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신이철


도예가 신이철은 미국 유학 후 홍익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조형대학 교수로 있다.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태를 감각적인 색채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늦은 가을 소주잔을 앞에 놓고 그와 마주 앉았다.
“작가는 흙처럼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존재”
신이철 작가의 집은 서울 광장동의 한 아파트다. 집 근처에서 만난 신 작가는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기자를 인근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가 자주 들르는 삼겹살집이라고 했다. 소주잔을 건네며 신 작가는 이렇게 해야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고 했다.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며 그는 10월 한 달간 열린 ‘우정전(Friendship)’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정전’은 1997년 미국 몬테나의 아치 브레이 작가 레지던시(Archie Bray Foundation for the Ceramic Arts, Artists Residency)에서 만난 네 명의 작가 김정범, 이헌정, 조시 드위스(Josh DeWeese), 그리고 신이철이 참여한 전시다. 신 작가가 미국 워싱턴주립대에서 도예로 석사 학위를 마친 직후에 아치 브레이 작가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아치 블레이는 미국 도예가들 사이에서는 꿈의 레지던시로 자리 잡을 정도로 유명해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좀 고민했어요. 결혼식을 치르고 6개월 만에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하자마자 다시 미국으로 가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미국에서 생활하며 작가로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미국 유학에서 얻는 교훈
“작가는 흙처럼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존재”
홍익대 대학원을 나와 미국에서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예술의 도시, 뉴욕이었다. 뉴욕이 세계 미술의 중심지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서 뭔가를 배워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순진한 생각을 가진 그에게 뉴욕은 쉽게 문을 열지 않았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뉴욕에서 그는 거대한 공룡이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존재가치는 물론 정체성까지 사라지는 느낌이어서 되도록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뉴욕을 떠난 그는 다시 시애틀에 둥지를 틀었다. 시애틀에 짐을 풀며 그는 이전까지 하던, 주로 사회비판적인 형상화 작업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왜 미국까지 왔으며, 왜 도예라는 작업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 시간은 신 작가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됐다.

사실 기술적으로나 재능 면에서 그는 외국 학생들에게 크게 뒤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작가로서 발전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건 결국은 생각의 차이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도 그는 학생들에게 ‘어떻게(how)’와‘왜(why)’, 이 두 가지를 고민하라고 가장 많이 주문한다.

“다른 전공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의 미술 교육은 항상 어떻게 잘 그릴까, 어떻게 잘 만들까를 강요합니다. 제 생각은 좀 달라요. 그 이전에 ‘왜’, 어떤 생각으로 작업을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다양한 재료 중 흙의 속성에 매료되다
미술 교육의 핵심은 어떻게 잘 그릴까 이전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작업에 임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미술 교육의 핵심은 어떻게 잘 그릴까 이전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작업에 임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이전과 다른 작품을 한 건 미국인 교수의 조언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인 교수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나온 그가 다시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와 똑같은 작품을 하려면 미국까지 건너올 이유가 있겠냐며 다른 작업을 하라고 권했다.

고민도 많았고, 철근 등 다양한 재료로 실험도 했다. 여러 재료를 써본 후 그가 내린 결론은 흙만큼 좋은 재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흙은 철이나 나무 등의 재료보다 형상 작업을 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예전에는 도예가가 아니라 아티스트라고 얘기하고 다녔어요. 재료도 흙이 아닌 다른 걸 많이 썼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라는 재료가 너무 좋아졌어요. 급한 제 성격에도 가장 맞는 재료고요. 지금은 도예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습니다.”

기본적인 주제는 돌연변이였다. 돌연변이는 속성상 여러 종족이 합쳐서 새로운 종족이 탄생한다. 그는 유기생물처럼 항상 변할 수 있는 돌연변이에 관심이 갔다. 돌연변이는 흙이 가진 유연한 속성과도 맞닿아 있어, 흙을 소재로 한 작품에 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흙을 재료로 하되, 드로잉과 왁스 등을 활용해 새로운 표현기법을 동원한 것이다. 지금처럼 벽에 거는 작품을 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벽에 거는 작품을 한 것은, 회화적인 이미지를 도자기에 접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 그렇게 만든 작품으로 1998년 시애틀에서 미국 데뷔전을 치렀다.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30여 개 작품 중 절반 이상이 팔려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제 작품을 사주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그때 알았습니다. 작가라는 게 이런 맛에 하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듬해에 시애틀에서 또 개인전을 가졌는데, 그때는 지역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흙처럼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존재”
작가는 끊임없이 변하는 일종의 돌연변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학업과 작업을 병행했다. 홍익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다니면서 꾸준히 전시회를 열었다. 그중 2006년 두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태권브이 기획전은 재미있는 전시로 기억에 남아 있다.

도자기 하는 사람은 도자기 하는 사람들끼리만 만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로 대중과 소통하는 데 한계가 있다. 신 작가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대중과 소통하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태권브이 전을 기획하게 됐다.
“작가는 흙처럼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존재”
도자기지만 대중적인 주제인 태권브이를 주제로 삼았다. 작가 7명에게 태권브이라는 같은 주제를 주고 표현하게 했는데, 재밌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관람객들의 반응도 좋아서 만화 페스티벌 등 다른 전시에도 초대됐다.

태권브이 기획전이 있은 이듬해에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도예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에는 서울과학기술대 조형대학 교수가 됐다. 교수가 된 후 그는 도예가라는 이름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학생은 점점 젊어지는 반면, 교수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구조잖아요. 자칫 잘못하면 학생들과의 소통이 한계에 부딪힐 수 있는 거죠. 그걸 경계해야죠.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흙처럼 말랑말랑해서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고 유연한 사고를 견지해야지, 꼰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일종의 돌연변이가 돼야 한다. 그의 작품처럼 말이다.
안양 아이파크 수변공원에 설치된 작품들
안양 아이파크 수변공원에 설치된 작품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