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문 밀레코리아 사장

독일 가전업체 밀레코리아의 안규문 사장은 호방한 웃음이 인상적인 호인이지만 사업에서는 독일 본사도 두 손 두 발 다 든 불도저 경영으로 유명하다.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독일 본사에서 2016년까지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약속받은 안 사장의 경영관을 들었다.

서울 강남 차병원사거리에 자리한 밀레코리아 건물을 찾았을 때 안규문 사장은 취재 수첩을 챙기는 기자에게 “급할 것 뭐 있습니까. 차부터 한 잔 하시죠”라며 자리를 권했다. 자사 커피메이커로 드립한 커피를 내오며 “드세요. 맛이 좋을 겁니다”라고 했다.
"한국을 밀레의 글로컬라이제이션의 표본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인터넷 판매에 힘을 쏟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한국을 밀레의 글로컬라이제이션의 표본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인터넷 판매에 힘을 쏟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제품 홍보(PR)는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철저히 한국식으로 PR를 합니다. 피할 건 피하고, 알릴 건 철저하게 알리죠.(웃음)”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제품은 어떤 겁니까. 아무래도 밀레하면 세탁기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세탁기는 효자 상품이고, 요즘은 청소기도 잘 나갑니다. 지금은 비슷하게 나갑니다. 이 추세라면 청소기가 세탁기를 앞지를 것 같아요. 오늘 선배와 점심을 같이 했는데, 결혼한 딸이 밀레 청소기 좋다고 그러더랍니다. 점심 얻어먹으러 갔다 졸지에 제가 대접을 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입소문 전략이 드디어 인정을 받는 듯합니다.”

밀레 청소기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인터넷 댓글을 보면 국산 제품을 쓸 때는 한 손에 테이프를 감고 먼지를 붙이면서 청소했는데, 밀레 청소기를 쓰고부터는 테이프가 필요 없어졌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만큼 흡입력이 좋다는 거죠. 소음도 적고 먼지까지 잡아주니까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밀레하면 여전히 빌트인 가전을 떠올리는 소비자들이 많습니다. 일반 제품과 빌트인 제품의 비중은 어느 정도입니까.

“밀레코리아가 설립된 2005년 당시 전체 매출의 73%가 빌트인이었습니다. 프리스탠딩이 23%, 서비스와 부품 판매가 나머지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10년 말 빌트인과 프리스탠딩이 50 대 50으로 균형을 이루게 됐습니다. 중장기적으로는 프리스탠딩 비중을 70%까지 올릴 계획입니다.”

기업 간 전자상거래(B2B)인 빌트인 비중이 줄어들면서 리스크는 많이 줄었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빌트인 의존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건설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얘기니까요.”

B2B에 의존하는 많은 기업들이 기업과 소비자 간 전자상거래(B2C)로 체질개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은데 어떤 전략을 취하셨습니까.

“저희는 광고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밀레코리아 설립 초기부터 소비자들이 써보고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입소문 마케팅에 주력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판매에 힘을 쏟았습니다.”

가전제품을 인터넷에서 판다는 게 초기에는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더구나 밀레는 국산 가전제품에 비해 가격도 2~4배 가까이 비싼데요.

“당장 독일 본사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명품은 그렇게 파는 게 아니라면서요. 인터넷은 싸구려 제품이나 파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거든요. 제 생각은 달랐어요. 독일 명품과 한국의 발달된 정보기술(IT) 환경을 접목하면 답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글로컬라이제이션(globalization과 localization의 합성어)의 표본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죠. 밀레의 판매 원칙 중 하나가 사후관리(AS)가 안 되는 곳에는 제품을 팔지 않는다는 건데, 본사에서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택배를 활용하면 어느 곳이든 AS가 가능하다고 응대했죠.”

110년 된 회사의 정책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본사 입장에서 한국 시장은 그리 큰 시장이 아니니 믿고 맡겨달라고 했죠. 나중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하고 홈페이지부터 뚝딱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제품을 팔면서 생각보다 많은 댓글이 올라왔어요.

그게 다시 입소문을 타면서 인터넷 판매만으로 매년 40~50% 이상 매출이 늘었어요. 인터넷 판매가 성공을 거둔 후에는 회장과 각국 법인장들을 모아놓고 우리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2009년에 회장하고 골프를 치고 맥주 한 잔 하는데, 회장이 새로 법인을 만들면 ‘밀레코리아만큼만 해라’라고 말한다고 하더군요.”

인터넷 판매를 시작했을 때 처음부터 제품이 잘 나가지는 않았을 텐데요.

“B2C 비즈니스를 하면서 쐐기를 박는 것과 같은 전략을 썼습니다. 큰 통나무를 쪼갤 때 처음부터 도끼를 쓰는 게 아니거든요. 쐐기를 먼저 박고 그걸 내리치거든요. 밀레코리아도 그런 식으로 시장에 파고들었습니다.

