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만남을 앞두고 솔직히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첫인사는 어떻게 할까. 대화의 물꼬는 어떻게 터야 할까. 혹시나 하고 10년 정도 차이 나는 후배에게 “김현희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모른다”였다.

겨우 열 살 차이에 ‘그 엄청난’ 사건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을 보면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 중 어떤 이들은 “전혀 모른다”고 할 만큼 그의 칩거 시간도 꽤나 오래된 듯했다.

대한민국을 분노와 슬픔에 빠뜨렸던 ‘KAL858기 폭파’ 사건이 터진 것이 1987년이니 벌써 23년이 흘렀고, 1997년 자신의 수사관이었던 정모 씨와 결혼한 후 세인의 관심권에서 사라졌으니 그 또한 13년이나 됐다.
[Special Interview] 김현희, 또는 마유미…‘잊혀지지 않을’ 얼굴과 ‘잊혀진’ 얼굴로 산 23년
지인으로부터 “김현희 씨를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기억 속의 시곗바늘을 열심히 거꾸로 돌렸다.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녀의 나이 스물 다섯. 지금은 쉰을 바라보는 아주머니로 변했을 터.

네 살 때까진 쿠바에서 자랐다고 하니 그녀의 인생에선 북한보다 남한에 산 시간이 더 길다. “이젠 여자로 살고 싶다”고 했던 그녀는 과연 대한민국의 ‘보통 여자’로 살 수 있었을까.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식당.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선 기자를 문 앞에서 먼저 맞은 것은 경호원들이었다.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주뼛거리는 중 방 제일 안쪽에서 “안녕하세요”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자와 경호원들과의 짧고도 어색한 인사가 이어진 후 재빨리 방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긴 머리에 통통한 볼 살로 기억되던 그녀는, 얼굴은 시쳇말로 CD 한 장 만하게 작아졌고, 길었던 생머리는 산뜻한 쇼트 커트로 변신해 있었다.

피부는 예전 TV에서 보던 대로 뽀얗고 맑았지만 웃을 때 눈 아래로 잡히는 잔주름들이 평탄치 않았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해 주는 듯했다. 그녀의 옆 자리는 그간 지면을 통해 이니셜로만 알려졌던 남편 정 씨가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만난 것이 2010년 12월. 여러 차례에 걸친 설득 끝에 1월 중순에 다시 그녀를 만났다. 코끝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한파가 몰아치던 날.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가벼운 옷차림으로 한국경제신문 빌딩 로비에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비쳤다. 인터뷰 장소로 옮긴 뒤 어색하게나마 대화는 물꼬를 텄고, 북한 말투가 섞인 말로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1988년 1월 안기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현희 씨
1988년 1월 안기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현희 씨
‘김현희 가짜설’로 집 나온 지 8년째

얼굴이 너무 작아져서 일간에 돌았던 ‘성형설’이 사실이 아닌가 싶은데요. 생각보다 마르셨습니다.

“다들 성형했냐고 묻는데, 아니에요. 살이 빠져서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닌가 싶어요. 눈 아래 자글자글한 주름 보세요. 저도 이제 나이 든 아줌마인데요, 뭐.(웃음)”

지내긴 어떠신가요?

“좌파정권(그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절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후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자리로 돌려지질 않네요. 생활하기도 어렵지만 저희 나름대로 투쟁해야죠.”

지난 정부 때 ‘김현희 가짜설’이 제기되면서 오랜 시간 칩거하신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은둔생활을 할 생각입니까.

“제가 상황이 많이 어렵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저를 ‘가짜’로 몰아 잠 자고 있던 한밤중에 MBC 방송(PD수첩)에서 카메라를 들고 집을 거의 습격하다시피 들어오는 바람에 자던 아이들을 들쳐 업고 제 집을 나와 산 것이 벌써 8년째예요. (2010년 봄 그녀가 12년 만에 말문을 열었던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 기사에는 현재 쥐와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허름한 옥탑방에 산다고 묘사돼 있다)

네 식구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좁은 집에 있다 보니 아이들이 친구도 마음대로 데려오기가 힘들어요. 계속 이렇게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조금씩 대외적인 활동도 할까 고민 중이에요.”

