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품 컬렉터 정진호 유심재 관장
최근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으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나라의 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문화유산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랫동안 한국의 고미술품을 찾고 수집해온 정진호 유심재 관장의 컬렉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 가회동 좁은 골목길에 터를 잡은 정진호 관장의 유심재에는 고미술품들이 가득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가구를 비롯한 고미술품이 빼곡히 들어찬 1층 전시실이 모습을 드러냈다.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자 돌과 청동으로 만든 부처상과 불화에 벼루며 고가구들이 또 한 가득이다. 정 관장의 컬렉션을 보는 것만으로 그의 20년 수집 경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 관장은 “유심재에 전시된 고미술품은 500여 점으로 전체 컬렉션 3000여 점 중 일부”라고 했다. 본인은 자랑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고 했지만, 유심재에 있는 고미술품은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다. 지난해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모아 ‘고미술의 귀환과 향유’라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기획된 ‘고미술의 귀환과 향유’에서는 해외로 반출됐다 돌아온 고미술품 300여 점을 선보였다.
고려시대 ‘납석관음좌상’과 신라시대 ‘금동인왕상’,‘흑칠나전일월사군자문받닫이’,‘28성수도’ 등 문화적인 가치가 높은 고미술품들이었다. 이들 고미술품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반출됐던 문화재들로 정 관장이 외국의 경매와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수집했다.
중국 유학시절 북한 고미술품 많이 수집
정 관장이 고미술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년 전 중문학을 전공하고 대만에서 유학을 하면서부터다. 대만에서 대학원을 마친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미술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국에서 보낸 10년 동안 그는 학업을 이어가며 조금씩 컬렉션을 시작했다.
당시 그가 수집한 고미술품 중에는 북한에서 나온 작품이 많았다. 2000년대 초반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중국을 통해 시장에 나온 작품들이었다. 목가구를 중심으로 고미술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는 일제강점기 이후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도 많았다.
“지난 10년간 불교미술품을 비롯해 청자 등 많은 북한의 고미술품들이 한국 고미술시장으로 유입됐습니다. 북한 고미술품들이 한국 고미술시장의 훌륭한 자양분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도 북한의 고미술품 상당수가 중국 시장에 나오고 있다. 그는 중국의 지인을 통해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데, 6년 전에도 1억 원을 호가하는 관음좌상을 수집했다. 작품들은 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이번에 수집한 관음좌상만 해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라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중국에서의 10년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고미술품 컬렉션에 뛰어들었다. 중국 고미술시장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 등을 다니면서 한국의 문화유산을 찾았다.
“고미술품을 찾아다니면서 안타까울 때가 많았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에도 많은 문화유산이 유출됐지만, 한국전쟁 이후에 유출된 양도 상당하거든요. 고미술품의 가치를 모를 때인 1950, 60년대 미국 등으로 반출된 사찰문화재와 공예품 등이 정말 많습니다. 조금만 일찍 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눈떴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요.” 한국 고미술품의 정수는 불교미술품
정 관장은 사명을 갖고 고미술품을 찾는 일에 나섰다. 컬렉션이 업이자 취미생활이 된 것이다. 미국, 일본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에 있는 개인 소장가들을 찾는 일이 잦았다. 그는 그들을 설득하고 협의해 고미술품을 국내로 들여왔다. ‘금동약사삼존불’이 그런 경로를 통해 들여온 대표적인 컬렉션이다. ‘금동약사삼존불’은 일제강점기 일본 소장가의 손에 들어갔던 작품이다. 소장가가 죽으면서 자식에게 물려준 것인데 자식을 설득해 사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우리 미술품을 너무 좋아해 귀하게 다루었어요.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난 단카이세대(團塊世代; 1947~49년 출생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들은 한국 미술에 대해 잘 몰라요. 그래서 설득이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금동약사삼존불’처럼 미술품은 3D(Death, Divorce, Default)에 의해 언젠가는 시장에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기회를 잘 잡아야죠.” 크리스티, 소더비 등 주요 경매도 중요 타깃이다. 크리스티 등 3대 경매의 정식 멤버인 그는 해마다 외국에서 수억 원씩의 유물을 사온다. 해외 박물관을 찾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저는 주로 불교미술품을 수집합니다. 제가 남들보다 늦게 고미술품 수집을 시작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 남들이 잘 안하는 걸 하고 싶더라고요. 고미술품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불교 미술이거든요. 그런 이유로 제 컬렉션에 불교 관련 고미술품이 많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와 관련된 미술품은 그 시대의 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의 작품은 대부분 기독교적 아이콘을 소재로 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예술품들이 이처럼 종교와 관련이 깊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 고미술품은 불교와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한국 고미술은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불교 관련 미술품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 작품들이 많다.
컬렉션은 행복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
“골동품의 가치는 역사성, 희소성, 예술성 등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결합된 작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거죠. 그런 작품을 찾는 게 저 같은 사람의 일이죠.”
골동품 딜러들 중에서도 위작에 속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체 딜러 중에 약 60%가 한순간의 실수로 파산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도 몇 번 ‘아차!’ 실수를 한 적이 있다. 6년 전 미국에서 경매를 통해 고려청자를 약 6000만 원에 샀다.
경매회사의 감정이 있었기에 카탈로그만 보고 의심 없이 샀다. 막상 받아 보니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위작이었다. 영국 본사에 항의를 했더니 위작이라는 감정을 받아오면 환불을 해주겠다고 했다. 억울했던 그는 직접 영국으로 건너가 본사 회장과 담판을 지었다. 결국 회장 전결로 환불을 받고 현재 청자박물관에 있는 청자편병까지 싼 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7년 전에는 금강산에서 출토된 삼존불상을 중국 상인을 통해 구입했다. 따로 나온 것을 사서 짝을 맞췄다. 그런데 한국의 학자가 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아쉬웠지만 그 길로 중국으로 건너가 상인에게 삼존불상을 되팔아야 했다.
그 후 그 삼존불상이 다른 경로를 통해 국내 모그룹 오너의 손에 들어갔는데, 최근 보물로 지정된다는 소문을 들었단다. 땅을 쳤지만 지난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꾸준히 식견과 안목을 기르는 도리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컬렉션은 행복한 작업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만 하더라도 학생 때는 부모님한테 인정을 못 받았고, 지금은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안목이 높아지면 점점 돈이 많이 들거든요.
초기에는 부동산을 팔아서 컬렉션을 했는데, 지금은 식당 3개를 운영하면서 고미술품을 수집합니다. 수집한 미술품을 되팔면 그 돈으로 다른 미술품을 사기도 하면서요. 나중에 자식한테는 환영받을까요.(웃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이 좋다고 했다. 비록 아파트는 없어도 아름다운 미술품에 둘러싸여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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