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경제학

최근 오랜만에 지인들과 참치 머리 회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잘 아는 후배가 하는 집이라서 참다랑어 머리의 아가미살, 볼살, 뒤통수 살, 눈살을 부위별로 정말 저렴하게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특히 콜라겐이 많아서 피부 미용에 좋다고 알려진 참치 눈물주가 인상적이었다. 참치 회는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음식 중 하나다. 필자는 참치의 뱃살로 만든 오도로 초밥을 유독 좋아한다. 일본어로 도로는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 뜻인데, 뜻 그대로 오도로 초밥은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일본의 경제발전과 함께 한 스시
냉대받던 초밥이 인기 메뉴가 된 배경

일본 사람들에게는 참치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인기 있는 횟감이나 초밥의 재료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미류의 생선이 인기가 좋았다. 참치가 초밥의 인기 재료가 된 데에는 일본항공(Japan Airline·JAL)의 역할이 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경제발전의 주요 수단으로 수출 제조업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도쿄(東京)에서 북미를 잇는 항공노선은 일본발 전자제품 등의 화물(cargo) 수요로 일대 호황을 맞게 된다. 그런데 북미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화물은 텅 비기 일쑤였다. JAL의 화물사업팀은 비어 있는 항공화물칸을 어떻게 채워 넣을까 고민했고, 새로운 사업의 하나로 북대서양에서 잡히는 참치를 냉동 상태로 일본으로 공수해오는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겼다.

당시만 해도 대서양에 인접한 캐나다와 미국의 동부 해안에서 참치는 일부 낚시꾼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피싱의 대상이었지 식용으로는 쓰지 않았다. JAL의 운송개발팀은 그런 상황을 파악하고 현지 어촌을 찾아가, 각 어촌계와 협약을 맺고 참치를 냉동 처리해 도쿄로 24시간 내에 공수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참치를 냉동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JAL은 포기하지 않고 북대서양 참치를 수입하기에 이른다. 이는 일본인들의 끈기와 치밀함, 연구 정신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이후 참치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와 북대서양에서 얻는 자연산과 스페인, 멕시코 근해에서 양식된 것으로 다변화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사실 도로라는 뱃살 부위는 일본인들이 지방이 많다는 이유로 먹기를 꺼려해 처음에는 고양이에게나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1960년대에 미국식 스테이크가 인기를 끌면서 일본인들이 지방이 포함된 육류의 맛을 알게 됐고 고양이에게나 주던 참치 뱃살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밥 집에 대한 세 가지 궁금증

기왕에 생선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는 초밥(스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초밥의 유래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시는 원래 동남아시아 민족이 생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밥과 같이 보관하는 전통에서 유래가 됐다. 그 전통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일본으로 다시 넘어가서 현대인에게 사랑받는 음식인 스시가 된 것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스시는 니기리 스시라고 해서 밥 위에 생선 등의 재료를 올려서 먹는 도쿄식 스시다. 니기리 스시는 원래 도쿄 일대의 전통이었는데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도쿄 일대 경제가 무너지고, 그 여파로 니기리 스시맨들이 일본 전역에 퍼지면서 스시의 대명사가 됐다.

초밥 집에 가면 카운터가 있고 스시맨이 서빙을 한다. 식사용 스시를 주문하면 두 개를 한 세트로 다섯 개의 세트가 나온다. 최근에는 회전 스시가 유행인데 여기에 세 가지 의문을 가져보자.

첫째, 카운터는 왜 생겼을까라는 의문이다. 원래 스시는 일본 사람들이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긴 후 나와서 먹는 간식으로 유행했다. 목욕탕 앞에는 리어카(손수레)가 줄을 지어서 스시를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함께 일본이 식량난으로 인해서 돈 주고 음식을 사먹는 것을 금지하게 되자 리어카 스시 장사가 사라지게 됐다. 그러자 장사꾼들은 궁여지책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 안에서 카운터 형식을 빌어서 스시를 팔게 되면서 카운터가 생기게 됐다.

