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儒家)의 경전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논어>(論語)의 첫머리 ‘학이(學而) 편’ 중에서도 아래의 첫 구절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학습’과 ‘친구 사귐’과 ‘자성’을 말하는 이 세 구절이 바로 공자가 제시하는 행복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 구절을 무척 좋아한다. 너무나 좋아하는 나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구절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하고, 책을 읽으면 온갖 근심 걱정이 없어지고 행복하다. 지금도 전공 서적을 제쳐두고도 한 달에 5~6권의 책을 읽는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더 늙거나 병들어서 책을 읽을 수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이다.
나는 책을 통해서 많은 친구를 사귀고 있다. 대학에서 전공 강의를 통해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고, 10년 전쯤부터 30여 명 정도의 벗이 모여 일주일에 한두 번 동양고전 한문 원전을 함께 읽는 모임도 있다. 또 한 모임은 한 달에 두 번씩 독서포럼을 개최해 저자를 직접 초청, 저술 의도와 내용을 듣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갖는데 이 모임에도 70여 명의 벗이 있다. 책과 관련해 만나는 벗과 나누는 대화는 이해관계를 떠나기 때문에 그야말로 반갑고 즐겁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을 파괴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실현 불가능한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된다.
욕심을 버리고 즐겨야 한다
한문 원전을 10년 가까이 읽어오고 있지만 아직도 한문을 대하면 헤매기 일쑤여서 한동안 그만둬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이 금세 다 빠져버리지만 그래도 콩나물 뿌리에 약간 묻은 물 때문에 콩나물은 큰다”는 군색한 비유를 떠올리며 미련스럽게 붙들고 있어서 이제는 학습의 맛을 조금씩 즐기고 있다.
공자도 ‘즐겨라’라고 하면서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한자는 뜻글자로서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그 고유한 뜻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사물과 복잡한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기법을 쓰기 때문에 한문을 정확히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논어>에는 공자와 수많은 제자들 간의 대화가 수록돼 있다. 여기서 ‘어(語)’만 하더라도, 같은 ‘말씀’의 뜻을 가졌지만 ‘언(言)’과는 다르다. 언이 혼자서 일방적으로 하는 말씀이라면, 어는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또한 정(情)을 우선하는 벗을 우(友)라고 말하고, 뜻(志)을 같이하는 벗은 붕(朋)이라고 구별하므로, 멀리서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친구’가 찾아오니 정말 기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쁠 열(說·悅)과 즐거울 락(樂)도 미묘하게 구별하고 있다. 정이천(程伊川)은 열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락은 외면에 있는 것이라고 구별해 주고 있다. 즉, 책을 읽고 익히면 마음속으로부터 기쁨이 솟아나오고,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나면 밖으로부터 즐거움 들어온다는 것이다. 어쨌든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을 함께 표현할 때 우리는 열락(悅樂)이라고 묶어 쓰게 된다. 정자는 “락(樂)은 열(說)을 말미암은 뒤에 얻어지는 것이니, 락이 아니면 군자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필자의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의 ‘학습’과 ‘친구 사귐’의 열락의 경지는 어설프지만 그럭저럭 흉내를 조금씩 내고 있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세 번째 구절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아야 군자’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공자가 마치 내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며 꾸짖는 듯한 말이다. 내 마음속에는 남들이 나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허영심이 있다. 어색한 과시욕이 이따금씩 넘쳐나고 알게 모르게 남의 시선이나 평(評)을 의식하며 남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에 연연하는 한심한 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허물을 없애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 부끄럽고 민망하며 이로 인해 아직도 진정행복하지 않다.
이 구절을 논어의 첫머리에 둔 것은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51세에 대사구(大司寇)의 벼슬을 잠시 역임했으나 평생 동안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천하를 두루 다녔으나 끝내 실패하고, 68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마 그때쯤 이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공자도 이 세 번째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의 단계에 들 수 없음을 말한 것이리라. 반복되는 무수한 학습과 수많은 지식인들과의 교유로 인격을 갈고 닦아 드디어 이루는 덕(德)의 경지가 바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은 경지’가 아닐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나는 법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괴로워할 때가 가끔 있기 때문에 부끄럽다. 그런데 최근에 순자(荀子)의 주석에서 “군자는 스스로 귀하게 될 수는 있으나 남들이 자기를 귀하게 여기도록 할 수는 없고, 스스로 믿음성 있게 될 수는 있으나 남들이 자기를 믿게 할 수는 없으며, 스스로 쓰일 수 있게 될 수는 있으나 남들이 자신을 쓰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스스로 수양해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새로워졌다.
이와 함께 앨버트 엘리스와 로버트 하퍼가 쓴 <마음을 변화시키는 긍정의 심리학>(A Guide to Rational Living)이란 책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극단적 욕구에서 벗어나는 법’이란 글을 읽고 상당한 위안을 얻었다.
이 책의 주장을 보면, “우리는 종종 ‘비합리적인 믿음’ 즉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저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실현 불가능한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된다고 주장한다.
요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과 ‘인간의 가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인정하거나 가치 있는 존재라고 평가해도 그 가치는 비본질적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가치 있거나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존재인 이유는, 당신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유는, 어리석게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치 있다고 우리 스스로가 정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순자의 주석과 엘리스·하퍼의 글에서 일맥상통함을 느꼈고, 한동안 실망스러웠던 나 자신에 대한 갈등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남들의 시선에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적인 성찰로 스스로 학습하며 끊임없이 다듬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러스트·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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