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 Quatorze Style

절대왕정의 출발, 카페왕조의 필립 4세
[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영광의 시대, 루이 카토즈 스타일
최근 루이 14세 관련 영화가 상영되고 베르사유 전시회가 열리며 관련 책자가 출간됐다. 역사는 현대적인 시각으로, 혹은 풍문처럼 들려오는 야화를 참고해 쓸 수도 있지만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봉건적 구조로부터 시작한 유럽의 중세는 도시 형성 과정에서 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 도시는 자유로운 바람이라고도 했다.

로마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유럽의 형성 과정은 혼란스러움이었다. 그 가운데서 언제나 힘의 원천은 칼이었다.

그러나 칼만으로 통치하는 자는 일찍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카페왕조(Capetiens)의 필립 4세 또한 칼로 절대왕정의 기초를 놓았다.

987년 필립 4세가 왕으로 선출된 후 1792년 루이 16세까지, 이 가문은 8세기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다.

중앙집권적 통일 프랑스의 초석을 다진 필립 4세

프랑스 카페왕조의 11대왕 필립 4세가 즉위한 시대는 루이 9세의 8차 십자군 원정을 끝으로 십자군전쟁이 끝날 즈음이었다. 바야흐로 종교의 힘이 탈진하고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요구받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타난 이가 필립 4세다. 훤칠한 키에 뛰어난 외모로 미남 왕이라 불린 필립 4세가 왕위를 계승한 때는 봉건제가 기반이던 시대.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국가 전체를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왕의 영지는 국토의 일부분이었고 때에 따라서는 왕의 봉신인 공작이나 백작이 더 큰 영지를 가지고 왕보다도 강한 힘을 휘둘렀다.

이 시대에 즉위한 필립 4세는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다. 시기도 좋았다. 필립 4세가 즉위한 때는 십자군전쟁이 끝난 후여서 더 이상 종교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필립 4세는 이를 왕권 강화의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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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약화됐다. 필립 4세는 삼부회의를 소집해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지지를 얻었다.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의 시작이었다. 당시 삼부회는 소수 특권층인 사제, 귀족, 도시 대표들의 모임이었다.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도 이들 삼부회가 주도했다. 필립 4세는 유태인과 롬바르디아인 등 외국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박해정책을 취해 빚을 갚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다음 차례는 성전기사단이었다. 성전기사단이란 11세기 말 십자군전쟁이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귀족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기사들의 단체였다. 2차 십자군 원정 때에는 프랑스 루이 7세를 도와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파리시 교외의 광대한 부지를 기증받고 이곳에 서유럽의 거점을 세우게 됐다.

필립 4세는 부르주아지(bourgeoisie·자본가 계급) 내지는 소귀족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대거 등용해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통치제도를 정비했다. 필립 4세의 관료들은 대부분 로마법을 공부한 법률가들이었고 그들은 국왕이 신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임명된 통치자라는 왕권신수설을 발전시켰다.

필립 4세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각국은 봉건적 장원제도가 붕괴되고 도시가 더욱 성장했으며 민족과 영토를 중심으로 한 절대왕권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로 나아갔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그 번성기를 이루었던 것이다. 필립 4세가 없었다면 루이 14세도 오늘의 프랑스도 없었을지 모른다.
1 푸케에 의해 지어진 보 르 비콩트
1 푸케에 의해 지어진 보 르 비콩트
영화 <바텔>에 그려진 루이 카토즈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바텔>은 루이 14세가 참여하는 콩데 연회를 배경으로 제작됐다.

저녁 만찬을 위해 주문한 생선이 도착하지 않아 실의에 빠진 집사장 프랑수아 바텔의 심장에는 가늘고 예리한 칼이 꽂혀 있었다.

자살이었다. 루이 14세 시대 최고의 요리사였으며, 최고의 향연 기획자였던 바텔의 최후는 영화에서처럼 너무도 허망했다.

