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기 (주)석교상사 대표


(주)석교상사는 최근 전북 익산 베어리버 골프리조트에서 자선 골프대회를 열고, 모금액 1억여 원을 사회봉사 단체에 기부했다. 올해로 6번째, 자선 골프대회를 열고 있는 이민기 석교상사 대표를 서울 대치동 본사에서 만났다.
“남이 가지 않은 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골프용품 브랜드 투어스테이지와 파이즈를 판매하는 (주)석교상사의 본사는 강남구 대치동에 있다. 고객센터와 매장이 있는 2층과 3층 사무실을 지나 4층에 이르면 특별한 공간이 펼쳐진다.

카페 드 맘보(Cafe de Mambo)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는 커피를 로스팅하는 기계와 그라인딩 기계, 드립에 필요한 주전자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는 인도네시아, 코스타리카 등 세계 각국의 커피가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계절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리던 10월 중순, 인터뷰를 위해 찾은 곳은 카페 드 맘보였다. 카페에 들어서자 이 대표는 “커피부터 한 잔 하시죠”라며 그라인딩 기계로 다가갔다. 그라인딩한 커피를 드립하며 그가 말문을 열었다. 커피를 내리는 손놀림이 무척 자연스럽고, 또 능숙했다.



매일 아침 아내를 위해 커피 내리는 남자

그가 커피에 취미를 붙인 건 3년 전이다. 시작은 아내가 먼저였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면 좋다면서 아내가 함께 커피전문가 과정을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등록한 곳이 단국대 평생교육원 커피전문가 과정이었다.

“첫 시간에 선생이 ‘왜 커피를 배우게 됐냐’고 질문을 하더군요. 출석부 순으로 답을 하는데, 뒤쪽에 있다 보니까 딱히 답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아침 아내에게 커피를 타주려고 배우러 왔다’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죠. 그 뒤 선생도 제게 더 많은 걸 가르쳐 주려고 하시더군요. 그러다 점점 커피에 빠져들게 된 거죠.”

아내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더 커피에 빠져서 로스팅 과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됐다. 물론 약속대로 그는 아침마다 아내를 위해 커피를 내린다. 커피 내리는 일은 회사에서도 계속된다.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카페 드 맘보. 그는 이곳에서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며 중역 회의를 주재한다.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카페 드 맘보. 그는 이곳에서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며 중역 회의를 주재한다.
매일 아침 그는 카페 드 맘보에서 임원 미팅을 한다. 미팅이라지만 딱히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대표가 그날 마실 커피를 정하면 상무가 그라인딩을 하고 이사가 잔을 데운다. 커피를 내리는 일은 이 대표의 몫이다. 그렇게 커피를 준비하고 마시며 회사 일을 상의한다. 긴 대화가 필요할 때는 테이블에 앉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임원회의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이 대표가 내린 커피를 기자에게 건넸다. 강한 신맛이 향으로 전해졌다.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이 대표가 “이 커피가 코스타리카 SHB”라며 “코스타리카 SHB는 벨라비스타 농장에서 재배한 커피로, 신맛이 강하고 보디감이 뛰어나다”는설명을 덧붙였다.



1년에 한차례는 할리데이비슨과 함께

커피를 내리는 최고경영자(CEO).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독특한 취미를 갖고 있다. 카페 드 맘보의 벽면에는 그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드넓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2006년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미국의 사막을 가로지를 때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저도 다른 CEO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40대 후반이던 10년 전까지는 저도 넥타이를 매고, 직원들한테도 넥타이를 매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이란 게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닐 때도 많거든요. 넥타이 차림이 일의 특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뒤로 티셔츠 등 캐주얼한 차림으로 다니게 된 거죠.”

할리데이비슨을 탄 것도 그즈음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는 건 어릴 때부터 로망이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어려울 것 같아 내친김에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시작한 취미가 벌써 10년 이어지고 있다. 8년 전부터는 매년 미국에서 일주일 가까이 할리데이비슨을 탄다. 올해도 지난 8월, 10일간 5000km를 달렸다. 직접 밥을 지어먹으며 매일 500km를 달렸다.

마니아들은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을 ‘배기음과 진동, 그리고 자유로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여러 사람 가운데서 혼자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할리데이비슨을 탄다.

할리데이비슨은 주로 여러 명이 팀을 이뤄서 투어를 한다. 하지만 쉴 때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혼자다. 그는 바이크를 타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기도 한다.

할리데이비슨 중에서도 그는 커스텀바이크를 탄다. 커스텀바이크는 외형부터 부품 등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만들 수 있는데, 이 대표는 커스텀바이크가 자신에게 맞는다고 했다.

“제가 원래 남들 하는 거 따라 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할리데이비슨도 그렇고, 커피도 다른 사람들이 별로 안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영화도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그 영화는 안 보게 돼요.”
“남이 가지 않은 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남들보다 먼저 한 자신만의 경험에 가치 부여

기질상 그는 남들의 경험을 듣고 따라하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자신이 먼저 경험하고 그 경험을 공유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기질은 사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게 국내 최초로 도입한 투어밴이다. 투어밴은 골프대회 현장에서 선수들의 클럽 점검과 수리, 제작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다. 석교상사에서 최초로 시작한 투어밴은 최근에는 클럽 점검과 수리뿐 아니라 TV와 컴퓨터까지 갖춰 선수들에게 휴식공간까지 제공한다.

