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이종상 화백 & 중앙대 김선두 교수

예술원 회원인 일랑 이종상 화백은 5000원 권(이이)과 5만원 권(신사임당)의 그림을 그린, 대표적인 한국 화가다. 서울대 정년퇴임 후에도 독도문화심기 운동과, 삼성과 일민 등의 문화재단 일을 보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를 제자인 김선두 중앙대 교수가 찾았다.
[Friends] 화업 50년, 일랑 이종상의 고집과 철학
처음 인터뷰를 청하자 이종상 화백은 대뜸 “왜 이제야 연락을 했느냐”고 반문했다. 화폐 그림을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화가에게 월간 MONEY(돈)가 왜 이제야 연락했느냐는 이 화백 식의 유머였던 셈이다. 인터뷰 당일까지 몇 차례 더 전화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일흔이 넘은 노(老)화백은 아들뻘인 기자에게 존칭을 썼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 화백과의 만남은 설 연휴 바로 다음날 이루어졌다. 그는 대담 상대로 제자이자 후배 동양화가인 김선두 중앙대 교수를 지목했다. 오랫동안 한국 화단을 대표해 활동한 덕에 다방면에 가까운 지인들이 많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봐온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두 사람은 김 교수가 재수를 하던 시절, 1977년 화가와 팬으로 연을 맺었다. 부친(남종 문인화가인 소천 김천두 선생)의 뒤를 이어 화가를 꿈꾸던 김 교수가 동산방 화랑에서 열린 이 화백의 ‘진경산수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 , 2005년, 52×52cm, 동유화 2 , 1982년, 89×89cm, 장지화
1 , 2005년, 52×52cm, 동유화 2 , 1982년, 89×89cm, 장지화
화가를 꿈꾸는 재수생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전시회

김선두(이하 김): 그때가 1977년 가을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동산방에서 전시회가 있는데, 가서 보라는 거였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어요. 그런 적이 없으셨거든요. 그게 이 선생님의 ‘진경산수전’이었는데, 그걸 보고 ‘저분한테 그림을 배워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종상(이하 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 선생 아버님 함자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죠. 아버님께서 추천하셔서 보러 온 줄은 몰랐네. 자기 자식을 다른 화가에게 제자로 삼아달라고 보내는 게 쉽진 않은 일인데 그게 소천 선생의 인품을 말해주는 듯해요.

김:‘진경산수전’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서구식 미술수업을 들어서 밀레부터 마네,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은 익숙했어요. 아버님이 동양화를 하셔서 동양화도 어려서부터 눈에 익었죠.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화집부터 6대가의 그림까지. 그뿐인가요. 월전 장우성, 운보 김기창, 남정 박노수, 천경자 선생의 작품까지 다 알고 있었죠. 그 모두가 전통적인 소재를 다룬, 목가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은 동양화에 대한 관념을 한번에 깨는 것이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도시 풍경 등이 동양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이: 제가 겸재 선생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과 비슷하겠네요. 겸재 이전까지는 전부 중국 산수화를 모방했거든요. 문인화가로 우리나라의 산천을 화폭에 담은 건 겸재 선생이 처음이었어요. 그 당시로선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죠. 저에게는 당시 전시가 그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전시회 제목도 그래서 ‘진경산수전’이라 붙인 거죠. 그때 선배들이 “겸재가 언제 작가인데 아직도 진경이란 말을 쓰냐”면서 ‘진경’이란 말을 빼라고 그랬습니다.

그때 제가 “진경이란 형상은 박물관에 보내야 하지만 진경의 정신은 앞으로도 이어나가야 한다”고 ‘진경산수전’을 고집했습니다. 제 나이 서른일곱에 연 전시였는데, 동료 작가들한테 욕도 많이 먹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기존 화단에서 다루지 않은 기차며 헬리콥터 등을 그렸으니까요.

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들판을 지나가는 기차를 그린 것이었어요. 한 10호쯤 되는 그림이었는데, 화풍이 너무나 신선했어요. 독도를 그린 작품도 그때 처음으로 출품하시지 않으셨나요.

