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오원배 교수 & 미술평론가 김윤섭

오원배 교수는 현대인의 근원적 소외를 화폭에 담아온 중견 작가다. 최근 그는 희망을 상징하는 꽃과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한 화면에 배치해 주목받고 있다. 오 교수가 25년을 한결같이 지켜온 동국대 작업실에 제자인 김윤섭 미술경영연구소장이 방문했다.
[Friends] “그림 그리는 일은 스님들의 수행 생활과 같다”
김윤섭 미술경영연구소장은 미술 전문 잡지에서 오랫동안 기자로 일한 덕에 미술계에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지금도 그의 휴대전화에는 250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의 이름이 저장돼 있다. 현재까지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배경을 그는 대학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이라고 한다.
<무제>, 2008년, 하드보드지 위에 혼합 재료, 160×285cm
<무제>, 2008년, 하드보드지 위에 혼합 재료, 160×28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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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이 동양화였지만 서양화와 조소, 불교미술까지 다양한 강의를 들은 덕에 다른 분야의 작가를 만나도 소재의 고갈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전방위로 강의를 들은 덕에 기억에 남는 은사들이 많다. 그중 지금까지 연을 이어오며 영향을 미치는 이가 서양화과 오원배 교수다.
<무제Ⅱ>, 1990년, 천 위에 혼합 재료, 313×227cm
<무제Ⅱ>, 1990년, 천 위에 혼합 재료, 313×227cm
, 1990년, 천 위에 혼합 재료, 313×227cm">두 사람의 만남은 동국대 내 오 교수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다. 지하에 자리 잡은 오 교수의 작업실은 천장이 높고 외부와 격리돼 있어 작업실로는 그만이었다.

김 소장은 졸업 후에도 스승의 작업실을 가끔 찾는다고 했다. 인터뷰에 앞서 김 소장은 숱하게 인터뷰를 했지만 선생님 앞이라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 교수가 동국대 교수로 부임한 게 1986년이니 89학번인 그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동안 스승의 작품과 예술관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무제>, 2010년, 하드보드지 위에 혼합 재료, 192×450cm
<무제>, 2010년, 하드보드지 위에 혼합 재료, 192×4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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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마다 변화된 작품이 상징하는 것

김윤섭 소장(이하 김 소장): 교수님은 줄곧 ‘현대인의 근원적 소외’라는 일관된 주제를 작품에 담아오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교수님 하면 ‘방황하는 거대한 인체’나 ‘어두운 배경의 건축구조물’ 등이 먼저 떠오릅니다. 인상적인 부분은 화면에는 분명 소외감이나 고독감이 충만해 있지만 한편으로는 잔잔한 희망의 변주곡이 함께 흘러나오는 듯합니다. 교수님만의 작품에서 풍기는 이런 이중적 혹은 다중적 감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원배 교수(이하 오 교수): 그렇게 봤다면 잘 본 거예요. 저는 작품을 통해 어둡고 그늘진 세계를 보여주지만 반대로 밝고 희망찬 것을 표현하려고 했으니까요.

김 소장: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교수님이 ‘인간의 소외’를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궁금하군요. 혹시 어떤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나요.

오 교수: 본격적으로 작품을 한 게 청년기인데, 당시는 시대상이 굉장히 암울했어요. 언로(言路)마저 막혀 감수성 예민한 작가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당시에 <객지>, <장한몽> 같이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들이 유행했는데, 자연히 그런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군대도 마찬가지였어요. 전쟁과도 같은 훈련을 받으면서 정면으로 죽음을 응시하게 된 거죠. 그런 시기를 거치면서 ‘소외’라는 명제에 접근하게 됐습니다.

김 소장: 지금까지 일관되게 인간의 이미지를 작품에 담으셨는데요, 시대별로 표현에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령 국내 활동 1기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학창 시절에는 ‘가면 혹은 탈을 쓴 인간 시리즈’를 발표하셨고, 프랑스 유학 시절과 국내 활동 2기인 1980년대에는 ‘짐승 혹은 중성화된 생명체(인체) 시리즈’를 선보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암울한 도심 풍경과 배회하는 유령(인간) 시리즈’, 2000년대 이후엔 화면이 양분되고 꽃이 등장하는 ‘이중적 풍경’ 시리즈 등으로 꾸준히 변화를 추구해오셨습니다. 지금까지 작품 세계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오 교수: 방금 말씀드렸듯이 1970년대는 군대 생활과 맞물려 통제된 사회였어요. 언로가 막힌 시대상을 익명성을 가진 가면을 동원해 표현하려 한 겁니다. 1980년대는 제가 프랑스에 유학하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선 시기입니다. 유학 시절에는 세계적으로 뉴페인팅(new painting)이 주도하던 시기로, 아방가르디아, 신구상회화 등이 힘을 얻던 시기였어요. 그 연장선에서 거친 표현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1990년대 투명한 푸른색 인간의 형상과 2000년대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의 형상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무제>, 2006년, 하드보드지 위에 혼합 재료, 436×231cm
<무제>, 2006년, 하드보드지 위에 혼합 재료, 436×231cm
, 2006년, 하드보드지 위에 혼합 재료, 436×231cm">
오늘날의 작가는 화가가 아닌 연출가가 돼야