결혼하신 지 13년째인데,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됩니까.

“예,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결혼을 너무 늦게 해서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에요. 공장 문 닫기 직전에 낳은 셈이죠. (웃음)”

한창 키우기 힘드실 때네요.

“예, 엄마 손이 많이 갈 때죠. 숙제 봐주느라 힘들어요.”

[Special Interview] 김현희, 또는 마유미…‘잊혀지지 않을’ 얼굴과 ‘잊혀진’ 얼굴로 산 23년
북한에서 배운 교과 내용과 달라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예, 많이 어려워요. 북에서는 어릴 때부터 주체사상 교육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남한 교과 과정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래서 애들이 물어보면 단원 요약부터 미리 읽어보고 공부합니다. 제가 먼저 공부하고 가르쳐 주는 식이죠.”

오늘 서울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뭐, 그리 어렵지 않게 왔습니다. 가끔 일이 있거나 하면 오니까요.”

경호원이 24시간 따라다니는데, 보통 주부처럼 마트도 가고 미장원에도 가십니까.

“예, 경호원들과 같이 갑니다. 저희는 마트보다는 싼 재래시장을 이용하는 편이에요. 재래시장은 단골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잖아요. 남편이 외모와 달리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한데 시장에 가면 가격 대비 품질을 일일이 비교해서 물건을 살 정도예요.(웃음)

가끔 애들이 시장에 따라 나설 땐 뭐 하나씩 사달라고 하는데, 남편은 절대 그냥 사주질 않아요. 필요한 것만 사고 바로 집으로 직행하는 바람에 딸 아이는 아빠랑 마트나 시장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죠.”

북한의 위협을 감지한 적은 없으십니까. 이한영 피살사건 때는 어떠셨나요.

“이한영 피살사건(김정일의 처조카인 탈북자 이한영 씨가 1997년 남파 간첩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 당시에는 경찰에서 전화를 해서 알려주는 바람에 바짝 긴장했었죠. 한두 달 정도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북한 말투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제가 서울말을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나이 들면서 이북 말투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요. 요즘은 가게 같은 데 가서 사람들이 말투가 다르다고 하면 그냥 강원도 사람이라고 합니다. 연변에서 왔다고 하기도 하고요.(웃음)”

여행은 자주 다니십니까. 해외 여행도 가시나요.

“멀리는 못 가고 사는 곳 주변만 다닙니다. 해외 여행은 2010년 (납북된 일본인 문제로) 일본에 갔던 것이 처음이었어요. 납북자 문제니까 (정부에서도) 협조했던 것 같아요. 특별히 배려를 해줘서 허가를 받았죠.”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수한 신분인데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남한에 온 뒤로는 늘 경호원들(경호팀은 주기적으로 바뀐다)이 있어서 보통 사람과는 아무래도 처지가 좀 다르죠. 처음 10년 동안은 강연, 간증도 열심히 했습니다만, 1997년 결혼하면서 조용히 살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KAL기 폭파 조작설’이 돌기 시작하더니 특히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과거사 위원회 같은 정부기관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이 앞장서 저를 ‘가짜’로 모는 작업을 하는 통에 살던 집에서 쫓겨났는데 아직 해결이 안돼 방황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때는 조사받으라고도 하고, 위협도 많아 견디기 힘들었었죠. 너무 괴로워 자살까지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그들’의 의도대로 내가 가짜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에 참고 견뎠죠. 신앙심과 가족이 있어 그 어려운 고비를 넘겼구나 싶습니다.

요즘은 애들이 아직 어려 뒷바라지하느라 바쁩니다. 아침에 아이들 챙겨서 학교 보내고 일상은 일반 주부들과 비슷해요. 아직 애들이 손이 많이 필요할 때라 학교 다녀오면 숙제도 봐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그러죠. 주말에는 애들하고 등산도 합니다. 운동도 시켜야 하니까요.”

