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문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


지난 9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는 50번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을 공개했다. 50번째 회원은 스물여섯 살 청년. 그런데 청년의 부친 또한 아너 소사이어티의 멤버로, 나눔을 솔선수범했던 아버지의 기부액은 30억 원에 이른다. 몸으로, 온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아버지, 류시문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의 이야기가 따뜻한 여운을 전하는 계절이다.

햇살은 눈부시고 따뜻했지만 매서운 바람이 옷매무새를 자꾸만 흐트러뜨리던 가을날, 경기도 성남시를 찾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류시문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전국을 돌며 열정적인 강연을 하는 류 원장의 스케줄을 빼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부산·경남 지역과 전남 지역 강연 스케줄 사이, 이른바 ‘틈새 시간’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금요일에 통화했지요. 그때 부산에 있었는데, 내일은 또 전남 사회적기업 한마당 행사에서 특강을 하기로 돼 있어서요.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잡지에 날 만한 사람인가는 잘 모르겠네요.(웃음)”
가슴을 적시고 사회를 울리는 노장(老將)의 나눔
사회 취약계층의 편에 서서

올해 나이 63세. 은퇴 후 소일거리를 찾아가며 내외가 시간적 여유를 즐길 만한 시기에 류 원장은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일에 억척스럽게 빠져 있다. 그는 지난 2월 공식 출범한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초대 원장이 됐다.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은 고용노동부가 설립한 정부 출연기관으로 사회적기업의 육성과 진흥이 주된 목적이다.

사회적기업은 취약계층에게 사회 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을 일컫는다. 사회적기업으로 인증 받은 기업은 장애인, 저소득층, 고령자 등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정부 지원을 받게 되지만, 동시에 이윤의 일부를 사회적 목적을 위해 재투자해야 하는 의무도 갖게 된다.

“기부는 우리나라를 순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흔히 ‘기부’라고 하면 현금을 떠올리겠지만, 취약계층을 위한 진정한 기부는 현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에요. 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적 기제의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과연 소문대로 ‘사회적기업 전도사’답다. 안 쓰고 모은 돈을 아낌없이 쾌척하는 그에게 붙여진 ‘나눔 전도사’라는 감투가 최근 바뀌었다고. 지방자치단체, 각종 민간단체, 종교단체 등 류 원장의 강연을 요청하는 곳이라면 그는 주말까지 반납하고 달려간다.

사회적기업의 가치와 시대적인 필요성을 피력하고 사회적기업에 대한 국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기 위해 몸으로 뛴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수많은 강연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올 때도 있다. 코피도 쏟고, 심하면 졸도를 할 때도 있지만 그는 이 ‘강행군’을 멈출 수 없다고 한다.

“고용노동부에서 진흥원장직을 제안했을 때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려도 컸습니다. 원래는 제 사업으로 번 돈으로 복지 활동을 하고 싶었거든요. 국민의 세금으로 복지 활동을 펼치는 것이 제게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더니 진흥원이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 말이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이 자리가 사실 부귀영달을 위한 자리도 아니고, 저 또한 장애인이니 취약계층 가운데 한 사람이잖습니까.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봉사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지요.”


이중 장애를 딛고 자수성가
가슴을 적시고 사회를 울리는 노장(老將)의 나눔
류 원장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말대로 취약계층에 속한다. 일곱 살 때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장애인이 된 후 설상사상으로 양쪽 귀 고막마저 다쳐 청각장애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체적 장애를 인생의 장애물로 내버려두진 않았다. 20대 초반에 상경, 잡일부터 시작해 40이 넘어 창업한 건설안전점검회사 ‘한맥도시개발’은 연매출 50억의 사업체로 성장했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다. 하지만 장애 극복은 사업의 성공 속도보다는 한참 늦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수업시간에 필기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뭐라도 들려야 받아 적지요. 항상 친구들 노트를 빌려다 공부했어요. 예전에야 수술법도 없었고요. 올해 5월에 수술을 받은 뒤로 한쪽 귀는 그래도 들리게 됐어요. 그런데 평생의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요즘은 들리는데도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 입 모양을 뚫어져라 보게 되더라고요.(웃음)”

그는 경상북도 예천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7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살림에 장애까지 있으니 부친은 학교도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께 “중학교만 보내 달라”고 애원하고 기도했다. 가까스로 승낙을 받은 후에 뒷산에 올라 소백산맥 자락에 걸쳐있던 구름을 보며 비록 장애인이지만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돕는 사람이 될 것이라 다짐했다. 그날의 그 다짐은 그가 평생을 칠전팔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돼 주었다.

“시골에서 지게꾼 일도 하고 농사도 짓다가 20대 초반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에 친지 한 분이 옷 장사를 해서 잘사는 걸 보고 저도 서울에서 옷 장사를 해야겠다 싶었죠.(웃음)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요. 창업 자금도 없었으니까요. 신문 배달도 하고 작은 점포 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하면서 겨우 생활했는데, 옷 장사는 못하고 나중에 신학대에 진학했죠. 그런데 거기서 평생의 은인을 만났어요. 이여진·신연식 교수님 부부께서 청각장애자인 제가 급우 노트를 빌려가며 공부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는지 학비도 보태주시고 나중에 정기예금을 깨서 500만 원도 없던 제게 5000만 원을 창업 자금으로 빌려주셨어요.”