레슨 프로와 2부 프로 선수들에 대한 지원도 석교상사가 최초다. 통상적으로 골프업체들은 1부 선수들에 대한 지원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선수들에 대한 지원은 미미하다. 이런 통념을 깨고 석교상사는 2부 선수들에 대한 지원과 함께 그들을 위한 대회도 열어주었다.
“외환위기나 금융위기는 언제나 올 수 있습니다. 그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외환위기나 금융위기는 언제나 올 수 있습니다. 그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죠.”
2008년 호서대 골프학과와 산학 협약을 맺은 것도 업계 최초다. 산학 협약을 통해 석교상사는 호서대 골프학과 학생들에게 피팅 학습 시설과 투어대회 현장 프로모션 체험 기회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석교상사 직원들이 호서대 골프학과에 특강을 하고 졸업생들에게는 채용의 기회도 주고 있다.

“피팅센터의 문을 연 것도 우리가 처음입니다. 투어밴이나 피팅센터처럼 우리는 골프 문화가 앞선 일본과 미국의 좋은 점을 국내에 보급하려고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물론 일본의 브릿지스톤에서 우리의 요구를 많이 들어줬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기도 했고요.”



험난했던 골프용품 사업 26년

지금까지 석교상사가 국내 최초로 시작한 이런 사업들을 보며 이 대표는 ‘돈만 벌려고 악착을 부린 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위안이 된다. 사실 26년 전, 골프업계에 뛰어들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이 골프 시장이 성장할 것이란 예상은 하기 어려웠다.

초기라 골프업체도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 시내에 있는 골프 숍이라야 20~30개 정도에 불과했다. 숍 운영도 대부분이 프로 골퍼들이 하고 있었다. 이 대표가 골프업계에 뛰어든 것도 매형인 김승학 전 한국프로골프협회장의 권유 때문이다. 초기에는 프로 골퍼 위주로 영업을 했다. 투어 스테이지가 고급 골퍼들을 위한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대표는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 큰 고비를 맞는다. 1991년 일본과의 무역역조를 이유로, 골프채가 수입선 다변화 품목에 지정된 것이다. 일본에서 골프채를 들여오는 게 어려워져서 미국 브랜드인 골프 기어를 수입하고 대만에서 만든 브릿지스톤 제품을 들여왔다. 이 대표는 골프채가 수입선 다변화 품목에서 제외된 1996년까지는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1996년은 석교상사로서는 터닝포인트의 해였다. 수입선 다변화 품목에서 골프채가 제외되면서 ‘브릿지스톤 프로 230’을 들여왔는데, 그게 히트를 쳤다. 골프채는 퍼시먼에서 메탈로, 다시 티타늄으로 재질이 바뀌었다. 1996년은 티타늄이 대세를 형성하던 시기였는데 ‘브릿지스톤 프로 230’은 이 같은 트렌드에 부합하는 제품이었다.

“프로 230은 헤드가 230CC였습니다. 요즘 헤드에 비하면 절반밖에 안 되지만 당시만 해도 굉장한 제품이거든요. 프로 230이 히트하면서 매출이 1년 만에 2배가 올랐습니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피팅센터를 열고요.”

그때라고 항상 평탄하지는 않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르며 골프에 대한 인식이 넓혀지기는 했지만, 골프는 여러 오해로 여전히 일부 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이 대표의 표현대로 ‘툭 하면’ 국세청이나 관세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러다 외환위기 이후 박세리가 골프를 통해 국민에게 희망을 선사하면서 인식에 변화가 왔다. 최근 몇 년 석교상사가 성실 납세로 표창장을 받은 것만 봐도 골프에 대한 달라진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선 골프대회에 전 직원이 매달리는 이유

지금도 업황이 좋은 편은 아니다. 당장 환율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무역을 하다 보면 환율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시작된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엔화 가치가 800원대에서 1600으로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그 해에만 40여억 원의 환차손을 봤다.

“회사 분위기를 무섭게 가져갔죠. 그랬더니 회의를 거쳐서 한 달간의 무급 휴가를 결정하더군요. 여행에 보태라고 1인당 30만 원씩을 줬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리프레시의 기회가 돼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죠. 이듬해에는 직원들이 고마워서 이전해 주지 못했던 보너스와 임금 인상분을 환원해서 줬습니다.”

지금도 환율이 좋지는 않아 원가가 20% 이상 상승한 셈이지만, 아직은 직원들의 희생을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마케팅을 강화하고,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고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어려울 때 투자하면 더 큰 이익이 나더라고요.”

환율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자선 골프대회를 개최한 것도 이런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 석교상사의 자선은 15년 전 무의탁 할머니들의 쉼터인 ‘안나의 집’을 돕는 데서 비롯됐다. 지각 등 여러 이유로 직원들에게 받은 벌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안나의 집을 찾게 됐다. 이후 금전적인 도움과 함께 몸으로 하는 봉사를 병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을 돕는다는 자선의 의미가 강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자선에서 나눔으로 봉사의 개념이 달라졌다. 자선 골프대회는 이런 생각이 반영돼 6년 전 시작됐다.

초기에는 참가자도 적었고 모금액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며 참가자 수도 늘어 올해에는 296명이 참가했다. 1회 참가자가 144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며 2배 가까이 늘었다. 모금액도 매회 늘어 올해는 최초로 1억 원을 넘었다.

이 대표는 자선 골프대회를 통해 골프업계에 나눔의 정신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골프대회를 준비하는 직원들과 참가자들의 환한 얼굴에서 그것이야말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