자본주의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셨나요.

“제 경우는 좀 특수합니다만, 보통 탈북자들이 (남한에) 오면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은행 ‘이자’입니다. ‘이자’라는 게 왜 생기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되거든요. 북한에는 은행이란 말 대신 ‘저금소’라고 부르는데 이자란 게 없어요. 이자가 없는 대신 저금액이 많은 사람에게는 새 TV를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선물을 줍니다.”

22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정부 초청으로 지난해 7월 일본을 방문했다.
22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정부 초청으로 지난해 7월 일본을 방문했다.
이자가 이해되지 않았다면 주식투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럼요.(웃음) 저 같은 경우엔 형편도 어렵고 주식이란 게 위험해 보여서 생각도 안 했지만 다른 탈북자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될 수 있겠죠. 탈북자들이 보통 귀가 아주 얇거든요.

이자라는 것도 모르다가 원금을 몇 배로 불릴 수 있는 주식투자 얘기를 들으면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죠. 예전에 방송도 많이 하고 사업도 했던 탈북자 가운데 땅 사는 데 돈 보태라고 해서 보탰다가 사기당한 사건도 있었잖아요. 탈북자들이 그렇게 순진해요.”
“좌파정권 시절 너무 힘들어 자살도 생각했지만 신앙심으로 이겨냈어요.”
“좌파정권 시절 너무 힘들어 자살도 생각했지만 신앙심으로 이겨냈어요.”
특별한 취미생활이 있습니까.

“아직은 취미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끔 등산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게 전부죠. 책은 여러 가지로 많이 봅니다. 잡지도 보고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도 다시 봤는데, 다시 보니 그 책 내용이 북한과 너무나 흡사하더라고요. 일본어 책도 보고 그럽니다.”

등산 갈 때도 경호원과 함께 갑니까.

“예, 같이 가야죠.”

“공작원 양성소에서 남한 드라마 시청… 지하에는 서울 주요 거리 재현한 모형도.”
“공작원 양성소에서 남한 드라마 시청… 지하에는 서울 주요 거리 재현한 모형도.”
“북한은 경제 위기로 자멸할 것”

23년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정리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했다. 어떻게 살았는지 ‘생활인 김현희’를 알아가는 동안 대접했던 찻잔이 어느새 식어가고 있었다. 겨울 바람에 시달렸을 손도 녹일 겸 따뜻한 차 한 잔 더 하겠냐는 제안을 하며 화두를 두 번째 ‘라운드’로 옮겼다. 어쩌면 기자보다 그가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을 법 해서다.

노무현 정부 때 MBC TV 와의 ‘앙금’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그 후로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있었습니까.

“저는 MBC 때문에 제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고, 그들은 아직까지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민권익위원회 같은 곳에 진정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그렇게 말씀하신 분들도 계셨는데, 그런 곳에 얘기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부 차원에서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아직도 알아봅니까.

“요즘 사람들은 잘 못 알아보더라고요. 2010년 국가정보원 신입직원 교육 때 특강을 했는데 신입사원 대부분이 1980년대 생이더군요. KAL기 사건 이후에 태어난 세대죠. 그러니까 안보교육을 더 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친구들은 (KAL기 사건 자체도) 긴가민가할 거 아니겠습니까.”

남한에 산 것이 벌써 23년입니다. 지난 23년은 어땠나요.

“(그는 바로 답변을 못하고 한동안 침묵했다) 제가 사실 큰 죄를 짓고, 당시만 해도 한국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왔고…. 제 운명이 그런가 봐요. 사형판결까지 받았으니…. 느낀 게 많죠. 사실 북한과 남한은 비교 자체가 안됩니다.