청소기를 시작으로 나중에 세탁기, 식기건조기 같은 가격이 비싼 제품을 팔았던 거죠. 인터넷을 통해서 이런 게 팔리니까 본사에서 무척 놀랐죠. 매장에 가서 5~6번을 보고 사는 게 독일인의 구매 스타일인데, 인터넷만 보고 제품을 사니까 놀란 거죠.”

인터넷 판매는 흔히 가격 할인을 떠올리는데, 가격 할인 전략을 쓰지는 않았나요.

“당시 많은 수입가전사들이 20~30% 가격 할인을 했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인터넷과 백화점 판매 가격을 똑같이 했습니다.”

밀레코리아와 인연을 맺은 건 언제부터입니까.

“제가 쌍용 출신인데, 초기에 쌍용에서 밀레 제품을 수입했습니다. 그 회사가 코미상사인데, 2002년부터 제가 코미상사 대표를 맡았습니다. 2005년 코미상사가 밀레에 팔릴 때 저도 패키지로 딸려간 거죠.(웃음)”

출범 초 밀레코리아 지사 건물 매입을 두고 독일 본사와 의견 마찰이 있었다고요.

“밀레코리아가 출범하면서 원래 있던 건물을 사자고 했더니 본사에서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밀레는 좋은 가전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회사지 부동산 투자회사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까지 해외 법인을 설립하며 그런 전례가 없다더군요.”
“쓴 약을 먹일 때 겉에 초콜릿을 바르잖아요.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이런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쓴 약을 먹일 때 겉에 초콜릿을 바르잖아요.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이런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밀레 제품을 쓰는 소비자들은 밀레하면 여기(지사)를 먼저 떠올린다고 맞섰죠. 임대를 하면 2년마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마케팅 비용도 많이 든다고 우겼죠. 명함도 다시 찍어야 한다며 여러 문제를 이야기하며 설득했죠. 그랬더니 회장은 좋다고 하는데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어요. 그 과정에서 ‘너희는 밀레의 정신을 모른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사셨네요.

“당시 건물이 1996년 장부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매입을 결정한 거죠. 2~3개월을 설득한 끝에 본사 지원 없이 차입해서 샀습니다. 잘하면 올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건물 가격이 많이 올랐겠습니다.

“지하철 9호선이 개통되면서 주변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가끔 부동산에서 팔라고 연락이 오는데 2005년에 비해 두 배 이상은 오른 것 같더군요. 팔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애초에도 부동산 투자보다는 관계사에 신뢰를 주자는 의미가 더 컸으니까요. 외국 제품을 수입하는 회사들 중에 하다가 안 되면 손 털고 나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본사와 문제를 푸는 걸 보면 설득에 능하신 듯합니다.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원칙에 충실한 거죠. 제가 종합상사에 있으면서 중동부터 동남아, 미국 등지를 두루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 덕에 다른 나라 문화를 좀 알고, 어떤 식으로 설득해야 하는지를 아는 거죠.

밀레의 경우에는 그들 성향에 맞게 설득을 하는 거죠. 쓴 약을 먹일 때 초콜릿을 겉에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이런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유연한 태도가 필요한 거죠.”

고지식하지만 본사에서 배울 점도 많을 듯합니다.

“그럼요. 우리 회장한테 배운 건 ‘천천히 꾸준히 하라’는 겁니다. 밀레처럼 유럽의 오래된 기업은 미국 기업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110년을 세탁기 만들고 살았는데, 1년 전 모델 판다고 뭐라 할 사람 없다는 거죠. 이익과 매출만 강조하는 미국 기업에 익숙해 있다 회장님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밀레는 기업공개(IPO)를 하지 않은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110년 역사의 기업이 IPO를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기업이 공개를 하는 이유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신규 사업에 진출하는 등 대규모 자금이 필요할 때 IP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거죠. 가전이라는 한우물만 파고, 무차입경영을 하다 보니 대규모 자금이 필요할 일이 없는 거죠. 패밀리 컴퍼니니까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거죠. 공연히 IPO 해서 남들 간섭받기 싫은 거죠.”

적응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화가 많이 달랐을 텐데요.

“인화, 단결을 강조하는 쌍용의 기업문화와 밀레의 문화가 비슷한 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본사로부터 2016년까지 CEO 자리를 약속받았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밀레의 정신인가요.

“2008년에 변호사 공증까지 거친 CEO 계약서가 날아왔어요. 반대 의견이 없으면 사인을 해서 보내라고 하면서요. 2016년까지 CEO를 연장한다는 계약서였어요. 이런 경우는 외국서도 흔하지 않나 봅니다. 2~3년 연장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긴 기간의 계약 연장은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요.”

오랫동안 밀레코리아를 책임지게 되셨습니다. 어떻게 이끌어 가실 생각입니까.

“장기적으로는 대용량 살균기 같은 의료장비와 선박용품 등으로 품목을 다각화할 계획입니다. 대형 선박이나 군수선, 요트 등에 들어가는 선박용품은 가전분야에서는 일종의 블루오션입니다. 앞으로 관심 있게 지켜볼 생각입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