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ald Judd 도널드 저드
뉴욕에서 북쪽으로 허드슨 강변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콜드 스프링이 나오고 이어 비콘이 나오는데 그곳에 디아 비콘(Dia Beacon) 미술관이 있다. 디아 비콘 미술관은 원래 나비스코 제과회사의 박스프린팅 공장이었다.이것을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뉴욕의 명사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영구 전시를 위한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요제프 보이스, 루이스 부르주아, 월터 드 마리아, 댄 프레빈, 솔 르윗, 아그네스 마틴, 브라이스 나우만, 게르하르트 리히터, 리처드 세라, 앤디 워홀 등 기라성 같은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영구 전시되고 있다. 디아 비콘은 과자공장을 개조한 미술관이라 규모 면에서 크지는 않지만 내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시공간이 넓고 쾌적해 현대미술의 꿈의 공간이다. 이곳에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가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94)의 <무제>(Untitled)가 있다.
<무제>는 공장 한 동을 거의 다 할애해 전시되고 있는데, 자연 채광 속 콘크리트 바닥에 설치된 합판 박스 설치작품은 마치 현대건축물의 부재(部材)처럼 보인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같은 박스 형태의 설치물은 언뜻 보기에는 단조롭게 반복돼 다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모양이 다르다.
상자의 두께가 다르거나 뚜껑이 있거나 내부가 막혀있는 등 변화가 다양하다. 사람들은 미니멀리즘 작품이 단조롭고 냉정해 볼 게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미니멀리즘은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
그러다 보니 작가의 손맛과 감정은 사라지고 재료의 물성과 결과만 남는다. 과정이 이러니 작품이 모두 공장에서 만든 기성제품같이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저 상자들이 도대체 왜 예술인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슨 의도를 전하려고 하는 것인지 일반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저드는 말한다. “사물에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없다.” 그래서 저드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물성 그 자체의 최소화의 의미를 작품에 담아 무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의 이 작업들은 1960년대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의 격정과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 앤디 워홀의 팝아트의 여운을 딛고 새롭게 미국 현대미술의 전면에 부각된 스타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미니멀적인 작업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미니멀리즘 건축과 더불어 20세기 현대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예술가 CEO
미니멀리즘 아트는 현대라는 공간과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1923년 설립된 독일 바우하우스가 내건 ‘회화, 공예, 조각은 모두 건축에 귀결한다’는 목표는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미국 시카고 바우하우스에서 꽃을 피웠다.
그때가 1960년대 미니멀리즘 미술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저드는 1928년 미국 미주리 주 엑슬시어 스프링스에서 출생해 1948년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1960년대, 그는 미술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가 왜 사람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키는지 고민해 보았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적 기준을 세상에 알리고 인정받으면 그것이 곧 새로운 미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전의 미술이 예술가의 손끝에서 나오는 감성과 이성의 혼합체라면 지금부터는 이성만 가지고 새로운 감성을 창조하자는 일종의 혁명이었다. 그는 단순한 입방체의 3차원적인 오브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수한 오브제’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는 채색된 나무와 합판, 아연도금 철판, 스테인리스 스틸과 알루미늄, 플렉시글라스 등의 소재로 단순한 입체 상자를 만들고, 이 상자들을 가로 또는 세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열한 것이다.
회화의 경계를 넘어서 조각을 바닥에 세우는 대신 수직의 벽면에 부조처럼 붙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그린 몇 장의 거친 제품 디자인은 조수의 손을 거치면서 기계화, 공장화한 일종의 산업제품으로 제작되고 ‘도널드 저드’의 친필 사인으로 완성돼 예술품으로 거듭났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화상과 컬렉터, 그리고 미술관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의 거친 드로잉은 몇 번의 연필선과 단순한 색칠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고, 그의 이름만으로도 현대미술시장은 들썩거렸다.
그는 고흐나 피카소 같은 감성을 먹고 작업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앤디 워홀같이 예술철학과 아이디어 하나로 미술 세상을 바꾼 천재적인 예술가였다. 오늘날 예술이 기업화되고 예술가가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세상에서 그는 예술가 CEO의 선구였다.
미니멀리즘과 비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있는 1967년 작 <무제>는 초록색 래커 칠을 한 아연도금 상자 12개가 22.8cm 간격으로 세로로 나란히 걸린 작품이다. 커다란 벽면을 아래부터 위까지 채운 무심하고 지극히 인공적인, 그러면서도 엄격한 규칙을 동반한 미니멀적인 공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미감으로 다가온다.
즐거움 대신 냉철한 현대인의 이지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마저 읽히지만 공간을 변화시키는 오브제의 역할은 독특하다. “존재와 관련해 모든 것은 똑같다”고 말하는 저드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어떤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을 지극히 꺼렸다.
<무제>에 보이는 상자들은 일부러 공업용 재료를 쓰고, 기계적인 방법으로 공장에서 제작하듯 만들었기 때문에 작가의 손맛이나 느낌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드의 작품을 바라보면 즐겁다. 시각적 상큼함이 있다. 아름답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들여다보고 멀리서 조망하고 다시 가까이, 다시 멀리서 이리저리 둘러본다. 상자를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붙였다는 것 외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이리 눈맛이 시원할까. 해답은 비례다. 미의 기준은 무수하게 많다. 형태, 색깔, 크기, 느낌, 이미지 등등. 그 가운데에서도 비례는 미감의 기준이 된다. 황금비의 A4 용지나 인체를 8등신으로 조각한 로마시대의 인체 조각은 모두 비례를 통해 영원한 미의 표상이 됐다.