살수록 더욱 비교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제 면을 얘기한다면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완전 승리, 공산주의 사회 완성 등 국가 발전 단계를 정해 놓고 있어요. 사회주의 완전 승리가 이뤄지면 모든 주민들이 기와집에서 고깃국 먹고 잘살고, 도시와 농촌의 차이도 없으며 여성들이 가사일에서 해방된다고 선전해 왔죠.

하지만 김정일 시대에도 안 됐고, 지금은 김정은(3대) 시대인데 오히려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해서 북한 주민들이 아사 직전의 상태입니다. 생활수준을 보면 남한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완전 승리’ 단계를 이룬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남북한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풍부하니까 젊은 사람들 안보의식이 부족한 게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2010년 천안함 사태 등이 남한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양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는 사회입니다. 사실 그동안 북한을, 즉 ‘적’을 동무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북한을 해롭게, 남한을 이롭게 한 사람들을 (정부가) 힘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죠. 물질적인 것만큼 정신적인 것도 건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안타까웠습니다. KAL기 사건은 북한의 대표적 테러 사건인데 그걸 뒤집으려 했던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8년째 칩거하고 계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결혼 전엔 (강연과 간증으로) 전국에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로 활동을 많이 했는데, 결혼 후엔 시골에서 조용히 참회하면서 살려고 했어요. 제가 활동을 너무 많이 하니까 싫어하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1997년에 (KAL기 사건) 유가족 분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면서 대화를 나눴죠. 제가 수기를 썼었는데, 책으로 벌었던 인세를 드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유가족 대표께서 마음고생 했다고 이제 맘 편히 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바로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어요. 그땐 이제 막 애를 낳아 키우는 저를 공격하기도 뭐했는지 조금은 조용히 지나갔는데, 노무현 정권 때는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힘들었습니다. 그 후론 전혀 활동을 안 했습니다.”

팀이 밤에 쳐들어왔었다고요.

“그땐 뿐만 아니라 모두 연대해서 저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죠. 애들이 한 살, 세 살로 어릴 때라 당장 갈 데도 없고 허름한 단칸방으로 도망갔어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서 조사하겠다고 계속 찾아왔었습니다.

조사받으라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그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처음엔 왜 쫓겨났는지도 몰랐는데 지나 보니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 연결이 됐구나 싶더라고요.”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예요. 북한에서는 회랑식 아파트(남한의 복도식 아파트, 그녀는 인터뷰 중 부지불식간에 북한식 용어를 사용하곤 했다)에 살았는데 겨울이면 보일러가 터져서 물 길러 다니곤 했어요.

그런데 같은 상황을 남한에서 다시 겪게 됐죠. 보일러가 안 돌아서 고생하고, 쥐와 바퀴벌레가 들끓는 곳에서 살면서 너무 힘들었지만, 북한에서도 살았는데 내가 이걸 왜 못 이겨내랴 생각하고 참았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북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저더러 항복하라고 압박을 해오는데 거기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기도 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북한 주민들이 먹고 사는 것이 해결이 안 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북한이 무너진다면, 경제 때문일까요.

“예. 한 마디로 경제 때문에 북한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라서 계획경제 시스템입니다. 그러니 모두 다 직장에 다닙니다. 조직 속에서 일하고 월급을 타고 하지만 식량은 배급제죠. 한 달에 두 번 15일마다 배급소에 가서 곡식을 받아요.

제가 살 때만 해도 배급제가 유지됐는데, 1986년부터 상황이 안 좋아져서 그것마저도 어려워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1986년경부터는 북한에서도 시장이 활성화됐어요. 돈만 있으면 시장에 가면 뭐든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외화가 있으면 시장에서 암거래도 하고 그런답니다. 시장이 그렇게 커졌어요. 하지만 계획경제는 점차 무너진 거죠. 1997년도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하잖습니까. 북에서는 자생적으로 시장(시장경제)이 커졌다고 생각해요.

국가 배급이 안되니 오히려 시장에 나가서 물건 팔아 돈 벌기가 더 수월하니까요.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물건이 들어가기도 하고요. 북한 주민들도 국가보다는 시장경제에 의존해서 생존해 온 거라 볼 수 있어요.”

