 나오게 된다. 수입업자로서는 팔리는 와인 재고 3분의 1을 통해 수입 원가를 뽑아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무리한 마진을 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대한 논란은 무의미하다. 와인 소비가 더 늘어나야만 와인을 더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와인수입업자의 수는 항상 400여 개로 일정하다. 그런데 해마다 100개의 수입업체가 새로 생겨나고 100개의 수입업체가 폐업을 반복한다.
유럽에 살다가 한국에 돌아온 많은 사람들이 국내에서 유통되는 와인 가격이 너무 비싼 데 놀란다. 그리고는 저렴한 유럽의 와인을 한국에 전파하고자 직접 수입업체를 만들고 진짜로 저렴하고 맛좋은 와인을 한 컨테이너 야심 차게 수입한다. 하지만 실제로 팔리는 것은 언제나 3분의 1 정도이고 나머지는 수입업체 사장의 선물용으로 나가는 게 현실이다. 김재현 하나은행 WM센터 이사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