저드의 작품에는 이러한 비례의 미가 숨어 있다. 보기에 편해 보이는 것은 그만큼 많은 공을 들여서 만든 것으로 그 안에는 비례도 당연히 포함한다. 저드는 신의 영역에 있는 비례미의 아름다움을 훔친 몇 안 되는 천재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 같은 영원의 걸작들이 신의 영역에서 가져온 비례를 완벽하게 재현해 인간을 놀라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저드가 만든 무수한 <무제> 작품들과 합판·알루미늄으로 제작한 책상 의자, 침대, 테이블 등의 실용 가구들을 보면 그는 비례에 대한 탁월한 안목이 있는 예술가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차갑고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뛰어난 비례미로 장식성과 탁월한 미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2007년 5월, 사람들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그의 1997년 작 <무제>를 984만 달러(약 100억 원)에 낙찰했다. 세상이 그의 탁월한 미감을 천문학적 가치로 환원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병산서원과 저드
1990년대 초,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전 저드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한국을 사랑했다. 1946년부터 2년간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면서 그와 한국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가 한국에서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은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이었다.
병산서원은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다. 병산서원에는 만대루(晩對樓)가 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누각인 만대루는 유생들이 학문에 지친 심성을 달래고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전면 7칸, 측면 2칸인 만대루 누마루에 오르면 낙동강을 휘감은 병산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저드는 만대루의 텅 빈 공간을 사랑했고 기둥과 기둥 사이 자연을 들이는 건축의 비례에서 미감을 발견했다. 그는 조선 건축이 갖고 있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조화와 절제미를 사랑했던 것이다. 병산서원의 텅 빈 공간은 저드가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절제와 무심의 미학과 딱 맞아떨어진다. 병산서원 가운데 누마루와 기둥만으로도 완성된 만대루는 그 어느 화려한 건축물보다 더 깊은 맛을 자아내는 미니멀적 공간이다. 저드는 40년 전 보았던 한국의 미감을 잊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세계적인 미니멀아트의 대가가 돼 절대공간 세계를 확립한 저드는 병산서원 만대루에 올라 자신의 예술과 조선 유교 건축의 공간미학을 오버랩시켰다.
그는 조선 가구를 좋아했는데 그 가운데 사랑방 가구를 특히 좋아했다. 그가 만든 많은 미니멀한 가구를 보면 장식을 쏙 빼고 나무 본래의 아름다움과 철저한 실용을 바탕으로 한 미니멀니즘의 극치를 보인다.
조선사방탁자의 기둥과 밑판의 텅 빈 조형은 마치 만대루 누각의 조형미와 같다. 저드의 <무제> 상자나 실용 가구에서 보이는 미감은 절대 미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저드 작품의 예술성이 쉽게 안 들어오고 공기처럼 지나치나 보다. 텍사스 말파의 치나티재단
1979년 저드는 미국 중서부 텍사스 말파(Marfa)의 사막 한가운데 뉴욕의 비영리재단인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의 도움을 받아 1.4㎢ 넓이의 땅을 구입했다. 원래 이곳은 미군부대의 주둔지로 부대의 막사와 건물이 여러 동 있었다.
저드는 이를 미술관으로 개조해 1986년 치나티재단(www.chinati.org)을 개관했다. 이곳에는 저드의 작품과 댄 플레빈, 클래스 올댄버그 등 동시대 미니멀 작가의 작품들이 영구 전시돼 있다. 문제는 접근성이다. 왜 사막 한가운데 오지 중 오지에 그런 미술관을 세웠느냐는 거다. 답은 저드에게 있다. “현대미술작품 중에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 전시해야 하고, 옮기지 말아야 하는 작품이 있다”라는 저드의 철학이 미술관을 이곳까지 오게 했다.
그것은 작품과 주변 분위기가 모두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사막의 마른 풀잎을 흔드는 바람, 황량한 들판의 돌멩이,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붉은 노을에 비치는 긴 그림자….
이런 것들과 저드의 이성적이고 절제된 미니멀적 작품의 상호 느낌은 관람자가 느끼는 감정의 극치를 맛보게 하리라. 쉽게 걸어서 편하게 보는 맨해튼 한가운데의 MoMA에 걸린 저드의 <무제>보다 서울 기준으로 로스앤젤레스(LA)를 거쳐 댈러스 포트워스 경유, 미들랜드 오데샤에 비행기에서 내려 다시 사막 한가운데로 가는 멀고 긴 여정 속에 그리는 저드의 작품은 이미 그리움이 돼 기대감과 경외감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저드의 한 작품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그 먼 시간과 공간의 노력을 기꺼이 들여서 보는 이유는 하나, 저드의 작품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저드는 현대미술에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고, 현대건축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미니멀아트의 종결자다. 예술은 아름답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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