‘김정일-김정은’에 이어지는 후계체제 속에서 경제문제가 해결 안되면 북한이 망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들도 알고 있지만 경제가 해결 안 되니까 주민들 불만이 생기는 거죠. 제가 살 때만 해도 지금처럼 불만이 크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2009년에 화폐개혁 한다고 중산층 돈 다 거둬가는 바람에 더 어렵게 된 거죠.

북한 주민들 의식도 예전보다 많이 깨어서 당 지도부에 불만이 많아졌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경제를 해결해야 민심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겠죠. 2010년 두 차례나 남한을 도발한 것도 결국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북한은 자신들이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핵’ 카드로 협상해서 (대북지원을) 끌어들이려는 거죠.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죽는 것이거든요. 북한에게 핵은 생존, 존재감의 표현이죠.”

2010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폭격 사건을 지켜본 소감은 어떠셨습니까.

“북한의 도발을 보면서 1987년 KAL기 사건 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싶었습니다. 연평도 사건은 북의 내부 사정이 다급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 한 해 두 번씩이나 직접적인 도발을 한 것은 북한으로서는 모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은 생애 가장 고마운 사람”

“남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모르고, 또한 북한의 실상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모르고, 또한 북한의 실상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이제 남한 사람으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했다. 교회를 자주 나가지 못해 집에서 케이블TV로 기독교 방송을 보며 올리는 기도에는 평범한 엄마로서 두 아이를 위한 기도, 남편을 위한 기도,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가 포함된다고 했다.

신앙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남한으로 와서 자백하고, 사형선고까지 받는 과정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때 박세직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께서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셨어요. 국정원에1년 남짓 계셨는데, 어떻게 하면 저를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신앙으로 인도해야겠다는 생각에 여의도에 있는 한 교회를 소개해 주셨어요.

하나님 말씀 듣고, 기도하고, 재판장 들어갈 때도 기도하고 그랬죠. 그 후로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좌파정부 시절 어려울 때도 가족과 함께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자주 가진 못하고 가끔 가는데 요즘은 기독교 방송을 보며 집에서 기도합니다.”

요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주로 애들에 관한 것이죠. (천안함 사태 등) 사건 있을 때마다 이 나라 안보에 대해서도 기도 드립니다. 저는 KAL기 사건의 산증인이잖습니까. 그런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종북(從北)주의자들과 맞서서 싸우는 것도 제 운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게 뒤집어진다면 대한민국이 (자작극을) 했다는 것 아닙니까. 북한이 종북주의자들을 부추기는데,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제작된 드라마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일본의 시각에 의해 재해석한 일본 TBS의 특집 드라마. 일본 스태프 외에 한국 스태프도 참여했다)가 국내에는 방영이 안됐는데 혹시 보셨는지요.

“얼마 전에 (일본에서) 테이프를 보내왔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거의 1년 동안 기획해서 KAL기 사건 23주기에 맞춰서 방영 계획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연평도 사태가 나서 방영 시기가 미뤄졌어요.

한국인 배우가 (김현희로) 나왔죠. 일본에서는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드라마 속에는 KAL기 사건도 사건이지만, (북한의) 납치 문제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은 방송 3사들이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방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 소식은 어떻게 접하십니까.

“신문 통해서 보기도 하고, PC방에 가서 자료를 뽑아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요즘은 탈북자들이 많아서 소식이 잘 들어옵니다.”

통일에 대한 솔직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언젠가는 돼야죠. 남한도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김정일 체제가 그렇게 오래 가겠습니까. 지켜봐야 할 문제죠. 하지만 지난 정부 때처럼 맹목적으로 북한을 도와주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소식은 들으십니까.