둘째, 왜 두 개의 스시를 짝으로 해서 총 10개를 제공할까. 식량난의 연속으로 미군정 치하에서는 음식의 매매를 금지하게 됨에 따라 스시를 먹기 위해서는 쌀을 들고 가서 스시와 교환해야 했다. 그 대신 스시는 밥 위에 첨가물(생선)이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보상만 약간 하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제공하는 스시의 양에 제한이 생겼고 생선의 종류와 양이 부족해서 두 개를 한 쌍으로 하는 전통이 생기게 됐던 것이다.

셋째, 요즘 유행하는 회전 스시는 어떻게 생겼을까. 1970년 오사카(大阪) 엑스포에서 첫선을 보인 회전 스시는 요시아키 스라이시라는 사업가의 아이디어였다. 요시아키 씨가 아사히맥주 공장에 견학을 갔다가 맥주병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보고 카운터를 통해서 스시를 제공하는 것보다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제공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곧 프로젝트에 착수해 오랜 시행착오 끝에 초당 8cm를 움직이는 말굽 모양의 컨베이어 벨트를 만들어 스시를 제공했다. 초당 8cm의 속도는 손님이 스시를 고르기에도 적당하고 스시가 신선도를 유지하기에도 적당했다. 초당 8cm의 속도가 나온 데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와 실험이 필요했다.

이 또한 일본인들의 실험 정신과 끈기를 엿보게 한다. 그렇게 탄생한 회전 스시는 카이텐(回轉) 스시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으며 전 일본에 퍼지게 됐고, 지금은 서울의 어느 곳을 가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풍물이 됐다. 언젠가 홍콩에 갔다 중국인들이 회전 스시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몇 점 맛을 보았는데 맛은 F학점이었다.

일본인 친구는 필자에게 스시를 먹을 때는 생선에 간장을 찍어야 하며 밥에는 간장을 묻히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다. 진짜 스시 맛을 느끼려면 손으로 집어 먹으라고 권했다.

스시 중에 후토마키(太券き)라는
스시가 있다. 후토마키가
한국에서 김밥으로 변형되고,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롤로
변형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캘리포니아롤과 국제경영학

스시 중에 후토마키(太券き)라는 스시가 있다. 후토마키가 한국에서 김밥으로 변형되고,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롤로 변형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일본 기업의 수출과 세계 진출이 가속화되던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LA)의 일본 타운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됐다.

LA 다운타운의 한가운데 300석 규모의 중국 식당이 문을 닫게 됐는데 ‘에이와(EIWA)’라는 일본 식당 전문 회사가 그 식당을 인수하게 된다. 식당 인수 후 에이와는 인테리어를 다시 꾸민 후 식당을 네 개 섹션으로 나누어 다시 개업했다. 네 개 섹션은 튀김, 철판구이, 스시, 그리고 중국식이었다.

식당은 날이 갈수록 번창해서 LA 지역 명사들의 인기 출입 장소가 됐는데 유명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도 자주 왔다고 한다. 일본에서 출장 오는 기업의 중역들은 당연히 이곳의 단골이 됐다.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던 당시, 에이와의 사장은 식당 주방장에게 미국식 스시를 개발해 보라는 지시를 내린다.

당시 최고의 인기 메뉴는 도로를 얹은 스시. 안타깝게도 캘리포니아 지역은 도로를 제공하는 블루핀참치가 여름에만 잡혀 다른 계절에는 그 맛을 볼 수 없었다. 도로를 대신할 재료를 고민하다 나온 것이 아보카도(Avocado)였다. 멕시코에서 재배되는 아보카도는 기름진 도로를 대용할 수 있는 식재료였다.

처음에는 아보카도를 밥 위에 올려 손님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손님들이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아보카도를 안에 넣고 밥으로 감싼 후 참깨를 뿌리게 된다. 그러자 손님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캘리포니아롤이다.

이처럼 참치와 스시는 전후 일본이 경제 복구를 하고 세계 경제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하나의 음식 문화로 각인됐다. 또한 캘리포니아롤은 국제경영학에서 흔히 말하는 ‘사고는 글로벌하게 행동은 현지에 맞게(Think global, Act local)’라는 원칙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는 일본인의 실험 정신과 사고의 유연성이 배어 있다. 이제는 우리의 비빔밥이나 김치가 참치와 스시가 갔던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일러스트·추덕영
이동훈 삼정투자자문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