이: 독도를 다녀온 직후였어요. 화가로서는 최초였죠. 아무도 독도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였어요. 그때부터 시작한 독도문화심기 운동이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당시 독도와 도시 풍경을 소재로 삼은 데는 예술이란 게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눈앞에 좋은 소재를 두고 초가집을 그려야 한다는 건 모순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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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사제관계를 맺어준 ‘동방연서회’

김: 지금도 그때 일이 생생해요. 나름 독하게 공부한다고 머리를 박박 밀었을 때였어요. 전시장에서 선생님을 뵈었는데 숫기가 없어서 인사도 못했어요. 그때부터 제 인생의 멘토가 된 거죠.

이: 그 이듬해 제자로 들어왔죠. ‘동방연서회’를 통해서요.

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정말 그렇게 됐어요.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때 아버님께 사군자를 배워야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동방연서회를 추천하셨어요. 거기서 선생님을 다시 만난 거죠. 그 전에 선배가 다른 선생님을 추천했는데 영 내키지 않더라고요.

이: 동방연서회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주도해서 만든 서화연구기관이었는데, 나중에는 동생인 여초 김응현이 서예를 가르치셨어요. 동양화는 6대가의 한 분이신 심산 노수현 선생이 가르치셨는데, 제가 심산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예요. 그런 인연으로 동방연서회에서 동양화를 가르치게 됐죠. 그때 일화가 하나 있는데 심산 선생님이 뒤를 이을 선생으로 저를 추천하자 여초 선생이 “일랑을 추천하는 걸 보니 자네가 보는 눈을 있구만 ” 하셨다더군요.

김: 일랑이라는 호도 여초 선생님이 주도해서 지어주신 거죠.

이: 당시는 제가 30대 후반이라 호를 가지기에는 어린 나이였어요. 그런데 여초 선생이 한학자인 월당 홍진표 선생에게 부탁해 호를 지어오셨어요. 거기에 일중 선생이 현판을 쓰고, 여초 선생이 낙관을 새겨주셨죠. 학생들이 주로 미대생들이었는데 참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김: 너무 철저하게 가르치셨죠.(웃음) 월요일과 목요일에 강의가 있었는데 통과하지 못하면 재수를 해야 했어요. 제 경우엔 7수까지 한 적도 있습니다. 난초만 20개월 그렸으니까요.

이: 그랬으니까 김 교수 선이 그렇게 고운 거야.

김: 맞는 말씀입니다. 보통 난은 5개월 정도 배우는데 저는 1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정도 감이 오더군요. 당시에 테크닉뿐 아니라 이론 강의도 하셨는데 그때 배운 게 지금 강의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그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평론으로 유명한 서울대 여교수분이 계신데, 친정어머니가 저한테 그림을 배우셨던가 봐요. 그때 쓴 강의 노트를 아직도 갖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그때 동방연서회를 다닌 분 중에 갤러리를 열거나 미술관장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김: 당시 학생들 중에는 유명한 집안의 분들이 많았어요.

이: 그런 학생들을 대상으로도 대학 수준의 원서로 강의를 했으니까. 일화도 적지 않아요. 한번은 관장이 불러요. 학생 중에 청와대 비서실 고위공무원의 아내가 있는데 협심증이 있으니까 적당히 좀 가르치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훨씬 어려운 문제를 냈어요. 그런데 인간의 능력이 참 대단해요. 그 어려운 시험을 다 통과하더군요.

김: 그렇게 시험에 통과하면서 실력이 부쩍 늘더라고요.

이: 그때 가르쳤던 학생들이 모두 교수가 되고 중견 작가로 성장했으니 얼마나 좋아요. 김 교수 같은 분은 영화에도 출연하고 말이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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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취화선>의 모티브가 된 ‘오원 장승업전’

김: 제가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 <취화선>에 출연을 했거든요. 최민식 씨의 그림 대역이 바로 접니다.

이: 당대 최고의 화가인 오원 장승업을 연기하려면 김 교수 정도의 중견 작가가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김: 대역도 선생님 추천으로 하게 됐습니다. 선생님께서 <취화선>의 총 자문을 하셨거든요.

이: 임권택 감독과는 제가 서울대 박물관장을 하던 2000년에 알게 됐어요. 당시에 저희가 ‘고구려전’, ‘발해전’, ‘독도전’ 등 다양한 전시를 했는데, ‘오원 장승업전’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오원 장승업전’은 작품을 모으는 데도 적잖은 공이 든 전시였어요. 제가 가진 작품에 여러 소장자들의 도움을 받았죠. 임권택 감독이 그 전시회를 찾았어요. 장승업이라는 사람은 워낙 이야깃거리가 많은 분이라 영화의 소재가 되겠다 싶었던 거죠.

