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경부터는 중간에 있는 아라비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다가 15세기부터는 서양이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에는 서양의 역사에서 제국주의 시대, 동양의 역사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라고 불리는 세계화 과정이 전개되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고대에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비슷한 진행을 보인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대 그리스와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인데, 특히 정신사적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기원전 6~4세기를 차축시대(achsenzeit)라는 말로 부른다. 그 무렵 동양과 서양에서는 이후 수천 년간 인류의 정신사를 지배하게 될 사상과 이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 약속한 게 아니니 우연의 일치겠지만 시기적으로는 공교롭다고 할 만큼 일치하는 게 사실이다.
우선 간단한 연대 비교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서양 역사상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기원전 6세기)를 비롯해 피타고라스(기원전 6세기), 소크라테스(기원전 5세기), 플라톤(기원전 5세기),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세기) 등의 활동 기간은 동양 사상의 기틀을 놓은 공자(기원전 6세기), 맹자(기원전 4세기), 장자(기원전 4세기) 등과 거의 일치한다.
정치적으로도 그 시기는 두 문명권에 있어 무척 중요했다. 그 무렵 고대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 이념과 기본 제도가 탄생했고, 중국에서는 제자백가 시대를 맞아 유가, 법가, 도가 등 다양한 정치사상이 제안되고 일부 구현됐다.
이렇게 인류의 정신사적으로 중요한 시대였기에 이때 생겨난 철학과 사상은 한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고 이후 수천 년 동안 더욱 풍요롭게 발달하면서 두 문명의 이념적 기틀을 이루게 된다.
20세기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지금까지 서양 철학은 플라톤 사상의 주석”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동양에도 적용하면 지금까지의 동양 철학은 공자 사상의 주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두 메이저 문명권에서 같은 시기에 처음으로 제기한 철학의 근본 문제는 사뭇 달랐다. 아마 이 차이가 이후 두 문명의 성격을 결정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양 철학의 탄생기에 고대 그리스에서 제기한 최초의 철학적 물음은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였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인데,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물론 눈에 보이는 세계, 즉 세상 만물은 극히 다양하다.
그러나 초기 철학자들은 그 다양해 보이는 세계가 실은 하나의 공통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물을 잘게 쪼개고 산을 무수히 분할하면 결국에는 공통적인 무엇이 남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을 그들은 원질(아르케·arche)이라고 불렀다. 이 원질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세계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였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초기 철학자들은 저마다 원질을 다르게 규정했다.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는 그것을 물이라고 했다.
물은 특정한 형태가 없고 끓이면 증발해 사라지므로 변화가 풍부해 궁극적인 요소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경험될 수 있는 현실의 물질이 궁극적인 요소일 수는 없다고 보고, 무한자(아페이론)라는 존재하지 않는 요소를 가정해 원질로 삼았다. 또 그의 제자인 아낙시메네스는 구체적인 물이나 추상적인 무한자의 관념을 버리고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바로 원질이라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물, 불, 흙, 공기를 근본적인 4대 원소라고 믿었다. 그에 따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원질에 더 가깝다고 보았다. 불은 고정된 외양이 없고 다른 물질을 취함으로써만 존재하므로 궁극적인 요소의 자격을 가졌다고 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엠페도클레스는 4대 원소의 조합이 세상 만물을 이룬다고 말했다.
물론 지금 우리는 그 답들이 전부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물은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고, 불은 물질이라기보다 에너지이며, 흙과 공기도 여러 원소로 분해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무엇을 원질이라고 주장했다는 것보다 원질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철학적 출발점이다. 보이지 않는 것, 경험되지 않는 것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적 관점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낳았고 훗날 신(피안의 존재)의 관념으로 이어져 기독교를 탄생시키는 철학적 배경을 제공했다.
이렇게 서양 철학은 물질세계, 즉 자연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철학을 자연철학이라고 말한다. 그와 달리 동양 철학의 첫 질문은 인간에 관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이 질문에서 “사회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하위 질문들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제자백가들의 다양한 사상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답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 철학자들은 일단 큰 구도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답은 뻔하다. 바로 하늘의 뜻, 즉 천리(天理)에 따르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무엇이 천리인지를 놓고 견해가 제각각일 뿐이다.
중국 문명에서는 기원전 13세기에 성립한 사실상 최초의 역사적 왕조인 주(周)나라 때-그 이전에 하(夏)와, 은(殷)이라고도 불리던 상(商)의 두 왕조가 있었지만 하나라는 명칭만 전해지고 은나라는 갑골문 이외에 증거가 없다-예(禮)의 관념이 생겨났다. 간단히 정의하자면 예란 조상을 숭배하는 이념이다. 이것이 국가와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기본 이념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에 주나라가 약화되고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되면서 예 하나만을 이념적 근본으로 삼기는 어려워졌다. 그래서 차축시대에 들어 공자는 전통적인 예에 인(仁)의 관념을 추가했고, 이 두 가지가 유학의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
인이란 본래 군주가 신민을 대하는 자세를 가리키는 개념이므로 쉽게 말해 나라를 경영하는 원리다(인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속성은 왕도정치를 주장한 후대의 맹자에게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즉 중국의 초기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정치사상, 정치 이데올로기를 철학의 내용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점은 이후 중국 역사가 잘 보여준다. 공자는 자신의 새로운 정치사상을 구현해줄 정치 지배자를 찾아 중국 천하를 주유하다 결국 좌절했지만(현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덕분에 제자들을 길러 위대한 사상가로 남았다), 그의 유학 사상은 후대에 현실로 구현됐다.
한(漢) 제국 때인 기원전 2세기에 유학이 정식 통치이념으로 공인됐고, 당(唐) 제국 때 그 하부구조라고 할 수 있는 관리 임용제도인 과거제가 실시됐으며, 송(宋) 제국에 이르러 가장 완벽한 유학 제국이 성립됐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세계를 물었을 때 중국 철학자들은 인간세계를 물었다. 논의의 수준으로 보면 “세상 만물이 어떤 것이냐”를 묻는 그리스의 질문은 다소 소박해 보이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묻는 중국의 질문은 한층 세련돼 보인다.
역사적으로 봐도 당시 문명 발전의 수준은 그리스가 중국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철학의 근본 문제라는 점에서 보면 중국 철학에는 뭔가가 생략돼 있다는 느낌이다. 그게 뭘까. 바로 인식론이다.
철학은 앎에 관한 학문이다. 정치학, 경제학, 물리학, 화학이 특정 분야의 앎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면 철학은 일반적인 앎 자체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의 골간은 앎에 관한 이론, 즉 인식론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식론으로 철학을 시작했고 중국 철학자들은 인식론을 생략하고 철학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들이 진리(眞理·참된 인식)를 추구할 때 중국 철학자들은 천리(이데올로기)를 해석했다.
그런 차이가 빚어진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차축시대에 중국은 제법 짜임새를 갖춘 국가 체제가 자리 잡았고 그리스는 도시국가라는 원시적 국가 체제의 단계에 있었다. 그랬기에 그리스는 철학의 근본부터 다진 반면 중국은 이미 고도로 발달한 사회적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을 전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적 결함이었고 나중에는 문명적 결함이 된다. 서양 철학이 자연철학→주체철학→인식론으로 발전하는 동안 중국 철학은 이후에도 내내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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