들리지 않는 귀로 대학까지 마친 것도 모자라 창업의 꿈까지 이뤘다. 정기예금을 해약해 돈을 빌려준 은사 부부는 류 원장에게 창업 자본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생 자본’을 안겨줬다. “너에겐 희망이 있다.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격려의 힘이 그것이다.

류 원장이 2000년대 초부터 기부에 앞장서기 시작한 것도 두 은사에게서 받은 은혜를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부는 누적액이 30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꿈을 나눠주는 그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는 한 사람이 있다. 그 한 사람의 꿈은 아직도 이뤄주지 못하고 있다고.

“집이 가난하다 보니 형제들이 모두 학교를 가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고등학교, 바로 아래 동생이 중학교 진학을 앞둘 때였죠. 어떻게든 학교는 가야겠다 싶어 동생한테 과자 사줘가며 설득을 했어요. ‘나는 장애인이니 지금 학교를 안가면 가기가 어렵다. 너는 정상인이니 한 해 미룬다고 크게 지장이 있겠느냐’ 하고요. 그날 밤새 고민했는지 다음날 동생이 자기가 한 해 미루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동생이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서울로 올라가 돈을 벌었어요. 열일곱에 안국동 로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장애인이 됐는데,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한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류 원장은 오래전 그 일을 두고 ‘내 욕심의 결과’라고 했다. 정상인으로 태어났으나 졸지에 장애인이 돼버린 두 형제. 그가 유독 취약계층의 일에 팔을 걷어 부치는 뿌리 깊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가슴을 적시고 사회를 울리는 노장(老將)의 나눔
못 말리는 부자(父子)가 남기는 긴 여운

기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를 사람들은 부자로 여기지만, 사실은 자동차 유지비를 아끼려고 불편한 다리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며 근검절약한 결과다. 하지만 안 먹고 안 입으며 아낀 돈을 기부할 때는 누구보다도 ‘큰손’이 된다. 그런데 이 못 말리는(?) 기부가 결국 부전자전(父傳子傳)의 DNA였나 보다.

지난 9월 말, 아너 소사이어티의 50번째 멤버가 된 26세 청년 류 원정 씨가 바로 류 원장의 외아들이기 때문. 원정 씨는 할머니가 증여한 돈에서 증여세를 내고 남은 1억 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쾌척했다.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금과 장애인 복지기금에 써달라는 것이 원정 씨의 요청이었다는데, 그가 쾌척한 돈이 할머니가 20년 넘게 폐품 주워 판 돈이었다는 사실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제가 시켜서 한 줄 아는데, 아들이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평소에 제가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니까 손자가 상속 한 푼 못 받을 것 같아 안타까우셨는지 어머니께서 증여하신 돈이죠. 할머니께 받은 돈은 기부하고 자신은 자수성가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요즘’ 청년치고 남다른 생각을 가진 원정 씨도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속을 꽤나 썩였던 아들이었단다. 일류대 입학에 낙방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학문에 1등을 못하면 사람 사랑하는 데 1등을 하라”며 충북 청원군 꽃동네대학에 진학시켰다. 일류대 다니는 서울 친구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원정 씨는 한동안 방황과 반항을 했었다고 한다.

“저더러 친아버지가 맞냐고까지 했었으니까요.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미국도 보내봤죠. 그러다가 강원도 철원 최전방 군대로 입대를 했는데, 친구들은 수도권에서 편하게 군 생활하는데 자기만 최전방에 있다고 또 불만이었죠. 화장실에서 울기도 했다길래 장문의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 첫 문장이 ‘사랑하는 아들아, 조선이 멸망한 이유가 양반 사대부의 병역 특혜 때문이었다’였어요.(웃음) 군복무 중에 사망할지라도 국민묘지에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했죠.”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아버지의 올곧은 삶의 자세와 철학에 결국 아들은 백기를 들었다. 어느 날 류 원장은 피곤에 지쳐 골아 떨어져 자다가 무릎을 만지는 아들의 손길을 느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께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다음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도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아들의 고백,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울 때 남의 돈 빌려서 자식들 학교 보내셨던 어머니께서는 늘 ‘없는 사람들 생각하며 살라’고 하셨어요. 아들 역시 물욕(物慾)에 집착하기보다 지성이 있고 고민하는 청년으로 자라준 것이 다행스럽지요. 비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다리는 절고 귀까지 먹은 저이지만 남을 위해 기부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합니다.”
▲지난 9월 27일 아들 원정 씨가 아너 소사이어티 50번째 멤버로 등록되던 날 3대가 모였다. 왼쪽부터 원정 씨, 류 원장의 어머니인 장월분 여사, 류시문 원장
▲지난 9월 27일 아들 원정 씨가 아너 소사이어티 50번째 멤버로 등록되던 날 3대가 모였다. 왼쪽부터 원정 씨, 류 원장의 어머니인 장월분 여사, 류시문 원장
눈물과 웃음, 행복으로 뒤섞였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 아까 그토록 차갑게 느껴지던 바람이 그저 시원하게 느껴졌다.


류시문
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
한신대 신학대학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1996~2010 한맥도시개발 회장
2004~2010 (사)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 부회장
2007~ 한맥사회복지사대상 제정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