바텔은 원래 푸케가(家)의 집사장이었다. 야심만만한 푸케가 자신의 새 저택인 보 르 비콩트(vaux-le-vicomte) 완공을 기념해 루이 14세와 귀족들을 초대해 호사스런 파티를 열었는데 이게 화근이 됐다. 신하가 왕보다 더 큰 저택을 짓고 럭셔리한 연회를 벌인 데 격분해 루이 14세가 푸케를 종신금고형에 처한 것이다. 결국 푸케를 대신해 콜베르가 재무장관으로 전횡한다.
2 루이 14세가 직접 고블랭 제작소를 방문한 장면을 묘사한 태피스트리로 그가 베르사유를 장식하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 3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루이 카토즈 스타일의 캐비닛으로 샤를 불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와 중국, 독일의 영향을 받은 이 가구들은 훗날 불 양식으로 불린다.
2 루이 14세가 직접 고블랭 제작소를 방문한 장면을 묘사한 태피스트리로 그가 베르사유를 장식하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 3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루이 카토즈 스타일의 캐비닛으로 샤를 불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와 중국, 독일의 영향을 받은 이 가구들은 훗날 불 양식으로 불린다.
이 와중에 파티를 기획한 바텔은 감금의 위협을 피해 영국 망명길에 오른다. 바텔은 그곳에서 만난 구르빌의 추천으로 다시 콩데 왕자의 저택인 샹티이 성에 들어가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집사장에 임명된다.

샹티이 성은 건물도 건물이지만 당대 최고의 정원건축가인 앙드레 르 노트르가 조성한 형식주의 정원과 뱃놀이를 위해 조성된 수로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천부적인 연회 기획가 바텔에게 노트르는 그의 재능을 한껏 펼칠 거대한 무대나 다름없었다.

이 파티를 통해 볼 수 있듯이 황홀한 파티를 즐기는 당대의 귀족들을 보면서 입을 다물 수 없다. 럭셔리의 대명사로 루이 카토즈가 회자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 건축을 빼고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건물을 만들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발견된다.

무려 35년여에 걸쳐서 지은 이 궁전은 파리로부터 귀족들을 이동시키고 권력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음을 뜻하며 이는 고도로 의도된 통치 술수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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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루이 14세는 명재상 마자랭이 죽자 재상제를 폐하고 직접 통치하기 위해 궁신들을 부렸다. 그 가운데 왕의 총애를 받은 이가 콜베르 재무장관이다. 콜베르는 마자랭이 죽으며 왕에게 추천한 인물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중상주의를 실현해 강력한 왕권, 위대한 프랑스를 실현하고자 헌신했던 인물로, 오늘날에도 중상주의를 콜베르시즘(colbertisme)이라 부른다.

콜베르의 위업을 받든 장 자크 게를랭은 1954년 프랑스 12개 명품 업체들을 연합해 코미테 콜베르(comite colber·콜베르 위원회)란 이익단체를 만들었다. 중상주의 일환으로 콜베르는 길드 보호정책을 펴 프랑스 명품 업체 지원의 사상적 배경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들의 변이고 보면 아직도 콜베르는 프랑스 산업의 고급화를 위해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루이 카토즈는 프랑스 명품의 아이콘인 셈이다.

Art of Louis Quatorze Style

[김재규의 앤티크 살롱] 영광의 시대, 루이 카토즈 스타일
탁월한 안목으로 인재를 등원했던 루이 14세는 프랑스 예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면서 통치 기반을 확보했다. 루이 14세의 재위 기간(1643~1715)은 바로크 사조에 해당된다.

그러나 당시의 바로크는 로마시대와는 차별화된다. 오히려 고전을 중시하는 르네상스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고전주의나 루이 14세 양식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증명하듯 이탈리아풍의 바로크 양식을 강조한 조각가 피에르 퓌제는 왕실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 베르니니 같은 위대한 로마의 조각가 역시 루브르 개축 사업에 초대받았으나 프랑스 정서와는 이질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반면 왕실이 사랑한 화가 샤를 르 브룅은 1648년 국왕의 도움을 받아 왕립미술원을 설립했다. 그는 이것을 기반으로 사실상 프랑스 화가들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미술양식을 지배했다. 왕은 예술을 사랑했으며 직접 관여하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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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기능공들을 초빙해 그 기술들을 받아들였다. 특히 유리 기술을 배운 장인들은 판유리제조법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베르사유의 명품, ‘거울의 방(hall of mirror)’은 이처럼 발달한 유리 기술의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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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방’이라는 대형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은 다양한 장식예술가들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왕이 직접 고블랭을 방문해 장인들을 독려했다. 이 장면은 태피스트리로 남아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유리 장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왕궁과 공공건물을 위한 비품까지 생산하게 됐고, 국가 주도의 장식예술(decorative arts)이 발전했다. 이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다.

훗날 볼테르는 이 시대를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드로스가 활약하던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에 뒤지지 않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더 나아가 볼테르는 루이 14세를 향해 “그의 이름은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입에 올릴 수가 없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재규 _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 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