김: 임 감독님이 관장실로 선생님을 찾아왔다고 하셨죠.

이: 그랬지. 그때 많은 이야기를 해줬어요. 한국의 문화를 ‘한의 문화’라고 하잖아요. 그건 일본인들이 지어낸 이야깁니다. 임 감독이 만든 <서편제>가 그 대표적인 영화고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전혀 달라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은 예술로 승화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문화의 근간은 ‘선비정신’이고 ‘해학의 미학’입니다. 선비는 시조를 읊고 농부들은 농악을 했어요. 지금도 골목마다 노래방이 넘쳐나잖아요. 한국인들의 신명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그 증거잖아요. 임 감독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김: 평소에도 관용과 너그러움의 미덕을 강조하시잖아요. 그게 우리의 화풍에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데요.
, 1991년, 121X90.5cm, 장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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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중·일 삼국의 그림을 보세요. 중국의 그림은 허장성세, 일본은 치밀한 기교로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어딘지 모르게 비어있고, 어벙한 느낌을 주거든요. 제가 그려 놓고 봐도 그래요. 일종의 미기교의 기교인 거죠. 저는 관용의 미덕이 그림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막사발 같은 도자기를 봐도 그래요. 우리 자기는 계산된 완벽함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성이 있어요. 거기에 일본인들이 매료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렀는데, 아무튼 그런 인연으로 영화 <취화선>의 자문을 맡게 됐습니다.

김: 촬영하면서 보니까 최민식이라는 배우, 참 대단하더라고요. 몇 달 전부터 동양화를 배우고 참 진지한 배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최민식 씨를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어요. 주연배우니까 제가 가진 오원의 그림을 보여줬죠. 그러면서 접신을 해야 하니까 작품에 손을 얹어보라고 시켰어요. 그랬더니 한참 동안 작품에 손을 얹고 있는 겁니다. 금방 뗄 줄 알았는데 말이죠. 작품에 손자국 남을까 봐 진땀 꽤나 흘렸습니다.(웃음)

김: 저 말고도 선생님의 많은 제자들이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다들 수염을 달고서요.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중견 작가들이 그처럼 다 같이 모이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이: 그 영화로 임 감독이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잖아요. 저로서도 거기에 일조한 것 같아 기뻤습니다.

김: <취화선>을 보면 좀 야한 장면이 나오잖아요. 흥행을 위해 어쩔 수 없다지만 그 부분이 살짝 아쉬웠어요. 그 장면만 없다면 후학들에게 좋은 공부가 됐을 텐데요.

이: 저는 <취화선>이 한류열풍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됐다고 봅니다. 그 뒤로 임 감독과 친분을 쌓아왔습니다. 둘 다 예술원 회원이라 요즘은 예술원에서 자주 봅니다. 영화도 영화지만 인품이 참 좋은 분이세요.

영화 <취화선>에 얽힌 뒷이야기 끝에 제자는 정년퇴임한 선생의 안부를 물었다. 제자의 물음에 작가는 “교직에서 은퇴하면 그때부터 전업 작가가 된다”며 교직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쁜 근황을 소개했다. “30년 이상 독도문화심기 운동을 해왔잖아요. 지금도 본부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삼성문화재단과 일민문화재단 등에서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크고 작은 강연이 끊이질 않네요. 작품 활동을 게을리할 수도 없고요.”
2 , 2008년, 800X8100cm, 자연석야외, 3 , 1992년, 300X200cm, 장판화
2 , 2008년, 800X8100cm, 자연석야외, 3 , 1992년, 300X200cm, 장판화
, 2008년, 800X8100cm, 자연석야외, 3 <원형상 -대지>, 1992년, 300X200cm, 장판화">
말을 맺으며 이 화백은 김 교수와 함께 저녁 모임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 화백 내외와 점심을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이 화백은 ‘돈을 그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돈에 대한 철학’을 들려주었다.

“돈은 벌고 모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가치 있게 쓰는 겁니다. 돈을 잘 쓰면 100원으로 1만 원의 값어치를 할 수 있어요. 운보 선생은 이걸 ‘돈의 마술’이라고 하더군요. 돈은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일흔이 넘은 노화백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