김 소장: 교수님 작품의 변화에서 2000년대 들어 꽃의 등장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전 시기가 삶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섰던 실존주의적 접근이었다면, 꽃의 등장은 이제는 그런 물리적인 감정의 대립을 극복하고 ‘화합과 자비로운 용서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한편으로는 불교적인 대자비의 정신까지 엿보이는데요. 작가 오원배에게 ‘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오 교수: 의미나 상징하는 바가 꽃만큼 해석이 다양한 사물이 없습니다. 제가 꽃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기쁨과 슬픔과 같은 양가성입니다.

김 소장: 화가는 색깔을 통해 감성이나 심리 상태를 내보인다고 합니다. 작업을 하시면서 우연히 손이 끌리듯 사용하게 되는 색깔이 있으신가요.

오 교수: 저는 주로 검은색 바탕에 푸른색을 많이 써왔습니다.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나타내는 데 그만한 색이 없는 듯해요. 긴장감과 깊이를 표현하는 데도 뛰어나고요. 경우에 따라서는 초현실적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김 소장: 흔히들 ‘작품은 작가의 이미지를 닮는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작품에선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작품이 완성되는 제작 과정을 잠깐 들려주시죠.

오 교수: 저는 다른 작가에 비해 드로잉에 상당히 공을 들입니다. 그만큼 기본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드로잉은 자체만으로 완성도 있는 작품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스케치북이 수백 권 있습니다. 작품 하나를 하더라도 비슷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드로잉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듯합니다. 작품 하나에 수십 장의 드로잉이 동원되기도 하니까요.

김 소장: 교수님의 드로잉은 완성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그만큼 성실하고 기본에 충실하신 거죠. 제가 교수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런 모습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좋은 스승은 바람직한 예술가상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교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부단히 새로운 시도를 하신다는 점입니다. 최근에는 프레스코화까지 손을 대셨거든요.

오 교수: 지난 시대의 미술은 인간 정신의 표현에 그 목적이 있었어요. 오늘날의 회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표현 가능한 모든 기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제게는 프레스코화인 거죠. 프레스코화는 전통적 회화 기법이지만 제작 과정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죠. 또 다른 시도가 각기 다른 작품을 한데 모아 전체적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작가는 화가가 아닌 연출자여야 합니다. 그래야 드로잉이나 회화도 설치 작업의 효과를 줄 수 있습니다.


미술은 끊임없이 변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

김 소장: 교수님의 작품에는 몇 가지 자주 등장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청년기의 남자들과 금관악기, 인적 없는 빈 도시, 고가다리 형태의 높은 구조물, 어딘지 모를 부유할 수 있는 텅 빈 공간 등이 그것입니다.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이런 소재들이 갖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오 교수: 인물은 남성이나 여성, 청년이나 노인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인간을 대변한다고 보면 됩니다. 제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다리나 고가, 파이프 등의 구조물은 문명의 상징이고요. 이들의 대비를 통해 문명과 개인의 갈등 구조를 풀어내려 한 것이죠.

김 소장: 설명을 듣고 나니 교수님 작품이 이해가 되네요. 앞서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예술가상, 혹은 작가로서 소명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오 교수: 언젠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미술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요. 그러다 보니 미술은 숙명적으로 시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라면 그 시대를 통찰하는 눈이 필요하겠죠.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은 인문학적 소양에서 나옵니다. 그만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미술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기능을 할 수 있겠죠. 그게 작가의 소명이 아닐까요.

