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투자재적 성격을 누차 강조했다. 모든 투자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는 재화여야 투자가치가 유지되는 법이다. 사실 와인은 그런 측면에서 전통적인 투자재인 주식이나 채권에 비해 보존성에서 열악하기 짝이 없다.
요즘은 와인냉장고를 장만해 집에 비치해두는 애호가들이 많다. 선물로 받은 와인은 되도록이면 와인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와인은 와인냉장고에 차곡차곡 뉘어서 적정한 온도에서 보관하는 것이 최상이다. 요즘 나오는 와인냉장고들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함께 보관하기에 적합하게 아래 칸과 위 칸의 온도를 따로 설정하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투자재로서 와인을 이야기했지만 모든 와인이 오래둔다고 투자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투자재로서 가치가 있는 와인은 50년 내지 길게는 100년도 보관해야 한다. 이런 와인을 보관하는 데에 와인냉장고로는 역부족이다.
50년 후에 되팔겠다고 마음을 먹고 투자한 고급 와인(예를 들면 샤토 라투르 같은 그랑 크뤼 와인)을 집 안 와인냉장고에 보관한다고 생각해보자. 향후 50년 동안 단 한 번의 정전사태도 없이 잘 보관할 수 있을까.
주인들이 모두 집을 비우고 한여름 바캉스를 떠날 경우가 50번은 될 텐데 그 50번의 위기를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재수 없게도 바캉스를 떠난 바로 그날 정전이 돼 와인냉장고의 온도가 여름철 외부 온도와 같은 영상 30도를 넘어선다면 와인은 그날로 돌아가시고 말 것이다. 이런 정전사태는 여름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365일 중 어느 순간에나 찾아올 수 있다.
고민되는 상황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번에 큰마음 먹고 장만한 유로 카브(와인냉장고)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2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믿고 와인을 맡겨둘 수 있을까. 아마 10년만 지나도 그 성능이 떨어질 것이다. 와인냉장고보다 와인저장실이 와인 보관에 최적
과연 와인을 50년이나 보관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래 보관된 와인이 정말로 와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될까. 그 답은 지난 2000년 4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김정일 와인’,‘이건희 와인’이라 불리는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1863년 빈티지를 낙찰받은 와인 수집가의 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당시 낙찰받은 와인을 시음해 본 이는 “내 생애에 너무 많은 라투르를 산 것이 실수였다. 이 와인이 잘 숙성될 때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와인은 50년이 아니라 100년도 훨씬 넘게 보관됐는데도 더 지나서 마셔도 될 정도로 신선하게 잘 보관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와인은 도대체 어떻게 보관된 것일까. 이런 와인이 와인냉장고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디었을 리는 없다. 보관하는 와인이 많아지면 보통 와인냉장고의 개수가 늘어나게 마련이다.
보관 온도가 다른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분리해서 보관하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와인에 맞추어 와인냉장고의 개수를 늘려가다가 어느 날 문득 ‘와인저장실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와인냉장고보다 와인저장실을 만드는 것이 매우 현명한 방법이다. 그런 와인저장실이 아파트의 방 한 칸이 아니라 단독주택의 지하실이면 훨씬 더 좋다. 보통 5평짜리 방 한 칸을 와인저장실로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대형 와인냉장고 2~3개 비용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저장할 수 있는 와인 수는 20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집 안에 지하 저장실이 있고 온도 및 습도 조절장치도 갖추어져 있다면 샤토 라투르를 50년간 저장해도 문제 없다. 단 그 기간 동안의 전기료는 좀 부담스럽지만 말이다. 와인의 장기보관에 이력이 나있는 유럽의 와인 투자자들은 이런 와인저장실을 잘 갖추어 투자할 만한 와인을 신주단지 모시듯 보관하고 있다. 프랑스 와인이 국내에 들어오기까지의 기나긴 여정
지난 가을 홍콩에서 열린 와인 경매에서는 그 와인이 어디서 보관됐느냐에 따라 같은 와인이더라도 가격이 크게 달라진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보관된 와인이 미국이나 아시아에서 보관된 와인보다 높은 값에 거래된다.
