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현장 보고
‘인도네시아’라고 하면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을 갖기 쉽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지표만을 보고 가난하다고 판단한다면 2011년 지금 현실과는 맞지 않다. 인도네시아는 사실 ‘진짜’ 부자들이 사는 나라다.
급성장하는 자카르타의 경제 현장에서 인도네시아 슈퍼리치와 인니(印泥) 경제를 바라본다.

인도네시아 슈퍼리치, 2015년이면 10만 명
만약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라는 사실만으로 ‘가난한 인도네시아’를 상상했다면 낯선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이 같은 장면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전 인도네시아 부유층들은 명품 쇼핑을 위해 싱가포르나 홍콩 등지로 ‘쇼핑 원정’을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들, 이른바 ‘슈퍼리치’가 늘어난 인도네시아는 어느새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중요성’을 인지한 시장으로 대두돼 대형 쇼핑몰을 중심으로 현지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자카르타에는 스나얀시티(Senayan Ctiy), 퍼시픽 플레이스(Pacific Place), 그랜드 인도네시아(Grand Indonesia), 뽄독 인다(Pondok Indah) 등 많은 대형·고급 쇼핑몰이 들어섰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안정적 성장, 특히 부유층의 성장이 바탕이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인도네시아는 2000년대 중반 이후 6%대의 높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경제 위기로 세계가 2%의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기록할 때도 4.6%의 비교적 안정된 성장률을 보인 나라다. 원유, 가스 등 자원 수출과 함께 내수가 성장한 결과다. 여기에 양극화된 소득 분배 구조로 인해 생산된 부(副)가 상류층으로 쏠리면서 소비재의 주 수요가 되는 소수 부유층의 성장이 이어졌다.
미국의 투자은행(IB) 메릴린치(Merrill Lynch)와 컨설팅업체 캡제미니(Capgemini)의 ‘아시아태평양 부(副) 보고서(Asia-Pacific Wealth Report)’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고액 순자산 보유자(HNWI: 부동산을 제외한 금융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인 사람) 인구가 2008년 1만9000명에서 2010년 3만 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의 HNWI 증가율은 23.8%로 홍콩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또한 이들의 자산규모는 2008년 610억 달러에서 2010년 1000억 달러로 늘었다. 인도네시아의 2010년 GDP가 약 7100억 달러 규모임을 감안하면 국부의 15%를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인도네시아의 슈퍼리치를 주목해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이들의 성장세가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스위스 은행 줄리우스 뷔어(Julius Bear)가 지난 9월 발표한 보고서는 인도네시아의 HNWI 수가 2015년에는 지금의 3배인 약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5%의 증가율로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며, 이 경우 인도네시아 HNWI의 자산규모는 지금보다 21%, 환율을 계산하면 30%가 증가한다.