“제가 맏딸로 (남한에) 올 때는 밑으로 여동생, 남동생이 있고, 부모님이 계셨는데, 부모님은 돌아가시지 않으셨나 추측만 합니다. 온 뒤에는 전혀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엄마가 ‘마유미’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직은 어려서 뭐든 ‘그게 뭐야’ 하고 묻는 정도인데,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얘기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엘리트 교육을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남한의 엘리트 교육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북한에서는 엘리트를 국가에서 키웁니다. 초등학교가 예전엔 인민학교였는데 요즘은 ‘소학교’라고 바꿔 부르더군요. 보통 초등학교4학년이 되면 당 간부로 키우기 위한 절차가 시작되는데, 간부가 될 만한 아이들은 소위 영재학교로 뽑아갑니다.

출신 성분도 보고, 학업 성적도 보고, 인물도 봅니다. 키가 아주 작거나 하면 어렵죠. 각 학교에서는 학기마다 정해진 인원 수대로 추천을 하는데, 추천받은 아이들은 시험을 칩니다. 4학년 때 시험에 합격하면 영재학교로 가는데, 그러면 대학 가기가 쉽습니다.

민족 간부 양성의 과정이랄 수 있죠. 북한 대학은 단과식인데 김일성종합대도 실질적으로 종합대학은 아닙니다. 남한의 발전에는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이 뒷받침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 학원을 너무 많이 보내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이 저녁 8시 집에 온다고들 해서 그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냐고 물어보면 반드시 그렇진 않더라고요.(웃음)”

자제분들은 학원에 보내지 않고 있나요.

“남편이 보내는 거 싫어해서 안 보냅니다. 남편이 남다른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면서 커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래도 애 둘 다 유치원 못 보낸 건 마음에 많이 걸려요.

8년 전에 갑자기 집을 나오면서 형편이 여의치 않아 유치원을 보낼 수가 없었는데, 학교를 보내놓고 보니까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남 앞에 나서서 발표를 한다든지 활발한 편이 못돼요.”

남편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처음 왔을 때부터 만났던 사람(수사관)이죠. 그때는 남편이 될 거라 생각을 못했고, 그저 여러 수사관 중에 한 사람이었죠. 시간이 흐르면서 좀 지나고 보니 남편은 마음이 따뜻하고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배려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느껴졌었죠. 나이 들면서 그런 면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어떤 계기가 있어 남편과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게 됐어요. 2년 정도 데이트를 했는데 정부에서 승인을 안 해줘서 결혼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북한에서 받은 공작원 교육은 어땠나요.

“저는 원래 일본 쪽에 파견되는 공작원 교육을 받았어요. 김승일 할아버지(KAL기 폭파 공범, 그녀는 아직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경호 겸 위장 실습으로 1984년 일본에 같이 나가기도 했어요.

그때 혹시 남한에도 들어갈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남한에 대해서도 교육받았는데, 제목이 <시장 사람들>이었던가 그런 드라마들을 보여주더라고요. 이주일 씨 나오는 코미디 프로도 그때 봤어요.

당시 남한 배우들은 연기를 정말 자연스럽게 잘하고 어휘력도 풍부하다고 느꼈습니다. 금성정치군사학교(공작원 양성소)에서도 교육을 받았는데 그곳 지하에는 서울의 주요 거리가 모형으로 재현돼 있어요. 남산, 을지로, 종로 길 등을 외우게 했는데 그 교육을 받으며 ‘지금까지 남조선이 굉장히 못산다고 교육받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물론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요.”

두 아이들에게는 ‘북한’을 어떤 나라로 말해 주십니까. 엄마의 고향이라는 건 알고 있나요.

“이모와 삼촌이 있다고 말하긴 했는데, 가끔 어디 계시냐고 물어봐요. 구체적으로 얘기는 안 해주는데 큰아이는 눈치로 아는 것 같아요. 남자 애라 입은 무거운데, 동생한테 ‘북에 있지’ 하고 말해주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떤 일을 했으면 하십니까.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요. 제가 너무 이런 생활을 해와서 자유롭게 살았으면 해요.”

아이들과 노래방도 가십니까.