여기에서 고려되는 것은 와인의 보관만이 아니라 어떻게 이동됐는지도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잠깐 일반적인 와인의 수송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보르도에서 생산된 와인은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 항구에서 출발해 이베리아반도를 돌아 지중해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를 넘어 홍해를 지나고 인도양을 건너서 싱가포르 앞바다 말레카 해협을 거쳐 남지나해를 지나 우리나라의 부산항에 입항하게 된다. 여기서 하역된 와인 컨테이너는 트럭에 실려 용인에 있는 와인 창고에 도착하게 된다.
이렇게 프랑스를 출발한 와인이 우리나라에 도착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27일 정도다. 그중 인도양을 지날 때부터 약 3주간은 적도의 뜨거운 바다를 항해하게 되는데 와인이 보관돼 있는 컨테이너의 내부 온도는 심하게는 영상 60도를 오르내리게 된다.
대중사우나에서 온탕의 온도가 영상 40도를 넘어가게 되면 한번에 몸을 담그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겁게 느껴진다. 영상 60도라면 아마도 김치가 실려 있었다면 김치찌개가 되기에 충분한 온도일 것이다. 그런 온도에 3주 이상 노출된다면 와인은 급속히 늙게 된다. 그러니 프랑스에서는 신선하고 맛있던 와인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맛이 될 수밖에 없다.
비행기를 이용하면 이런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비용문제가 걸린다.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냉장 컨테이너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국내에서 판매될 때 와인 가격이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냉장 컨테이너를 이용한 지 꽤 오래돼 같은 와인이라도 어떤 컨테이너에 실려 왔는지에 따라 가격이 좀 다르다. 소비자들도 이를 이해해 같은 와인이라도 다른 가격에 팔리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뜨거운 적도의 바다를 지나는 해운노선 대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면 어떨까. 좋은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북한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또 한 가지 동절기에는 컨테이너 내부의 와인도 얼어버릴 가능성이 있어서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게다가 북한과 철도가 연결돼 있다고 하더라도 소요되는 시간이 35일 정도 되기 때문에 해운에 비해 경쟁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와인의 운송수단 중에 해운 이외로는 뾰족한 수가 없다. 단 냉장 컨테이너는 더 많이 보급돼야 할 것 같다. 투자용 와인을 보관하는 런던 외곽 보세창고
다시 고급 와인의 보관으로 돌아가 보자. 와인은 생산돼 그 자리에서 이동하지 않고 그대로 오랜 시간 보관된 것이 가장 좋다. 이동을 하려면 아직 어릴 때 이동을 해 그 이후 한 곳에서 오랫동안 보관되는 것이 좋다.
이때 고려돼야 할 요소로 보관비용도 있다. 와인의 분실에 대비한 보험료도 고려돼야 한다. 고급 와인을 주로 매입하는 와인펀드들은 구매한 와인을 어디에다 보관할까. 대부분은 영국 런던의 외곽 템즈강 하구에 마련한 보세창고에 보관한다. 와인은 생산된 샤토 내에서 보관되는 것이 품질을 유지하는 데 가장 유리하지만 구매한 와인을 샤토에서 공짜로 수십 년 동안 보관할 수는 없다. 런던의 기후는 여름철에도 영상 25도를 넘는 일이 별로 없고, 겨울철에도 영상 5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러니까 여름철에 덥다고 에어컨을 틀어놓을 일도 별로 없고, 춥다고 겨울철에 히터를 틀어놓을 필요가 거의 없다.
게다가 항상 습도가 높아 와인 보관에 제격이다. 거기다 금상첨화로 보관해주는 창고에서 분실이나 도난 시에 시가로 변상해주는 특약도 맺을 수 있다.
이런 경제적인 이유로 와인펀드에서 구매하는 와인들이 대부분 런던 외곽의 보세창고에서 보관되고 있다.
런던 외곽에는 1000만 상자 이상의 와인을 보관할 수 있는 보세창고가 8개나 운영되고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와인이 저장돼 있는 셈이다. 이런 투자용 고급 와인은 런던의 보세창고에 보관하면 되지만 그것보다 저렴한 일반 와인은 어디에다 보관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
지하 와인저장실, 고급 와인냉장고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은 아마도 나와 내 친구들의 뱃속이 아닌가 생각된다. 와인을 아는 친구들과 즐겁게 마시고 추억 속에 보관하는 와인보다 더 값진 와인은 없을 것 같다. 고급 와인은 보관 장소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다. 어디서 보관하느냐에 따라 와인의 품질이 변하기 때문이다.
김재현 부장(SC제일은행 잠원PB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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