흥미로운 점은 인도네시아 슈퍼리치의 대부분이 ‘화교’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100대 부자 중 79%, 10위권 내에서는 1명을 제외한 전원이 화교다. ‘인도네시아 슈퍼리치=화교’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다. 또한 상장 기업 가운데 화교 기업의 비중은 70% 이상이다. 인도네시아의 화교 인구는 1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니 전체 인구의 4%인 화교가 국가 경제의 70%를 좌지우지 하는 셈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부유층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화교적인’ 특징을 띤다. 대표적인 것이 이들의 금융자산 보유 방식이다. 인도네시아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현금 보유와 대체투자를 선호한다. ‘아시아태평양 부 보고서’에 의하면 2010년 인도네시아의 HNWI는 금융자산의 8%를 대체투자 방식으로 구성했다.
이는 조사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은행예금보다는 공격적인 투자를 선호하는 화교의 특징과 함께, 최근 인도네시아 경제 성장에 대한 자신감이 더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현금 보유 성향이 1990년대 후반의 반(反) 화교 정책에 대한 트라우마 등 정치·사회적 불안감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때문인지 인도네시아에서 환전하려다 보면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달러를 루피아로 환전할 때 은행에서 신권을 요구하는 것. 현금을 선호하는 인도네시아에서는 보관이 용이한 100달러 신권이 일종의 ‘상품’과 같은 의미가 됐다. 따라서 은행 입장에서는 헌 돈을 받아도 신권을 따로 구해야 하는 수고와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슈퍼리치의 또 다른 특징은 빠른 후계 구도 구성이다. 인도네시아의 화교들에게는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가업을 물려받도록 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가업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지역 전문가복덕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차장은 “영 프로페셔널(young professional)이 빠른 시기에 기업의 핵심 역할을 맡으면서 이들의 소비문화가 전반적인 상류층의 소비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형성한 젊은 소비 트렌드로 인해 부유층이 다른 지역보다 새로운 패션과 정보기술(IT), 자동차에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부유층이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가장 ‘부자답게 사는 부자’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부유층은 가정부, 유모, 운전기사, 주택 경비 등 많게는 한 집에 10여 명을 고용하고 산다. 특히 집안일, 육아 등의 부담이 없는 인도네시아 부유층 여성은 쇼핑 등 ‘돈 쓰는 일’이 소일거리다. 때로는 해외 쇼핑을 위해 아이와 아이를 돌봐줄 유모, 심지어 쇼핑 중 짐을 들어줄 짐꾼까지 비행기 일등석에 태워 가는 인도네시아의 부유층 여성을 볼 수도 있다. 자린고비형 부자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는 인도네시아 문화의 영향도 크다. 인구의 88%가 이슬람교인 인도네시아에서는 부자가 돈을 쓰는 것이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다. 다른 동양 문화권에서는 부자들의 과소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윤회사상은 이에 비교적 관대한 문화를 만들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의 부자는 ‘평소에 쓸 줄 아는 부자’라는 말을 듣는다.
인도네시아의 값싼 노동력도 한 요인이다. 인도네시아의 인구는 2억4000만 명. 세계 4위다. 풍부한 노동 시장과 벌어진 소득 격차는 값싼 임금을 형성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운전기사 한 명의 임금은 보통 300만 루피아(약 37만 원) 정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집에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어색한 외국인도 너무 싼 노동력 때문에 이것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복 차장은 “물론 경제 성장과 함께 임금이 다소 상승하고는 있지만, 워낙 낮은 수준에서 시작했고 인구가 많다 보니 주변의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 임금 상승에서 가장 여유가 있는 곳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수도 자카르타의 ‘비벌리힐스’ 또는 ‘강남’이라 불리는 지역은 ‘대형·고급 쇼핑몰 근처’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쇼핑몰이 실수요자인 부유층의 거주지 근처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뽄독 인다’ 몰이 그 대표적인 예다. 변화가 있다면 최근에는 고급 아파트를 중심으로 쇼핑몰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기존 인도네시아 부유층은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고급 주택에 사는 것이 보통이었고 아파트는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아파트 거주자는 외국인이 많은 편이지만 해외 경험을 쌓은 인도네시아의 젊은 부유층이 서서히 관리가 번거로운 주택보다는 아파트를 찾기 시작했다.

금융계에서는 고급 은행상품의 진출이 눈에 띈다. KOTRA 보고서에 의하면 주요 은행들이 인도네시아 부유층의 자금력을 겨냥, 고소득 상류층 고객을 타깃으로 하는 전략으로 인도네시아에 침투하고 있다. 또한 경제 성장으로 소비 붐이 일어나고,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젊은 층의 소비력이 커지면서 신용카드의 보급률도 급증하고 있다.
증권가에서 바라보는 인도네시아 투자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자원가격’이라는 인도네시아 성장 동력 자체가 유효하기 때문에 아직 유망한 투자처라는 것이다. 허재완 KDB대우증권 글로벌투자분석팀 차장은 “특별히 훼손된 경제 펀더멘털이 없고, 다른 이머징 국가와 비교했을 때 은행대출이나 인플레이션에 대한 부담 등 상대적인 위험요소도 적다”고 설명했다.
자카르타=글 함승민 기자 hamquixote@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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