“한 번인가 두 번 간 적 있어요. 옆에 계신 분들(경호원들)이 가자고 해서 갔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더군요. 처음엔 귀 막고 있더니 나중엔 마이크를 안 놓더라고요.”

가계부도 쓰시나요.

“가계부는 제가 안 쓰고 남편이 쓰죠. 남편은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했는데, 그때부터 가계부를 꼼꼼히 쓰면서 한 달 생활비를 아끼고 또 아꼈다고 해요(옆에 있던 남편은 그 당시 철저한 생활비 관리 덕에 어려웠지만 소주 한 잔 마실 비용도 마련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때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지금도 저한테 잔소리도 많이 해요.(웃음)”

요리 솜씨는 어떠십니까.

“남한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는 이북에서 친정어머니가 해 주시던 개성 음식을 해 먹다가 점차 남한 음식을 시도하게 됐는데, 썩 잘 하지도 그렇다고 형편없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남편이 경상도 출신이라 맵고 짠 찌개를 엄청나게 좋아해요.

갈치조림도 하고 찌개도 하고 남편 좋아하는 것들 대충 흉내 내서 만들다 보니까 제 입맛도 변했고요, 이제는 재료만 있으면 기본은 하는 것 같습니다. 김치도 처음에는 개성 백김치를 담가 먹었는데 결혼하고 큰댁과 김장을 같이 담그면서 남한식 김치를 배웠어요. 2010년까지 김장을 담갔는데, 올해부터는 저 혼자 담그기 시작했어요. 배추 사다가 소금 뿌려 재어놨다가 김칫소 만들어서 제법 담갔습니다.”

23년을 남한에 살았으니 북한에서 산 기간보다 깁니다. 지금은 스스로를 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 북한에서는 교육받은 것밖에 없고 산 것으로 따지자면 남한에서 산 시간이 더 깁니다. 이제는 남한 사람이죠, 뭐. 남한 식으로 생각하고, 신문 보고, 공감하고 그러니까요. 물론 북한은 나서 자란 곳이고 부모 형제가 있어서 안타까운 면도 있지만, 연평도 사건이 났을 때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울분을 토하기도 했고, 보복을 못해서 화가 났었어요. 남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모르고, 또한 북한의 실상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남한)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요.

“KAL 기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와 증인으로서 사건을 증언해 드려야죠. 사건을 진짜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결국 통일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지난 10년간 (남한)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고 느꼈습니다. 집안에서 내부의 적을 단속 안하고 어떻게 바깥의 적과 싸워서 이기겠습니까.”

휴대전화도 없이 친지나 지인과 연락도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어떻게 연락하십니까.

“친지들과 연락을 별로 안 합니다. 예전에는 했는데, 집에서 나오고 난 뒤로 일체 끊었습니다. 오히려 휴대전화 같은 것이 있는 게 도움이 안 됩니다. 휴대전화를 끊고 사니까 나름대로 편합니다.(웃음) 남편이 어디 가서 연락이 없어도 그저 오겠지 합니다.”

남한에 오신 뒤 친구는 만드셨나요.

“항상 보호를 받고 있는 처지라 편안하게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불편하지만 상대방도 불편하기 때문이죠.”

여생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본의 아니게 책도 쓰고 그랬는데, 너무 공인화되니까 불편하더라고요. 평범하게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그럴 운명도 아닌 것 같아요. 북에 납치된 일본인들 문제도 제가 제기를 했던 것인데, 그런 일도 제 사명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들도 북한에 의한 피해자들이라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생을 통해 가장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요.

“고마웠던 분들도 많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은데, 지금은 남편이 제게는 제일 고마운 사람이죠. 어려울 때 옆에서 항상 지켜줬고요.”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안경을 찾아 꺼내 썼다. 처음엔 그저 ‘변장용’으로 썼는데, 눈이 나쁘지 않아도 쓰다 보니 습관이 됐다는 것이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얼굴’과 ‘잊혀진 얼굴’이 공존하고 있었다.


글 장헌주·사진 김영우 한국경제신문기자 chj@hankyung.com