김 소장: 하루 중 같은 시간대라도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 따로 있지 않을까요. 평소의 작업 습관이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오 교수: 요즘 같은 방학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실에서 지냅니다. 내년 10월 금호미술관에서 큰 개인전이 계획돼 있어서 그 준비로 유달리 바쁘네요. 2009년 이후 4년 만의 개인전이지만 지난번과 다른 전시가 돼야 하잖아요. 저 스스로 미술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니까요. 마음은 급한데 시간이 부족하네요. 제 작품은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서요. 작품 크기도 크고. 여름방학 내내 매달렸는데 3점밖에 못했어요.
[Friends] “그림 그리는 일은 스님들의 수행 생활과 같다”
오 교수가 암자로 떠나는 이유

김 소장: 교수님의 성실성은 화단에서도 유명하잖아요.

오 교수: 제가 술을 좋아하는데 특별히 술 약속이 없으면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업실에서 지냅니다.

김 소장: 교수님은 화단에서 알아주는 애주가시잖아요. 다른 취미는 없으세요.

오 교수: 여행을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이수영 OCI 회장님 초대로 김태호 선생, 정연두 선생과 미국에 다녀왔어요. 이 회장님과 정 선생은 사진을 찍고, 저와 김 선생은 스케치를 하고요.
김 소장: 암자도 자주 다니시잖아요.

오 교수: 제가 스님들을 많이 알아서요. 일상에서 벗어나 호젓한 암자에서 며칠 묵다 보면 나를 뒤돌아보게 됩니다.

김 소장: 언제부터 그런 취미를 가지셨습니까.

오 교수: 대학 다닐 때부터니까 오래 됐네요. 대학 때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는데 그게 발단이 됐어요. 암자에서 스님들과 함께 새벽 기도도 드리고 공양도 했어요. 그때 화두가 ‘절제된 자유’, ‘질서 있는 단순한 삶’ 같은 것들이었어요. 작가로서 그런 덕목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그림 그리는 일과 스님들의 수행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 소장: 가장 최근에는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오 교수: 6월에 문경에 있는 ‘윤필암’에 다녀왔습니다. ‘윤필암’은 비구니들의 선방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스님들과 함께 새벽 예불을 하면서 마음이 참 맑아져서 돌아왔습니다.

김 소장: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시는 것도 그 ‘절제된 자유’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되나요.

오 교수: 그런 셈이죠. 독신이었기 때문에 작업에 더 매진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 소장: 그림을 그리면서 만족하셨나요.

오 교수: 저는 만족합니다. 대학 시절 불교에 심취하면서 생활에서는 어느 정도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요. 작품에 대한 내적 고민은 깊지만 그 외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작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적은 매너리즘

김 소장: 교육자로서는 어땠습니까. 25년 동안 교단에 서셨는데요.

오 교수: 교육자로서도 어느 정도 만족합니다. 그랬으니까 지금까지 했겠죠.

김 소장: 제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하시는 게 있나요.

오 교수: ‘성실성’이죠. 시대를 막론하고 ‘성실성’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저는 ‘성실성’이 작품 내면의 ‘진지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간혹 괴팍하고 상식에서 벗어난 작가들이 있는데, 저는 작가이자 교육자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이 제자들에게 ‘성실성의 모범’이 되고 싶었습니다. 25년 동안 한 번도 휴강하지 않은 게 그 증거겠죠. 나중에라도 ‘성실한 교수’로 기억에 남고 싶습니다.

김 소장: 역으로 교수님께 영향을 끼친 작가나 선생님이 계십니까.

오 교수: 재불화가인 한묵 선생입니다. 파리 유학 시절에 뵈었는데 지금까지 가깝게 모십니다. 선생님이 올해 98세이신데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계세요. 한 선생님은 1961년 홍익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파리로 가서 신문 배달, 페인트칠 등 궂은일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 오신 분입니다. 지금도 유학생 같은 생활을 하고 계신데 작가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소장: 한 선생님의 작가정신을 교수님이 물려받으신 거군요.

오 교수: 그분을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게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작가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매너리즘’입니다. 제가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한 선생님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김 소장: 끝으로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10년 후 모습이나 작품 경향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오 교수: 10년 후면 학교도 떠나 있을 거고,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겠네요. 지금까지 세상 한가운데 서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관조적인 입장이 되지 않을까요. 설악산 부근에 작업실 터를 준비해뒀는데, 10년 후면 거기서 작업을 하고 있을 겁니다. 작가에게는 작업 공간이 중요한데 거기 가면 작품도 달라지겠죠. 그때 제 그림이 어떻게 변할지 저도 궁금하고 기대가 되네요. 바람이 있다면 지금까지 작품을 대했던 태도를 10년 후에도 견지했으면 하는 겁니다.
<무제Ⅰ>, 2010년, 책 표지 위에 혼합 재료, 78×32cm
<무제Ⅰ>, 2010년, 책 표지 위에 혼합 재료, 78×3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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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